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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폴로 11호 ‘달 착륙’과 공휴일

by 낮달2018 2021. 8.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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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7월 20일 아폴로 달착륙, 이튿날(월요일) 우리는 ‘학교에 가지 않았다’

▲ 인류 최초로 달에 발을 디딘 우주인 닐 올던 암스트롱 (Neil Alden Armstrong)

닐 올던 암스트롱(Neil Alden Armstrong, 1930~2012)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암스트롱’이라는 성 때문에 미국의 재즈음악가 루이 암스트롱(Louis Armstrong, 1901~1971)과 헛갈리기도 하는, 미국의 우주비행사로 ‘인류 최초로 달에 발을 디뎠다’는 사람이다.

 

암스트롱, 1969년 7월 20일 달에 착륙하다

 

닐 암스트롱은 1969년 7월 16일 우주왕복선 아폴로(Apollo) 11호의 선장으로 버즈 올드린, 마이클 콜린스 등 두 명의 비행사와 함께 케네디 우주기지를 출발했다. 닷새 후인 20일 그는 달 주위를 도는 궤도 위에서 모선에 남은 마이클 콜린스와 헤어져서, 올드린과 함께 달 착륙선으로 ‘고요한 바다’에 착륙하였다. ‘인류의 커다란 한 걸음’으로 널리 알려진, 달에 첫 발을 내디디면서 그가 했다는 말도 인상적이다. [관련 글 : 아폴로 11호 달 착륙 ‘50]

 

“That’s one small step for [a] man, one giant leap for mankind.”

(이것은 한 인간의 작은 걸음이지만, 인류에게는 커다란 도약이다.)

 

닐 암스트롱은 지난 8월 25일 심장 수술에 의한 합병증으로 풍운의 삶을 마감했다. 향년 82세. 이 ‘인류의 큰 걸음’을 걸었던 주인공에게 바쳐진 헌사도 만만찮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성명을 통해 고인에 대해 “그의 시대뿐 아니라 미국 역사를 통틀어 가장 훌륭한 영웅 가운데 한 명”이라고 기렸다. 오바마는 특히 최초의 달 착륙 사실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렸다.

 

“1969년 암스트롱과 그의 동료 우주비행사들이 ‘아폴로 11’호를 타고 출발했을 때 그들은 미국의 열정을 갖고 떠났다. 그들은 미국의 정신은 상상 이상의 것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전 세계에 과시했다.”

▲ 암스트롱이 달 표면에 남긴 발자국.

미국 대통령의 헌사여서가 아니라 그가 ‘미국의 열정’을 갖고 ‘상상 이상의 것을 볼 수 있다’는 ‘미국의 정신’을 전 세계에 과시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같은 사실을 바라보는 다른 시선도 무시하지 못한 만큼의 비율로 존재하는 것 역시 사실이다. 이른바 ‘아폴로 달 착륙 음모설’은 <위키백과>에서도 표제어로 다룰 정도이니 말이다.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했다는 소식이 전 세계에 타전되던 1969년에 나는 까까머리 중학교 1학년이었다. 인류 최초의 달 착륙 소식은 ‘계수나무와 옥토끼’의 세계를 갓 벗어난 중학생에게는 쉽게 소화하기 힘든 뉴스였다. 우리는 대부분 그 소식을 손에 잡히지 않는 과학적 신비의 일부로만 받아들였던 것 같다.

 

대한민국, 달 착륙일을 ‘임시 공휴일’로

 

정작 우리를 흥분케 한 것은 정부가 그날을 ‘임시 공휴일’로 정했다는 것이었다. 미국도, 달나라도, 우주선도 너무 멀리 있는 외계 같았지만, 학교를 하루 쉰다는 것은 가장 가깝고 솔깃한 소식이었다. 그게 발표되던 시간에 교실마다 함성이 진동했던 거로 나는 기억하는데, 그건 착오일 가능성이 높다. 우주선이 달에 착륙한 게 일요일인 20일이었으니 이튿날을 공휴일로 지정했으니, 우리는 아마 방송으로 공휴일 지정 소식을 들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학교 건물이 무너져서 하루를 쉴 수 있다면 날마다 그걸 빌 용의를 모두가 갖고 있던 시절이다. 왜 그날이 임시 공휴일이 되어야 하는지를 따지는 아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당연히 우리는 학교를 하루 쉰다는 데 광분해 있었던 것이다.

 

뒷날 확인한 것이지만 이 ‘뉴스’는 엄청난 폭발력을 발휘했던 모양이다. 전 세계에서 5억의 사람들이 36개 나라의 국어로 생방송된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라디오를 들었다. 우리나라에선 뒤에 ‘아폴로 박사’로 불리게 되는 천문학자 조경철이 ‘달 착륙’ 생중계를 맡았고 서울 남산 야외 음악당에 설치된 대형 TV 스크린으로 10만 명의 인파가 밤을 새워가며 달 착륙 광경을 지켜봤다고 한다.

 

달 착륙과 임시 공휴일의 상관관계를 갸웃거리게 된 것은 십 년쯤 지나서였다. ‘노는 날’이니 즐기고 쉴 뿐이지, 아무도 공휴일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라에서 정한 국경일이야 그러려니 하지만 어떤 기념일의 경우는 그 공휴일 지정의 의미가 모호한 경우도 적지 않다.

