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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길 위에서

집·부동산, 그리고 삶

by 낮달2018 2021. 9.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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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의 방 한 칸’…

얼마 전 어떤 후배 교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의례적 안부를 나누던 이 친구, 갑자기 뜬금없는 소리를 내지른다.

 

“선생님, 강남(이 도시에도 한가운데 강이 흐르는데 강 남쪽의 시가지를 서울처럼 ‘강남’이라 부른다.)에 있는, 선생님 소유 땅 말입니다.”

“땅? 땅이라니, 무슨 말이야?”

“아니 강남에 있는 두 필지 땅이 선생님 소유로 등기되어 있던데요?”

“?……, 이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나는 지상에 한 뼘의 땅도 가져 본 적이 없어. 굳이 말하면 15명이 공동소유한 아파트가 서 있는 땅이 있긴 하지만.”

 

짐작했겠지만, 강남에 나와 동명이인이 소유한 땅이 있었던 모양이다. 웃고 말았지만, 그가 그런 오해를 별 고민 없이 했다는 게 좀 씁쓸했다. 내 나이나 경력이라면 얼마간의 땅뙈기라도 가진 게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그 친구는 생각했던 것일까. 그렇다면 나는 좀 주변머리 없는 사람인 셈이다.

 

내 몫의 삶을 살게 된 이후 이십몇 년이 흘렀다. 그러나 너도나도 증권에 투자할 때도 나는 단 한 주의 주식도 가져본 적이 없다. 펀드 열풍이 일 때도 그게 뉘 집 애 이름이냐고 무심히 보아 넘긴 위인이니 내게 주변머리라면 약에 쓸래도 없다고 해야 마땅하다.

 

물론 오해는 없어야 한다. 그건 단지 내가 그럴 만한 여윳돈이 없어서였지 내게 재산을 늘리겠다는 욕망이 없었기 때문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조금이라도 더 넉넉하게 살고 싶다는 욕망으로 말하자면 내게 그것은 포화상태였을지도 모르겠다.

 

글쎄, 딱히 낭비가 심하거나 허랑하게 산 것도 아니다. 학교를 떠난 시기 동안 좀 어렵게 살았는데 그 후유증이 뜻밖에 오래갔다. 할 수 있는 일보다 할 수 없는 일이 훨씬 많았던 시기를 우리는 가쁘게 살았던 것 같다. 증권이나 펀드에 투자할 만한 여윳돈은커녕 그런 마음을 먹는 게 사치라고 여겨야 할 만큼 나는 옹색하게 살았었다.

 

그래서 청문회에 선 공직 후보자들의 전력에 줄줄이 파헤쳐지는 ‘부동산 투기’나 그것 비슷한 ‘잘난 사람들’의 ‘재테크’를 바라보며 느끼는 것은 경이일 수밖에 없다. 설사 내게 얼마만 한 땅을 사 쟁여 둘 능력이 있다고 한들 그들처럼 몇 배의 땅값 상승으로 ‘대박’을 터뜨릴 능력 따위야 언감생심, 바라볼 수 있겠는가.

 

부동산의 ‘마술’, 계급상승의 사다리?

 

부동산은 마치 한 인간의 삶을, 또는 한 가정의 지위를 마치 백지장처럼 가볍게 들어 엎을 수 있는 마력, 마술을 지닌 듯하다. 물론 그건 그걸 놀려서 재미를 본 사람들에게 한정된 이야기이긴 하다. 사람들은 부동산의 마술을 통해서 계급의 사닥다리를 올라 빵빵한 ‘중산층’으로 편입되는 것이다.

 

내 시골 초등학교 동기 가운데 일찍이 80년대 초반부터 부동산으로 성공한 친구가 있다. 80년대 중반, 내가 시골 여학교에서 풋내기 교사로 근무하고 있을 즈음에 그는 이미 기사 딸린 대형 승용차를 굴렸다. 가 보진 못했지만, 그때 그는 대구의 부유층이 모여 산다는 동네에 40평짜리 아파트 둘을 터서 산다고 소문이 났었다.

 

십수 년 전에 열린 첫 초등 동기회에 그는 아우디 승용차를 끌고 나타났다. 중산층의 넉넉한 삶은 살빛마저 바꾸는지, 그는 마치 20대처럼 뽀얗고 기품 있는 모습이었다. 우리는 재력을 높이 사서 그를 우리 동기회장으로 옹립했다. 동기회를 이끄는 것도 현금의 여유라는 걸 모두 삶 속에서 깨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중학교 졸업으로 학력을 마감한 친구였다. 나는 가방끈의 길이와 상관없이 자수성가한 벗의 성취를 기뻐했다. 나는 지금도 그가 어떤 방식으로 재산을 증식하였는지, 그가 종사했던 ‘부동산 사업’의 속내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가 경제적 성공의 기반이 결국은 ‘부동산’이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 안동시와 예천군 접경에 있는 경상북도 도청 이전 지역

땅값 상승에 발목 잡힌 ‘도청 이전’?

