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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길 위에서

‘세뇌(洗腦)’와 ‘의식화’, 그리고 교육

by 낮달2018 2021. 7.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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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세뇌’의 정치학

▲ 1인 시위하는 학부모에게 유인촌 장관은 '세뇌'를 부르댔다고 한다. ⓒ 엠비엔 화면 갈무리

아닌 때에 ‘세뇌’라는 낱말이 대중의 관심사로 떠오른 건 얼마 전 일이다. 이명박 정부의 이른바 ‘완장’으로 성가를 높이고 있는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에 의해서다. 그는 문광부 정문 앞에서 항의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는 한국예술종합학교 학부모에게 “학부모를 왜 이렇게 세뇌시켰지?”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 말에 예의 학부모는 어이없어 “내가 나이가 몇 살인데 세뇌입니까?”라고 황당해하자, 유 장관은 재차 “세뇌가 되신 것”이라고 거듭 확인했다고 한다. 지엄한 장관께선 선량해야 할 학부모가 관공서 앞에서 무엄하게도 시위를 벌이게 된 것은 ‘특정한 생각이 뇌리에 주입’되었기 때문이라 판단한 모양이다.

그러나 그는 되로 주고 말로 받았다. 문화관광체육부가 4대 강 살리기 사업 홍보를 위해 극장에서 ‘대한 늬우스’를 상영하기로 하자 여성·환경·문화 단체는 다음과 같이 그를 비꼬았기 때문이다.

“유인촌 장관은 ‘대한 늬우스’를 봐서 국민이 ‘세뇌’ 가능하다고 생각했나 보다.”

‘세뇌(洗腦)’의 말뜻을 들여다보면 좀 끔찍하다. ‘뇌를 씻다’는 말속에는 인간의 사고와 가치관마저도 일정하게 통제할 수 있다는, 인간의 영혼조차 조작할 수 있다는 생각이 은연중에 담겨 있다. ≪표준국어대사전≫은 세뇌를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

세뇌(洗腦) [세ː뇌/세ː눼]
「명사」
사람이 본디 가지고 있던 의식을 다른 방향으로 바꾸게 하거나, 특정한 사상ㆍ주의를 따르도록 뇌리에 주입하는 일.
¶ 세뇌 교육/세뇌 공작/그는 적에게 세뇌를 당해 아군을 비난하였다./근지 있는 집 아이라는 엄마의 세뇌가 먹혀들어 갔는지 나도 동네 아이들이나 안집 아이들이 뜨악했고….≪박완서,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용례에서 보듯 ‘세뇌’의 의미는 매우 부정적이다. 무언가 음험한 공작의 냄새, 흉악한 비인간적 살기가 느껴지지 않는가. 백과사전에서는 ‘세뇌’(brainwashing)의 의미를 훨씬 상세하게 다룬다. ≪네이버 백과≫에서는 “개인의 사상이나 가치관 등을 다른 방향으로 바꾸게 하거나, 새로운 사상·주의·교리 등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하는 체계적인 노력”으로 그것을 정의한다.

흐름으로 미루어 보건대, 이는 정치적 의미와 깊숙이 이어져 있는 듯하다. 아니나 다를까, 세뇌는 ‘사상개조나 재교육’이라고도 하고, “일반적으로 정치적·종교적인 목적을 위해 신체적·사회적 조건들을 통제함으로써 개인이나 집단의 믿음이나 행동을 바꾸는 강제적인 수단을 통칭”한다.

세뇌는 1950년대 중국공산당이 지배체제를 굳히는 과정에서 활용함으로써 널리 알려졌다. 심리적 대중 강제 방법으로 세뇌를 위해 수면박탈, 엄격한 정보통제, 개인의 자율성을 파괴하는 심리학적인 조작 방법 등이 두루 동원되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오늘날에는 ‘세뇌’는 훨씬 포괄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이해된다. ≪네이버 백과≫의 설명이다.

