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밈없는 한 인간의 도전과 자기 삶의 선택에 대한 말 없는 자부
이봉주의 베이징 올림픽 마라톤 경기를 나는 보지 못했다. 나는 이봉주가 생애 마지막 올림픽 경기에서의 입상 가능성 따위를 전혀 궁금해하지 않았다.
나는 우리나라의 대표하는 마라토너라는 사실 외에 이봉주에 대해서 아는 게 없는 사람이다. 직접은커녕 먼빛으로도 그를 만난 적이 없다. 그러나 나는 그가 완주하리라는 걸 믿고 있었고 어떤 성적을 내든 그를 기리는 글을 한 편 쓰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2008년 8월 24일, 베이징 올림픽의 폐막일 벌어진 마라톤 경기에서 이봉주는 42.195km를 2시간 17분 56초로 완주하며 28위에 올랐다. 마라톤에 출전한 98명 중 28위. 이로써 이 노장 마라토너는 1996년 첫 출전한 애틀랜타 올림픽 은메달 이래 4연속 올림픽 무대에 도전한 유일한 선수가 되었다.
1970년 10월 10일(음)에 충남 천안에서 태어난 이봉주는 우리 나이로 서른아홉이다. 우승한 케냐의 완지르는 22살, 무려 16년 차이니 두 사람의 기록이 10분쯤 벌어진 걸 나무랄 수는 없는 일이다. 경기에 출전한 98명 중 22명이 경기를 포기했지만, 우리의 ‘봉달이’는 자기 마라톤 인생의 서른아홉 번째 전구간(풀코스)을 완주했다.
마라토너 이봉주가 국제무대에 자신의 이름을 알린 건 지난 1993년 호놀룰루 국제마라톤에서 우승하면서부터다. 그 이후 이봉주는 후쿠오카 국제마라톤(1996), 방콕 아시안게임(1998), 보스턴 마라톤(2001), 부산 아시안게임(2002), 서울 국제마라톤(2007)에서 우승, 무려 15년 동안 정상에 서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정상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는 도전의 길로 나섰던 ‘길 위의 마라토너’였다. 그런 점에서 그에게 ‘국민 마라토너’라는 칭호는 전혀 지나치지 않은 것이었다.
오래달리기의 고통을 아는 사람들은 마라토너를 예사로이 보지 않는다. 마라톤도 하고많은 육상 경기 중의 한 종목이다. 그것은 인간의 한계에 대한 도전과 극복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여느 경기와는 다르다. 백 리가 넘는 거리를 돌아와야 하는 이 경기는 가장 힘든 상대가 함께 뛰는 경쟁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는 점에서 일종의 구도적 성격을 띤다.
42.195km의 거리를 두 시간 반 이내에 주파하는 데 필요한 것은 단순히 육체적 근력과 지구력, 그리고 그것들의 조화만이 아니다. 비록 타고난 체력이 있다 하더라도 완주하겠다는 자신의 의지가 고통의 극한에서 손을 내미는 달콤한 휴식, 포기의 유혹을 거뜬히 넘어서지 않으면 안 된다.
육신의 피로가 속삭이는 휴식과 포기의 유혹은 악마의 그것을 닮았다. 그것은 모든 고통과 절망을 일시에 뒤집고 가없는 평화와 안락을 베풀 것처럼 느껴진다.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순리의 과정에서 비켜서 있는 이는 자신밖에 없다는 소외감이 구름처럼 피어오르고 남은 길은 더욱 아득해 보이는 흔들림의 순간이기도 하다.
그런 악마의 유혹을 이봉주는 서른아홉 번이나 제쳤다. 그가 먹은 우리 나이와 같은 횟수다. 그는 모두 마흔두 번의 풀코스를 뛰었고, 그중 세 번은 완주하지 못했다. 흔히들 DNF(do not finished)로 기록되는 경우다. 완주하지 못한 세 번이 어떤 경우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것도 이봉주의 도전에 누가 되지 않는다.
일찌감치 올림픽 준우승과 세 차례에 걸친 국제마라톤 제패, 아시안게임 2회 우승 등의 기록을 가졌으니 그는 얼마든지 영예롭게 은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해마다 달리고 노쇠해지는 근력을 고려하면 매우 합리적 선택일 수 있었다.