 

크리스마스로 부르는 성탄절은 정부 수립 후 1949년부터 공휴일이었던 모양이다. 그때부터 ‘글로벌’을 지향했던 탓인지 정작 석가탄신일은 제쳐두고서다. 예나 지금이나 신도 수로 따지든 어떻든 불교가 훨씬 오랜 전통의 종교였는데도 말이다. 사월 초파일이 공휴일이 된 것은 1975년이었다.

 

우리가 어릴 적에 공휴일로 쉬었던 ‘유엔(UN) 데이’도 마찬가지다. 한국전쟁에서 UN의 도움을 받긴 했지만 정작 우리나라는 유엔 회원국도 아니었다. 한국전쟁 후부터 공휴일로 쉬었던 유엔 데이가 공휴일에서 제외된 것은 1976년이 되어서다. 남북한이 동시에 유엔에 가입해 정식 회원국이 된 것은 1991년이다.

 

이런저런 사연과 곡절을 이야기하면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우리나라가 거쳐 온 고단한 근현대사를 돌이켜보면 더더욱 그렇다. 오랜 외세의 지배를 받다 독립한 신생국가가 국격에 걸맞은 제도를 갖추는 데 일정한 시간이 필요하고 그 과정에서 시행착오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우리가 겪은 근현대사의 특수성이 아니면 쉬 이해되지 못하는 부분도 적지 않다. 유엔 데이도 그렇고 달 착륙에 따른 임시 공휴일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해방에서 전쟁에 이르는 현대사의 굴곡마다 주역을 담당한 거인, 미국의 자취가 드리운 그림자다.

▲ 지금도 미국에서는 아폴로의 달착륙이 조작되었다고 믿는 사람이 다수 있다.

미국이 유엔 파병군의 주력이었고 아폴로 11호의 쾌거가 미국의 작품이었기 때문에 유엔 데이도, 임시 공휴일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 것이다. 달에 착륙한 우주선이 아폴로가 아니라 소유스였다면 비슷한 형식의 축하와 기념이 이루어질 수나 있었을까.

 

한글날은 다시 공휴일이 될 수 있을까

 

공휴일과 관련된 최악의 그림은 노태우 정부 때 시행한 ‘한글날(10월 9일)’의 공휴일 해제다. 한글날은 훈민정음 반포 500주년이던 1946년 공휴일로 지정되었지만 1990년 재계의 요구를 받아들여 공휴일에서 제외하였다. 재계의 요구란 맙소사, ‘노는 날이 많아 경제 발전에 지장이 있다’였다.

 

한글문화연대 등 한글문화 운동 단체 등의 꾸준한 문제 제기로 한글날은 2005년 국경일이 되었지만, 여전히 공휴일에는 포함되지 않고 있다. 지난 5월 문화부가 벌인 여론조사에 따르면 국민의 83.6%가 한글날의 공휴일 지정에 찬성하고 있다고 한다.

 

한글날의 공휴일 지정은 단순히 국민 여론조사로 다툴 사안이 아니다. 그것은 이 세계 최고의 문자를 우리 자신의 정체성으로 분명하게 받아들이느냐 마느냐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한글로 표상되는 우리 문자의 우수성을 자신의 긍지와 자랑으로 받아들이느냐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관련 글 : 한글날, 공휴일로 복원!]

 

‘아폴로 음모설’, 미국 사회의 관용성

 

아폴로 11호의 우주인 닐 암스트롱이 달에 내디딘 발은 좌우 어느 쪽이었느냐 게 한동안 꽤 흥미로운 수수께끼 노릇을 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정작 사람들은 아폴로의 달 착륙 자체를 믿지 않는 ‘비애국’ 인사들이 미국에 적지 않다는 사실은 잘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아폴로 달 착륙 음모설’은 그 사실 여부와 무관하게 미국이, 그리고 미국 사회가 가진 다른 의견과 생각에 대한 관용성을 상징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단지 달 착륙 문제만이 아니다. 숱한 희생자를 낳은 ‘9·11테러’를 전혀 정반대의 시각에서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가 공공연히 만들어지고 이를 신봉하는 이들이 어떤 사회적 불이익도 받지 않는 사회가 미국이니 말이다.

 

그 반대편에 야당 추천의 헌법재판관 후보가 천안함 침몰과 관련해 ‘정부 발표를 믿되 확신하지는 못하겠다’는 청문회 답변을 문제 삼는 사회가 있다. 결국 이 후보는 ‘의심스러운 국가관’ 때문에 여당의 인준 거부를 당해 결국 재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인류가 달에 첫발을 내디딘 지 벌써 한 세대에 이르는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이 나라의 시계는 여전히 30년 전보다 더 오래된 시간을 줄타기하고 있는 듯하다. ‘여론의 다양성’을 깡그리 무시한 보수언론과 보수정당의 시대착오적 색깔 공세 앞에 우리 사회의 관용성은 초라 하다못해 옹색하기만 하다.

 

 

2012. 8. 28.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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