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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복무 24개월 ‘백지화’? 청년세대 우롱이다

by 낮달2018 2021. 9.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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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뛰는 복무기간 논의…‘18개월’ 약속을 지켜라

▲ 훈련 중인 병사들. 영화 해안선(2002)의 한 장면.

얼마 전, 동료가 연가를 내고 입대하는 아들을 배웅하고 왔다. 그 아이는 강원도 최전선에 배치되는 모양이었다. 때마침 ‘군 복무기간’을 두고 논란이 일고 있어서 “이거, 시기를 잘못 탄 거 아닌가” 했더니 동료들이 “아직 확정되지 않았고, 확정 이전 입대자는 해당되지 않는다”라고 정정해 주었다.

‘군 복무기간’ 관련 논란의 핵심은 역시 ‘사병 복무기간 24개월 환원’ 방침과 2014년으로 예정된 ‘18개월 단축 방안’ 사이의 충돌이다. 참여정부 때 확정된 18개월 단축 방안을 전면 백지화하고 원점으로 재검토하겠다며 국방부 국가안보총괄점검회의(의장 이상우)는 ‘군 전력 강화를 위해 사병 복무기간 24개월 환원’ 방침을 밝힌 것이다.

나는 얼마 전 우연히 버스에서 라디오 뉴스를 통해 그 소식을 전해 들었다. 아니 줄어도 시원찮을 복무기간이 뜬금없이 거꾸로 돌아가? 친구들을 만나서 캐물었더니 그들의 반응도 비슷하다. 그러게, 요즘 거꾸로 돌아가는 게 하나둘이어야 말이지.

사병 복무기간 논란, 18개월 단축 백지화

사람은 얼마나 자기 이해에 민감한가. 우리 집 아이는 이미 몇 해 전에 전역했으니 나는 이 논의의 결과와는 무관하다. 그래서 복무기간 환원 방침을 심드렁하게 바라보고 말았지만, 입대를 앞둔 청년들과 그들의 애인들, 그리고 부모들이라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만한 소식이다.

알다시피 이 땅의 건강한 남자들에게 ‘병역’은 일종의 트라우마(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다. 대부분의 예비역 장병들이 제대한 지 십수 년이 지나도록 ‘재소집’되는 꿈을 꾸며 식은땀을 흘리는 것이 그 움직일 수 없는 증거다. 나는 좀 호되게 군대 생활을 해서 그런지 재소집 꿈을 더 이상 꾸지 않게 된 것은 전역하고 20년쯤이 지나서였다.

때를 잘 타고난 아들 녀석은 24개월을 근무함으로써 병역을 ‘필(畢)’했지만 나는 꼼짝없이 33개월을 복무해야 했다. 1977년 5월에 입대하여 1980년 2월에 나는 군복을 벗었다. 대학생들이 누리던 교련 혜택도 받지 못했지만, 다행히 전역 명령을 잘 받아 일주일 모자라는 33개월로 병역을 마칠 수 있었다.

‘신의 아들’이 아니라 ‘사람의 아들’인 이상 건장한 젊은이들이 결코 면하지 못하는 게 ‘병역’이다. 선거철마다, 혹은 공직 후보자들의 청문회마다 ‘병역’과 관련된 아름답지 않은 의혹이 단골로 등장하는 세상이다. 그러나 그래서다. 병역을 교과서에 쓰인 대로 ‘신성한 국방의 의무’로 아무도 인식하지 않는 것은.

군이나 군대는 병역을 마친 대한민국의 평균 남자라면 일종의 애증의 대상이다. 그것은 부정할 수도,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애매하게 그릴 수도 없는 젊음의 한때다. 피 흘리는 정신적 내상(內傷)의 시기다. 국가의 이름으로 맹목의 복종과 충성이 강요되고, 가장 예민한 청춘기가 스러져 가는 시기다.

▲ 영화 육군 김일병(1969)의 포스터

입대 이전에 사람들은 군을 한시적 폐쇄 공간, 그러나 견딜 만한 해프닝이 이루어지는 장소쯤으로 여긴다. ‘신’의 가계를 갖지 않다면 피할 수 없는 의무라는 사실과 선배들이 들려주는 병영생활의 에피소드 등, 낙관적으로 그걸 그리고 싶어 하는 당사자들의 심리가 어우러져 만드는 이미지다.