‘몬주익의 영웅’으로 불리는 황영조는 최전성기였던 1995 조선일보 국제마라톤을 끝으로 현역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이봉주와 동갑인 그의 나이 스물다섯 살이었을 때다. 그의 고향 삼척에는 ‘황영조 기념관’에 세워지고, 그는 대한체육회 이사, 대한육상경기연맹 마라톤 기술 이사, 중소기업중앙회 등 각종 기관의 홍보대사 등 활발한 사회활동을 벌이고 있다.
친구인 황영조에 비해 “사회에서 어울리며 함께 살아가는 측면에서 생각하면 자신이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이봉주가 걸어온 길은 우직한 외길이었다. 기록과 무관하게 그의 쉼 없는 도전은 계속되었다. 2007년 3월 서울 국제마라톤 우승(2:08:04) 이후 그의 완주 기록은 뚜렷하게 내림세다. 2시간 10분을 넘어 20분대에 이르는 퇴조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번 올림픽에도 도전장을 내밀었다.
이봉주는 자신을 대신할 유망주가 없는 현재 상황에서 마지막으로 올림픽을 책임져야 했던 듯하다. 그것은 마라토너로서 자신의 이해를 넘어 그가 마라톤을 자기 삶으로 갈무리하는 방식이었는지도 모른다.
“좀 더 잘하고 싶었다. (…) 역시 나이가 들어 힘들다. (…) 체력적으로 아무래도 부족했던 것 같다.”고 그는 아쉬움을 표했다고 한다. “많이 기대하고 응원했을 가족들에게 너무 미안하다”라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나는 ‘국민’이 아니라 ‘가족’들에게 미안함을 표시한 그가 마음에 든다.
이봉주는 경기 후 은퇴계획에 대해 질문에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할 것 같다.”"며 여운을 남겼다. 그는 여전히 기록과 그것을 위한 도전을 자기 삶의 정체성으로 이해하고 있는지 모른다. 나는 그가 어떤 선택을 하든 그를 지지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가족들에게로, 혹은 후배 마라토너를 위한 지도자로 돌아가는 일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도 다르지 않다. 그것은 한 인간이 지닌 불굴의 투지와 도전에 바치는 찬사다. 다음 아고라에 오른 이봉주에 대한 응원 글은 그의 도전이 겨레 모두의 것이 되었음을 말해준다.
“당신의 모습 자체로 충분히 아름답습니다.”(나무)
“그동안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당신이 자랑스럽습니다. 당신은 진정한 챔피언입니다.”(CarRacer)
“언제 다시 이봉주 선수처럼 오랜 시간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멋진 선수가 나올까?”(새고무신사신고)
“오늘 제게 가장 큰 감동을 주신 이봉주 선수. 존경스럽습니다. 끝까지 잘 해내신 당신이 너무 자랑스럽고 멋있습니다.”(citrus)
이봉주의 독특한 눈매와 턱수염은 이제 그의 상징이 되었다. 누구는 그 독특함을 이야기하지만, 그의 모습에서 나는 꾸밈없는 한 인간의 도전과 자기 삶의 선택에 대한 말 없는 자부를, 가장 높은 데서도 가장 낮은 데서도 변함없는 인간의 겸허를 본다.
'마라토너가 아니었다면, 아마 목장을 하고 있었을 거'라는 이봉주. ‘마라톤이 아니었다면 현재의 자신도 없었을 거’라며 ‘이제 마라톤에 갚아야 할 차례’라고 생각하는 이 마라토너를 위대하다고 기리는 것은 기록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아무도 쉬 이를 수 없는, 마라톤에 자신을 온전히 바친 그의 치열한 도전의 여정 때문이다. 여전히 가장 낮은 데서 달리고 있는 그의 겸손하고 성실한 삶 때문이다.
사진에서 예쁜 아들을 목말 태우고 그는 활짝 웃고 있다. 예의 독특한 눈은 반쯤 감겼다. 가늘게 뜬 그의 눈이 바라보는 곳은 어디쯤일까. 모르긴 몰라도 그것은 오랜 세월 그가 견뎌온 극기의 삶과 무관한 안일과 평화만은 아니리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2008. 8. 25.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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