“세뇌는 일반적인 선전이나 교화를 목적으로 하는 다양한 영역에서 좀 더 폭넓은 의미로 사용된다. 신흥종교에서 신도를 모으거나 충성심을 높이는 데 사용하는 일부 방법은 물론, 설득력을 높이거나 태도·기호 변화를 유도하는 각종 조작, 선전, 강권, 중립적인 정보에 대한 접근 제한 등도 세뇌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이런 방법들은 광고주나 정부, 학교, 부모들이 상업적·정치적·교육적 목적으로 종종 활용하는 것으로, 실생활과 동떨어진 주제가 아니다.

세뇌는 강요되기는 하지만 결백한 사람이 확신을 가지고 자신의 범죄를 고백하고, 진심으로 설복되어 사상을 전향한다는 점에서 강요에 못 이겨 거짓 고백을 하거나 허위사상전향을 하는 행동과는 구별된다.”

‘세뇌’는 그 의미의 폭이 꽤 넓다. 마지막 단락의 의미는 꽤나 헷갈린다. ‘세뇌’와 ‘태도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선전’ 등의 경계는 모호할 수 있다는 말이다. 물론 거기에 대상의 자율적 의지가 얼마만큼 작용할 수 있는가, 세뇌를 목표로 하는 방법들이 얼마나 합리적이고 정당하고 올바른 것인가도 중요한 잣대가 될 수 있겠다.

자, 이쯤에서 문광부 장관이 언급한 ‘세뇌’의 의미를 짚어보자. 일단 그의 머릿속 사전에 들어 있는 ‘세뇌’는 아주 낡은 단어다. 그는 자신과 정부의 정책에 동의하지 않는 반대자를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능력이 없는 금치산자쯤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그가 가진 생각은 ‘누군가’에 의해 강제되거나 조작된 견해로 파악할 수밖에 없다.

당연히 그것은 정부의 정책 결정에 대한 ‘악의적 반대’이거나 ‘맹목적 저항’으로 파악된다. ‘선진화’와 ‘발전’을 위한 정부의 측량할 수 없는 ‘선의’를 ‘악의’로 ‘왜곡’하고 반대로 일관하는 이 ‘공공의 적’의 ‘색깔’은 심히 의심스럽다.

정치적 반대자에게 색깔의 올가미를 씌워 공적으로 모는 이 오래된 마녀사냥의 기억은 2009년 한국에서 여전히 퇴화하지 않았다. 색깔론으로 직접 가해하는 대신, 노회한 정객들은 그 반대자의 견해가 색깔이 의심스러운 누군가에 의해 강제되고 조작된 생각이라고 규정함으로써 그 의견의 진실성을 폄하하고 무시하는 것이다.

별로 동의하고 싶지 않지만, 현실적으로 ‘세뇌’가 가능한 일이라고 접어주더라도 마찬가지로 문제는 남는다. 그런 논리로 바라보면 서울광장에 단골로 등장해 인공기를 불태우고 성조기를 흔들며 USA를 찬양하는 극우단체 회원들도 꼼짝없이 세뇌당한 이들일 수밖에 없다.

정부나 한나라랑, 그리고 조중동에 물어보라. 그들은 ‘선량하고 상식적인 민주시민’이고, 그들의 논리는 ‘불타는 우국충정’의 소산일 뿐이다. 그것은 ‘세뇌’라는 음험한 단어로 규정지을 수 없는 긍정적이고 적극적 행위인 것이다…….

② ‘의식화’, 깨닫고 생각하게 함


세뇌만큼은 아니지만, 권위주의 독재 시절의 공안 이론에 힘을 보탰던 낱말로 ‘의식화’가 있다. ≪표준국어대사전≫의 풀이다. 사전에는 여전히 이 단어가 ‘삐딱하다’는 흔적을 지우지 못했다. 앞부분만으로도 충분한 설명인데, 뒤에 ‘계급의식’ 운운하여 이른바 ‘공안적(?) 시각’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의식-화 (意識化) [의ː시콰]
「명사」
어떤 대상에 대하여 깨닫거나 생각하게 함. 특히, 계급의식을 갖게 한다는 뜻으로 쓴다.
¶ 의식화 작업.

