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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가겨 찻집

‘주어의 생략’을 ‘주어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by 낮달2018 2021. 7.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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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겨 찻집] 문장성분의 부당한 생략 ① 주어

▲ 제17대 대선 중에 당시 한나라당의 나경원 대변인은 이명박 후보의 BBK 관련하여 '주어는 없다'라는 유명한 논평으로 입길에 올랐다.

“그러나, 주어는 없었습니다.”

 

2007년 12월, 제17대 대통령 선거 중에 당시 한나라당의 나경원 대변인이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뇌었다는 그 ‘불후’의 논평이다. 이 논평은 정치적 위기를 넘기기 위해 국어 문법을 불러낸 흔치 않은 사례로 사람들의 입길에 널리 오르내렸다.

 

그해 대선에서 BBK 주가조작 사건이 문제가 되었는데, 이명박 후보는 그 회사가 자신과 무관하다고 줄곧 주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선 직전에 결정적인 증거, 그가 “BBK라는 금융 자문회사를 설립”했다고 발언한 동영상이 공개되었고, 문제의 논평은 이때 나온 것이었다.

 

“전 요즘 다시 한국에 돌아와서 인터넷 금융 회사를 창립을 했습니다. 금년 1월달에 BBK라는 금융 자문회사를 설립을 하고……” -이명박, 2000년 10월 17일 광운대 강연에서

 

문제의 동영상에서 이명박 후보가 한 발언이다. 앞 문장은 주어 ‘저’를 썼고, 뒤 문장에서는 생략했다. 연사가 강연 중 주어를 쉽게 생략할 수 있음은 청중들이 맥락을 통해 주어를 이해하기 때문이다. 뒤 문장은 앞 문장을 구체화한 문장이므로 사람들은 주어가 없어도 BBK 설립 주체가 누구인지 단박에 알 수 있는 것이다.

 

주어 없이 문장이 성립하기 어려운 영어와 달리 우리말에는 주어를 생략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담화(대화) 상황에서는 화자는 물론, 청자도 주어 없이 대화할 수 있다. 길거리에서 친구를 만났을 때나 연인이 서로의 내밀한 감정을 고백하는 대화에서 뻔히 알 수 있는 문장성분은 얼마든지 생략될 수 있다.

 

“어디 가?”(주어 ‘너’ 생략)

“응, 도서관에.”(주어 ‘나’와 서술어 ‘간다’ 생략)

 

“사랑해.”(주어 ‘나’, 목적어 ‘너’ 생략)

“나도.”(목적어 ‘너’, 서술어 ‘사랑해’ 생략)

 

그러나 담화 상황이 아닌 일반 문장에서 주어는 함부로 생략할 수 없다. 문장의 주어는 서술어, 목적어, 보어와 함께 ‘필수성분’이라 부르는데, 이는 문장에서 반드시 갖추어야 하는 성분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필수성분도 앞뒤 맥락에서 드러날 때엔 생략할 수도 있다. 그러나 생략할 수 없는 문장성분을 생략하면 ‘부당한 생략’이라 하여 해당 문장은 비문(非文)이 된다.

주어의 부당한 생략

‘주어의 부당한 생략’은 주로, 홑문장(주어와 서술어가 각각 하나씩인 문장)이 아닌 겹문장(두 개 이상의 주술 관계가 있는 문장)에서 이루어진다. 한 문장 안에 여러 개의 정보가 담기면서 필자가 이를 빠뜨리는 경우다.

 

주어와 서술어는 문장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요소다. 어느 하나라도 빠지면 호응(呼應, 앞에 어떤 말이 오면 거기에 응하는 말이 따라옴. 또는 그런 일.)을 이루지 못하여 비문이 된다. 다음 문장을 보자.

 

(1) 본격적인 공사가 언제 시작되고, 언제 개통될지 모른다.

(2) 문학은 다양한 삶의 체험을 보여 주는 예술의 장르로써 문학을 즐길 예술적 본능을 지닌다.

 

문장 (1)은 세 개의 정보(문장)로 구성되었다. ① ‘공사 시작’과 ② ‘(도로) 개통’, 그리고 ③ 주체가 앞의 사실을 모른다는 것 등이다. 이 문장을 분석하면 문장 ①과 문장 ②가 이어져서(이어진문장) ③ 문장의 목적어가 된다. 즉 이어진문장이 안은문장의 목적절로 안긴 것이다.