내가 최초로 군대를 인식한 것은 영화 <육군 김 일병>(1969)을 통해서였다. 중학교 1학년 때였는데, 우리는 그 달의 ‘문화 교실’로 대구 반월당에 있었던 대한극장에서 그 영화를 단체 관람했다. 신영균이 주연했던 이 영화는 논산훈련소 훈련병들의 훈련 과정과 자대 배치 이후의 병영생활을 통해 사병들의 희로애락을 묘사한 작품이었다.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니 이 영화는 신상옥 감독이 만들었고 1969년 아시아 영화제 편집상을 받은 작품이다. 주인공 신영균 외에도 가수 김상국의 감칠맛 나는 코믹 연기가 떠오른다. 주인공의 애인 역으로 나온 남정임(아, 그는 오래전부터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과 최은희의 모습도 어렴풋하다.

<육군 김 일병>, 혹은 병영 홍보

영화는 혈기방장하고 겁 많고 선량한 젊은이들이 군대에 적응하는 과정을 아주 유쾌하게 그리고 있는데 까까머리 중학생 관객들도 유쾌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논산훈련소의 훈련 과정에서 주인공이 목에 걸고 있던 숟가락(우리가 흔히 스푼이라고 부르는 그 볼 넓은 미국식 숟가락)을 빼앗고 빼앗기는 장면에서 우리는 폭소를 터뜨리며 즐거워했다.

우리는 영화를 통해서 군대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억지스러운 공간이라는 사실을 배웠다. 그리고 동시에 그런 상황이 터무니없는 방식으로 해결될 수 있다는 모순을 익힘으로써 군대에 대한 두려움을 넘을 수 있었지 않나 싶다. <육군 김 일병>은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군대가, 병영생활이 할 만한 것이라는 걸 아주 자연스럽게 국민에게 알린 홍보영화였던 셈이다.

육군 김일병

신병 훈련 육 개월에 작대기 두 개
그래도 그게 어디냐고 신나는 김 일병
헤이 브라보 김일병 기상나팔에는 투덜대지만
헤이 브라보 김일병 식사 시간에는 용감한 병사

신나는 휴가 때면은 서울의 거리는 내차지
나는야 졸병이지만 그녀는 멋쟁이
백발백중 사수에다 인기도 좋아
헤이 브라보 핸섬 보이 육군 김 일병님 용감한 병사

신병 훈련 육 개월에 작대기 두 개
그대로 그게 어디냐고 신나는 김 일병
헤이 브라보 김 일병 동네 아가씨들 맘 설레놓고
헤이 브라보 김 일병 시침 떼고 가는 멋쟁이 병사

아가씨 울지 말아요 이다음 외출 때는 만나요
살며시 윙크해 주는 그 매력 넘버 원
백발백중 사수에다 인기도 좋아
헤이 브라보 핸섬 보이 육군 김 일병님 용감한 병사

봉봉 사중창단이 부른 주제가 ‘육군 김 일병’도 영화의 흥행과 더불어 꽤 오래 전파를 탔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노래도 영화만큼이나 유쾌하고 우스꽝스러운 리듬에다 자연스럽게 ‘김 일병’을 미화하는 형식을 통해 군과 병영에 대한 이미지를 바꾸는 데 이바지하는 것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김추자가 부른 대중가요를 기반으로 만든 <월남에서 돌아온 김 상사>도 비슷한 목적으로 군, 특히 베트남 파병을 다룬 영화였다.

그러나 영화로 군대를 간접 체험했던 까까머리 중학생들은 그로부터 7, 8년 후에 입영해서야 그것이 단지 잘 꾸며진 이미지였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논산이든 101보, 103보든 병영 문을 들어서면서 장정들은 ‘사회’에서의 자유분방을 버리고 군 특유의 논리에 강제 편입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군도 하나의 단위 사회지만 굳이 ‘군대’와 ‘사회’를 구분해서 말하는 병사들의 화법은 군과 사회 사이의 화해할 수 없는 간극을 웅변으로 증명하는 것이었다. 적어도 거기에서는 ‘견딜 수 없는 일’도, ‘불가능한 일’도 존재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었다. 다행인 점은 그 몰(沒)논리에 적응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전역’이 다가온다는 것이었다.