 

얼마 전에 삼십 년 가까이 공무원으로 일했던 친구를 만나서 들은 이야기는 좀 충격적이었다. 그의 이야기가 얼마나 사실에 가까운지는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과 무관하게 나는 우리 주변의 삶과 무관하다고 느꼈던 부동산, 개발 따위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일상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지방자치단체에 의해서 시행되는 각종 사업의 이면에는 관련 공무원들과 부동산 업자들의 탐욕이 똬리를 틀고 있으며 결국 거기서 생기는 개발이익은 이들이 독식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친구는 모모한 지역마다 어떤 방식으로 땅값이 올랐으며, 거기서 대박을 터뜨린 사람들 이야기를 담담하게 이야기해 주었다.

 

“도대체, 공무원들이 개발 정보를 이용한 투기를 하는 건 불법인데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간단해. 차명거래를 하는 거지. 이 잡듯 수사하지 않는 한 겉으로는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으니까 말이야.”

 

친구는 만연한 부동산 투기 때문에 경상북도청 이전도 좌초할 수도 있겠다고 말해 주었다. 대구에 있던 경상북도 도청이 안동시와 예천군 접경 지역으로 이전하기로 결정된 것은 이미 몇 해 전 일이다. 청사진은 그려졌으나 아직 갈 길은 멀어 보인다.

 

이미 이전 용지의 땅값은 천정부지로 올랐다. 애당초 평당 2, 3만 원 수준이면 충분했던 지역인데 이전 이 확정될 때 5만 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거의 30만 원까지 치솟았다는 것이다. 친구는 내정단계에서부터 인근 땅이 관련 공무원, 부동산 업자들의 끈끈이 같은 손에 싹쓸이된 것으로 추정했다.

 

대구 시내에 있는 현 청사를 매각하고 중앙정부로부터 얼마간 비용을 보전하면 되리라 여겼던 경상북도는 공황에 빠졌다. 토지 보상팀이 꾸려지고 이전을 위한 각종 준비를 시작하긴 했지만, 청사 이전은 원래의 그림으로부터 꽤 멀어져 버린 것이다. 친구 얘기의 신빙성과 무관하게 이 사업은 땅값 상승에 발목을 잡힌 것처럼 보인다.

 

“애초 중앙정부로부터 기대했던 사업비로는 엄두도 내지 못할 만큼 땅값이 오른 게야. 천정부지로 오른 땅값 때문에 정부로부터 애초 기대한 사업비의 네 배를 받아도 쉽지 않을 지경이 된 거지. 그런데 중앙정부가 그만한 사업비를 내려줄 리가 없으니 일은 점점 갑갑해지고 있는 셈이지…….”

 

집은 단지 ‘삶의 터전’일 뿐이다

 

도청 이전은 아직 걸음마도 시작하지 못하고 있는데도 기대심리는 지역의 집값만 올려놓았다. 정작 매매가 제대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면서 신축 아파트는 물론이거니와 기존 아파트도 1, 2억을 예사로 부를 정도이다. 이는 인근 대도시 대구의 일부 지역보다 오히려 더 높은 수준이다.

 

그러나 널을 뛰는 부동산 경기는 대다수 서민에겐 ‘강 건너 불’일 뿐이다. 서민들에게 집은 단지 거주를 위한 공간이고, ‘내 집’은 이사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터전일 뿐이지 재산증식의 수단은 아니기 때문이다. 집값의 등락의 따라 희비가 교차할 이유가 별로 없는 것이다.

 

나는 1997년에 지금 사는 아파트를 분양받았는데 그간 일여덟 번이나 이사를 다니다가 간신히 ‘내 집’을 마련했다는 기쁨도 잠시였다. 입주 무렵에 시공사가 부도가 나면서 등기도 못 한 채 이태나 살아야 했던 까닭이다. 다행히 2년 만에 문제가 해결되면서 나는 간신히 등기부상의 주택 소유자가 되었다.

 

내년쯤엔 이 집을 팔아야 할 것 같다. 내후년에 이 지역을 떠나 고향 인근으로 옮아갈 작정이기 때문이다. 집을 사고파는 일이 처음이니만큼 나는 내가 맡아야 할 역할이 은근히 고민스럽다. 글쎄, 전문 부동산 업자가 아닌 이상 그런 일에 이력이 난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아내 역시 그런 일에 밝지 않으니 이 일은 천생 내 몫이다. 그러나 집을 내놓고, 또 집을 보러 다니고 흥정을 하는 일 따위가 벌써부터 은근히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걸 어쩔 수 없다. 나는 결국 ‘부동산’과는 거리가 먼, 주변머리 없는 사람이라는 걸 새삼 확인할 도리밖에 없는 것이다.

 

 

2010. 9. 3.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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