 

(1)-1 본격적인 공사가 언제 시작된다.

(1)-2 (○○)이 언제 개통된다.

(1)-3 (○○)는 (위 사실)을 모른다.

 

주어와 술어의 호응 관계를 살펴보자. (1)-1의 ‘공사’와 ‘시작되’다는 주술 관계다. (1)-2의 ‘개통되다’는 서술어인데 주어는 앞의 ‘공사’가 아니다. 개통되는 것은 ‘도로’거나 ‘다리’가 될 것이니 주어(도로, 다리)가 생략됐다.

 

그런데 이 주어는 생략할 수 없다. 앞의 주어를 공유하는 문장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어법에 어긋난 문장을 만드는 생략을 ‘부당한 생략’이라 이른다. (1)-3의 서술어 ‘모른다’도 주어가 생략되었다. 생략된 주어는 ‘나’, 혹은 ‘사람들은’ 정도로 추정해 볼 수 있는데 이 주어는 생략되어도 상관없다.

 

문장 (2)도 ‘문학은 ~장르다’와 ‘( )이 ~본능을 지닌다’라는 두 개의 정보로 구성됐다. 분석하면 다음 두 문장이 연결된 이어진문장이다.

 

(2)-1 문학은 다양한 삶의 체험을 보여 주는 예술의 장르다.

(2)-2 (○○)은 문학을 즐길 예술적 본능을 지닌다.

 

(2)-1의 주어는 ‘문학’, 서술어는 ‘장르’다. (2)-2에서는 ‘지닌다’가 서술어지만, 그 주체가 무엇인지 드러나 있지 않다. 앞의 주어 ‘문학’을 공유할 수 없으므로(문학이 주어가 될 수 없으므로) 생략할 수 없는 주어가 생략되었다. ‘인간’으로 추정되는 ‘주어’가 생략된 것인데, 이 역시 ‘부당한 생략’에 해당한다.

다음 문장들도 모두 ‘주어’를 ‘부당하게 생략’한 예다. 주어와 서술어를 찾아 두 성분이 서로 호응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부당한 생략 여부를 알 수 있다. 주어와 술어를 각각 짝을 지워보면 두 성분의 호응 관계가 한눈에 들어온다.

 

(3) 우리가 한글과 세계의 여러 문자를 비교해 볼 때, 매우 조직적이며 과학적이고 독창적인 문자라고 하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4) 영수는 은희에게 가방을 주었는데, 그 보답으로 영수에게 책을 선물하였다.

(5) 지난번 폭우로 피해를 본 수재민들에게 겨울철 이전에 주택 복구를 위해 100억 원의 자금을 지원키로 했습니다.

(6) 그러나 다행한 것은, 그의 불타는 창작 의욕이 그를 죽음에서 구해 내었으며, 인류를 위해 훌륭히 예술을 창작할 것을 결심했다는 것이다.

 

위 예문은 모두 두 개 이상의 문장이 이어진 겹문장이다. 앞 절(문장)과 뒤 절의 주어가 같지 않다면, 주어는 절대 생략되어서는 안 된다. 정답은 '더보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바로잡은 부분은 빨간 글씨로 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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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우리가 한글과 세계의 여러 문자를 비교해 볼 때, 한글이 매우 조직적이며 과학적이고 독창적인 문자라고 하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4) 영수는 은희에게 가방을 주었는데, 은희는 그 보답으로 영수에게 책을 선물하였다.

 

(5) 지난번 폭우로 피해를 본 수재민들에게 정부(지자체)는 겨울철 이전에 주택 복구를 위해 100억 원의 자금을 지원키로 했습니다.

 

(6) 그러나 다행한 것은, 그의 불타는 창작 의욕이 그를 죽음에서 구해 내었으며, 그가 인류를 위해 훌륭히 예술을 창작할 것을 결심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남을 글을 읽으면서 굳이 비문을 찾지는 않는다. 그러나 내가 글을 쓸 때는 달라야 한다. 글을 쓰면서 바르게 쓰고 있는지를 점검하려는 태도가 올바른 문자 생활의 전제다. 퇴고할 때, 문장이 어색하다고 느껴지면, 주어와 서술어의 호응 관계를 들여다보라. 흠을 따로 찾지 못한다 해도 그런 태도가 바른 글을 쓰는 바탕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2021. 7. 30. 낮달

 

[가겨 찻집] 문장성분의 부당한 생략 ② 목적어·부사어·서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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