제대 병사들이 근무 지역을 향해서는 ‘오줌도 안 누겠다’고 결기를 세우는 것은 그 시기가 알게 모르게 병사들의 영혼과 육신에 드리웠던 그림자 탓이다. 그나마 세월이 지나면 그들이 그 시절을 애틋한 추억으로 간직할 수 있는 것은 거기서 동료들과 맺었던 인간관계 덕분이며, 과거의 고통을 무화해 주는 시간의 힘에 말미암은 것이다.

군대란 그런 곳이다. 피할 수 없어 응하지만, 복무기간 내내 기다리는 것은 전역뿐인. 그리고 그래서 징병되는 젊은이들에게 복무기간이란 그것이 단지 며칠에 불과하더라도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주제이다. 국가 안위와 관계되는 문제로 부득이한 제도라는 것과 이 제도가 국민 일반의 이해를 다투는 민감한 영역이라는 게 상충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다.

널뛰는 복무기간 논의, ‘청년세대 우롱’이다

글쎄, 과문해서 2014년까지 18개월로 단축하려던 군 복무기간 단축 계획이 백지화될 만한 정치·군사적 상황의 변화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국가안보총괄점검회의가 구체적으로 어떤 기구인지는 모르지만 온 국민, 특히 미래 청년세대의 이해와 직접적으로 이어지는 군 복무기간을 사회적 동의와 합의 없이 임의로 변경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정작 ‘신의 아들’로 지칭되는 권력층의 병역 면제 문제가 여전히 우리 사회의 뜨거운 감자인 상황에서 소수의 군 관계자들에 의해서만 ‘복무기간 단축 백지화’가 논의되고 있는 것에 국민이 분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대다수 청년이 ‘피할 수 없는 의무’로 병역을 받아들이는 상황에서 복무기간 문제를 고무줄 늘이듯 다루는 것은 무책임한 일일뿐더러 정작 그 의무를 이행해야 할 청년세대를 우롱하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 훈련 중인 병사들. 영화 해안선(2002)의 한 장면.

그나마 이 대통령이 ‘24개월 환원은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하면서 이 문제가 정리의 기미를 보이는 것은 다행이긴 하다. 복무기간 문제는 애당초 18개월에서 24개월로, 다시 21~22개월로 널뛰기를 하고 있다. 그러나, 은근히 ‘18개월 백지화’가 아닌 ‘24개월 백지화’에 방점을 둠으로써 ‘조삼모사’의 속임수인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은 개운치 않다.

굳이 야당의 비판을 빌리지 않더라도 애당초 약속인 ‘18개월’은 지켜지는 게 옳아 보인다. 병역은 ‘의무’이기 이전에 청년세대가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은 제도고 세월이다. 조국을 지키는 신성한 의무라고 소리 높이기보다는 그 기간을 줄임으로써 의무 복무의 부담을 더는 게 훨씬 설득력이 있으니 말이다.

지난 화요일에 아들을 입영시킨 동료가 불과 며칠 만에 배치상황을 문자 메시지로 보내왔다면 반색을 한다. ‘요즘 군대’ 사정에 어두운 남자들은 좀 미심쩍어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세월 좋아졌네그려. 좋다. 모두 자식을 군에 보내고 편지가 오거나 휴가 나올 때까지 행방을 모르고 지냈던 옛날의 어버이를 생각한 것이다.

‘다음’에서 구매한 옛 노래 <육군 김 일병>을 듣는다. 군대가 새로운 세대 병사들의 감성과 태도에 걸맞게 변화했다지만 여전히 노래에서 그려지는 유쾌하고 긍정적인 병사 상을 떠올리는 건 쉽지 않다. 강원 화천군의 한 군부대에서 선임병에게 구타당한 병사가 총기사고로 숨진 사고가 불과 열흘 안쪽의 일인 것이다.

병역의 이행이나 면제 처분이 일종의 특권이나 특혜로 이해되지 않고, 맹목의 충성과 복종이 강요되지 않는 민주적인 군대, 상식과 합리가 그 조직 논리의 기초가 되는 새로운 군대를 이야기하는 것은 여전히 꿈에 불과할까. 아무 불안 없이 자식을 군에 보내고, 젊은이들은 마치 캠핑을 다녀오듯 병역을 마치고 돌아오는 날을 그리면서 노래를 곰곰 다시 되씹어 본다.

 

2010. 9. 7. 낮달

 

 

군 복무 24개월 백지화? 청년세대 우롱이다

[주장] 널뛰는 복무기간 논의...'18개월' 약속을 지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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