 

‘의식화’는 사물과 현상에 대한 종합적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사유의 출발점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사물과 현상의 의미들을 무심코 흘려보지 않고 거기 담긴 의미들을 과학적으로 인식하도록 해주는 것이 ‘의식화’인 까닭이다.

‘의식’ 없는 사람(병원에 식물인간으로 누운 사람을 말하는 게 아니다.)이 ‘의식’을 갖게 되는 게 ‘의식화’다. 여기서 의식을 갖는다는 것은 어떤 문제를 정확하고 올바르게 이해·인식·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된다는 뜻이다.

따라서 ‘의식화’는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일상 가운데서 이루어진다. 아이들은 가정에서 부모로부터 선악과 가치에 대해서 배우고, 학교에서 교사나 급우들을 통하여 사회화되는데, 이 사회화 역시, 의식화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③ 교육, 인간 행동의 바람직한 변화


대학 교육학 시간에 ‘교육’은 ‘인간의 행동을 바람직하게 변화시키는 것’으로 배웠다. ‘바람직한 행동의 변화’가 일어나기 위해선 의식의 변화가 선행되어야 한다. 우격다짐으로 학습자들의 행동을 바꿀 수는 없으니까. 따라서 교육은 제도적인 ‘의식화’의 과정이라고 보는 게 마땅하지 않은가.

 

▲ 파울로 프레이리의 〈페다고지〉

흔히들 ‘교육의 중립’을 이야기한다. 이 중립론의 핵심은 ‘편향되지 않음’이다. 기본 전제로서 교사들(물론 전교조 교사들이다.)이 편향되어 있다는 관점에서 출발하는 논리다. 편향된 교사들에 의해 교육받는 아이들이 의식화된다고 보는 이 오래된 논리는 ‘교육은 중립이어야 한다.’는 박제된 신화에 근거하고 있다.

이들이 생각하는 ‘중립’은 어떤 의견에 있어서 양극에 있는 찬반이 아니라 그 산술적 평균치로서 중앙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중립이 유의미하기 위해서는 양극에 있는 두 의견이 모두 정당성과 합리성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을 갖추지 못한 채 오직 산술적 균형에 기대어 ‘양비론’과 ‘양시론’으로 두 의견을 절충하는 게 올바른 방법이 될 수 있을까.

1970년에 발간된 ≪페다고지≫ 초판의 서문을 쓴 리처드 숄은 “교육에서 중립적인 것이란 없다.”고 일갈한다. “교육은 젊은 세대를 기존 체계의 논리에 통합시키고 따르도록 만드는 도구로 기능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자유의 실천’으로서 현실에 대해 비판적이고 창조적으로 대응하고 세계의 변혁에 참여하는 방법을 발견하기 위한 수단으로 기능할 뿐이”기 때문이다.

≪페다고지≫에서 파울로 프레이리 역시 진정으로 ‘불순’한 교육은 가치를 개입시키는 교육이 아니라 과학의 이름으로 가치를 배제하면서 현존하는 ‘억압’을 은폐하는 교육이라고 말한다. ‘가치’의 배제는 ‘중립’의 허울을 쓰고 있기는 하지만 현존하는 모순을 외면하게 만드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어차피 현행의 교육과정은 이미 아이들을 기존의 논리에 통합시키는 형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개성적이고 창조적인 인간’이 아니라, 규격화된 순응적 인간을 길러내는 데 학교는 일로매진하고 있다. 점수로 아이들을 일렬로 세우는 방법은 ‘성취도 평가’라는 세련된 포장을 통하여 점점 노골화되고 있다. 시방 세상은, 교사들이 “아니다, 아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징계의 서슬 푸른 칼날에 모가지를 내밀어야 하는 야만의 시간이다.

거기에 아이들을 ‘자유의 실천’으로서 현실에 대한 비판적이고 창조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인간으로 기르는 것은 언감생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살인적인 수업량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눈을 빛내며 교과서에 코를 박고 있는 아이들은 보면서 나는 프레이리를, 그리고 리처드 숄의 발언을 곰곰 되씹어보지 않을 수가 없다.

 

2009. 7. 9.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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