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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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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년, 그 ‘어머니의 눈물’

by 낮달2018 2021. 9.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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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여덟 어머니 가슴속 아들은 여전히 스물여덟이다

 

▲ 고 정경식(1959~1987) 열사

살아 있다면 아들은 쉰둘이 된다. 그러나 어머니의 가슴속에 아들은 23년 전 스물여덟 살로 살아 있다. 사고로 운신할 수 없는 남편을 부양하며 마산에서 함안까지 오가며 생선을 팔았던 어머니. 대우중공업에 다니던 아들이 집에 다니러 온 날, 아들이 좋아하는 돼지불고기를 해주려고 평소보다 일찍 생선 노점을 접고 돌아왔지만, 아들은 반대로 어머니를 만나러 시장에 가서 길이 엇갈렸다.

 

그리고 그 불발로 끝난 만남이 모자가 나눈 마지막이었다. 며칠 뒤, ‘민주노조’를 꿈꾸던 아들은 실종되었다. 아들은 결국 아홉 달 만인 이듬해 3월 유골로 돌아왔다. 검찰은 아들이 목을 매 자살했다고 발표했다. 어머니는 그걸 믿을 수 없었다.

 

그때부터 어머니는 ‘죽음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아들의 죽음을 파헤칠수록, 아들이 살았던 삶과 가까워져 갔다.’(<한겨레> 기사) 그리고 어머니는 비로소 23년이나 미루었던 아들의 장례를 ‘민주노동자장’으로 치르게 되었다.

 

대우중공업 노동자로 일하다 실종되었다가 의문의 주검으로 발견된 고 정경식(1959~1987) 열사 이야기다. 그의 장례 소식은 어제 <한겨레>의 ‘민주노동자장’ 광고를 통해서 알았다. 그러나 물론 나는 그가 누군지 알지 못했다. 1980년대 후반이라면 적지 않은 의문의 죽음이 줄을 잇던 시절이다.

 

▲ 김을선 어머니 ⓒ 〈한겨레〉 김봉규

오늘 아침에 <한겨레> 1면에 실린 기사를 읽는데 목이 칼칼해져 왔다. 상황을 재구성해 쓴 임지선 기자의 기사가 아니었다면 그냥 여느 노동 열사의 장례가 뒤늦게 치러지는구나 하고 넘어갔을 것이다. 28살, 생때같은 아들의 죽음을 부여잡고 그 진실을 찾기 위해 어머니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다.

 

어머니는 대우중공업의 고소로 교도소에 갇히기도 했고 진상 규명을 위해 정치인에게도 매달렸다. 김대중 정부 때 대통령 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발족하자 어머니는 여기에 마지막 기대를 걸었다. 대우중공업의 합의 제의도 뿌리쳤다. ‘자식을 팔아먹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진상규명위도 진상을 밝히지 못했다. 위원회는 아들이 민주화운동을 확인해 주었지만 누가, 무슨 이유로 죽인 것인지를 규명하지 못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도 같은 결과를 내놓았다.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원회가 ‘정경식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한다’라는 결정을 내린 것은 지난달이다. 진상을 규명하지 못했지만,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사망했고, 물증은 없지만 ‘타살’ 정황이 참작된 결과다. 23년 동안의 기다림과 싸움의 결과 앞에 어머니는 주저앉았다.

 

그러나 이제 아들을 보내기로 한 것이다. 마석 모란공원 납골당에 안치해 왔던 아들의 유골은 7일 오후 입관되었다. 오늘 어머니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경남 솥발산 열사 묘역에 묻히게 될 것이었다. 23년 만에 아들은 유골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온다.

 

우리는 분노도 잊고 불의를 쉬 추인해 버린다

 

정경식 열사는 1959년생, 나보다 세 살 아래다. 살아 있었으면 올해 쉰둘, 나는 일흔여덟 어머니의 아픔과 슬픔 앞에 몹시 부끄러워졌다. 어두운 시절을 너무 오래 겪은 탓일까. 우리는 너무 쉽게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긴 억울하고 한스러운 죽음이 어디 하나둘인가.

 

한 죽음은 한 세계의 무너짐이고, 모든 죽음은 세상의 무게보다 가볍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불의의 세상과 그것의 불의를 너무 쉽게 추인한다. 분노하는 대신 혀를 차면서 이 불의를 추인한다. 분노와 슬픔에도 둔감해진 것이다.

 

김을선 어머니의 눈물을 보면서 나는 2002년에 세상을 떠신 내 어머니를 생각한다. 우리가 만약 정경식이었다면 우리의 어머니 역시 김을선 어머니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이 나라의 가혹하고 슬픈 현대사는 숱한 ‘어머니’를 낳았다.

 

전태일의 어머니(이소선), 이한열의 어머니(배은심)가 그렇고 박종철과 강경대의 아버지가 그들이다. 그들은 자식의 죽음을 통하여 나라의 심연을 들여다본 이들이다. 앞세운 자식을 통해서 그들은 자신과 무관하다고 믿었던 자유와 민주주의를 배웠고, 그것을 얻기 위해 싸우는 투사가 되었다.

 

어머니가 지난 스물세 해 내내 꾸었다는 끔찍한 꿈, 칼로 생선을 다듬다가 고개를 돌리면 저 너머 아들 경식이가 작업복 차림으로 서 있다. 아들을 부르며 어머니가 다가가면 아들은 뒤로 물러난다. 그리고 희미한 목소리가 건너온다. “어무이, 내가 우짜다가 이리 됐소?”

 

정경식 열사는 지금쯤 솥발산 묘역에 묻혔으리라. 그리고 지난 스물세 해 동안 잠들지 못했던 고단한 몸을 쉬리라. 나는 그의 안면과 함께 그 어머니도 눈물을 거두고 이제 편히 쉬시길 빈다. 아직도 밝히지 못한 죽음의 진실은 남은 사람들이, 남은 역사의 몫으로 돌리시고. 어머니, 이제 꿈도 없이 꿈도 없이 편히 쉬소서.

 

 

2010. 9. 8.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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