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가겨 찻집

프로야구 ‘올스타전’ 유감

by 낮달2018 2021. 7. 20.
728x90

올스타전의 ‘로마자’ 쓰기

▲ 2013 프로야구 올스타전 소개 ⓒ 한국야구위원회 (KBO) 누리집

‘동군 : 서군’에서 ‘이스턴 : 웨스턴’으로

 

2013년 프로야구가 전반기를 마치고 이른바 ‘별들의 전쟁’이라는 올스타전을 치렀다. 연중 한 번뿐인 이 경기를 굳이 챙겨보지 않은 게 언제부턴지 모르겠다. 순전히 그래서였을 것이다. 외화 시리즈를 보다가 막간에 스포츠 채널로 돌렸더니 채널마다 중계가 한창이었다.

 

그런데 올스타팀의 이름이 이상했다. 동군, 서군이었던 팀 이름이 이스턴, 웨스턴으로 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확인해 보니 1982년 프로야구 출범 때부터 동군·서군으로 나누었던 올스타팀은 2009년부터 이스턴·웨스턴 올스타로 바뀌었다고 했다.

 

이름이 영어로 바뀌었지만, 팀의 구성은 동서로 나뉘던 시절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롯데(부산), 삼성(대구), SK(인천), 두산(잠실)의 동군이 이스턴으로 기아(광주), 한화(대전), LG(잠실), 넥센(목동)의 서군이 웨스턴이 된 것이다.

 

두 편으로 갈라서 대항전을 벌일 때 쓰는 편 이름의 역사와 전통은 유구하다. 요즘은 어떤지 잘 모르겠는데 초등학교 시절의 운동회는 어디서나 청백전이었다. 70년대 인기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도 ‘청백전’을 썼다. 실제로 ‘청(靑)’의 맞수는 ‘홍(紅)’이 어울리지만, 굳이 ‘흑(黑)’에 맞서는 ‘백(白)’을 쓴 건 이데올로기로 멍든 이 땅의 역사 탓일까.

▲ 채널마다 팀명 표기 방식도 다르다. 아예 영자로 표기한 예도 있다. ⓒ 중계 영상 갈무리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 보았더니 채널마다 팀 이름을 표기하는 방식도 갖가지였다. 한글로 ‘이스턴 : 웨스턴’으로 쓴 데는 양반이다. 각 첫머리 글자를 따서 ‘E : W’로 쓴 건 애교다. 어떤 채널에선 아예 영자로 ‘EASTERN : WESTERN’으로 써 붙였다.

 

워낙 ‘글로벌’을 강조하는 사회 분위기 탓인지 이런 추세에 이의를 제기하기도 쉽지 않다. 자칫하면 시대의 추세를 이해하지 못하는 국수주의자로 눈총을 받지 않을까 싶은 느낌조차 있을 만큼. 그러나 동군, 서군이 촌스럽고, 세련되지 못했을지는 모르지만 이스턴, 웨스턴이 우리 삶과 동떨어진 낯선 이름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 잘 쓰던 '동군, 서군' 대신 이스턴, 웨스턴으로 쓰면 경기가 더 돋보일까.

비슷한 눈길로 올스타전을 바라본 사람은 혼자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몇몇 사람이 트위터를 통해 그런 속내를 드러내고 있었다. ‘어린쥐’ 운운할 때부터의 조짐으로, ‘맹목적 숭미주의’로 바라본 이부터 ‘단일리그인데 웬 이스턴, 웨스턴 리그냐’는 면박까지.

 

글쎄, ‘숭미주의’라는 이름까지 붙일 일은 아닐지 모르지만 그런 어휘의 선택에 ‘영어’나 ‘미국식’ 체제를 ‘표준’으로 바라보는 기울어진 의식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을 터이다. 한편, 이스턴·웨스턴은 리그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 올스타를 수식하는 말로 보인다.

 

‘생중계, 생음악’은 ‘LIVE’가 되고

 

채널 이름 아래, ‘실시간 중계’를 뜻하는 ‘LIVE(라이브)’가 쓰이게 된 것은 언제부터일까. 예전에는 거기 한자로 ‘生中繼(생중계)’를 썼던 것으로 기억한다. 열처리하지 않은 훨씬 싱싱한 맥주를 ‘생맥주’라 하듯이 그것은 ‘생중계’였다. 70년대에는 카페나 주점 등에서 밴드나 가수가 직접 음악을 들려주는 것을 ‘생음악’이라고 했다. 요즘 그건 아주 세련된 이름 ‘라이브 공연’이라 바뀌었고.

▲실시간 중계는 '생중계'를 거쳐 이제는 '라이브 (LIVE)'로 정착했다 . ⓒ 중계방송 갈무리

영어는 국제어 정도가 아니라 이제 나라 안에서 마치 ‘준(準)’ 국어처럼 쓰인다는 느낌이 있다. 일간지에서 서울시와 마을공동체 종합지원센터에서 ‘코디네이터, 마을 아카이브’ 등 어렵고 복잡한 말을 쓴다 해서 주민들의 항의를 받았다는 투고 기사를 읽었다. 어떤 지역에서 ‘마을 아카데미 발전 과정’이 열렸는데 거기서 사회자가 ‘커뮤니티, 피피티’ 등의 영어를 쓰자 나온 반응이라는 거다.

 

“(……) 그냥 마을이라고 하면 될 것 같은데 꼭 커뮤니티라고 해야 하나?

(……) 아카데미도 그래. 무슨 아카데미? 교육이라고 하면 될 걸 가지고.”

 

굳이 어르신이 아니라도 그게 내 삶과 자연스럽게 감기는 말이라고 여길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서울시가 야심만만하게 시행하고 있다는 ‘마을 문화 나눔’과 관련한 정보 이용 공유 과정을 ‘커뮤니티 맵핑(mapping)’이라고 한다는데 그 역시 우리네 삶과는 멀고 낯선 말이다.

 

그러나 그 멀고 낯선 말에 친숙해지는 대신, 우리는 이웃의 정으로 유지해 온 우리 고유의 공동체 의식을 시나브로 잃어가고 있는지 모른다. 분명한 것은 마을 대신 커뮤니티로, 역사 대신 히스토리로, 기록 보관 대신 아카이브로 사물과 현상을 이해하고 인식하게 되면서 우리는 자신의 정체성을 조금씩 잃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2013. 7. 19. 낮달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