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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자서전>은 해외에 홍보할 수 없다?

by 낮달2018 2021. 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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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정부 한국문학번역원 원장의 ‘오버’? 혹은 ‘정권 눈치 보기’

▲ <김대중 자서전> 관련 기사. ⓒ <한겨레신문> PDF(2011.6.8 10 면)

이 땅에서는 작고한 전직 대통령의 영면도 쉽지 않은 모양이다. 고 김대중 전 대통령 이야기다. 한국문학번역원에서 내는 계간지에 실릴 예정이던 김 전 대통령의 자사전 소개 글이 원장의 지시로 게재되지 않았던 일이 있었다고 한다. <관련 기사 보기 >

 

▲ 작년에 출간된 <김대중 자서전>

한국문학번역원(이하 번역원)은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공공기관으로 원장은 계간지 <문학과 지성>(현재 <문학과 사회> 창간 위원이며, 숙명여대 교수를 지낸 저명 문학평론가 김주연(70) 씨다. 그는 “정치적·종교적 색채가 있는 책은 소개하지 않는다는 것이 번역원의 규정”이라며 편집자문위원들에게도 알리지 않고 이 기사를 삭제하게 했다는 것이다.

 

번역원에서는 영어·중국어판 계간지 <리스트- 북스 프롬 코리아(list-books from korea)>를 발행한다. 그런데 지난 2010년 겨울호에 논픽션 소개 기사의 머리글로 ‘김대중 자서전’이 소개될 예정이었는데 인쇄 직전에 원장의 지시로 이 기사는 삭제되었다는 것이다.

 

편집자문위원들이 이에 항의하며 문제의 기사를 2011년 봄호에 실어달라고 요구했다. 결국 지난 3월에 발행된 <리스트> 봄호에 예의 기사가 표지사진 없이 3분의 2쪽 분량(원래 2쪽)으로 실렸다. 그런데 봄호에 소개된 책 100여 권 가운데 표지사진 없이 소개된 책은 <김대중 자서전>을 포함해 단 2권뿐이었다.

 

그의 ‘정치인’ 운운하는 답변에 대해 편집자문위원들은 “김 전 대통령은 한반도 평화를 위한 노력으로 노벨상을 받을 정도로 세계적으로 알려진 인물로 정치인이라고 소개하지 않는 것은 말이 안 된다”라고 항의했다. 김 원장의 이어지는 변명이 재미있다.

 

“수많은 정치인들이 책을 내는 상황에서 정치인 책을 소개하면 계속 부탁을 받을 수 있다.”

“정치권에 휘말리지 않기 위한 선택이다.”

“<리스트>의 편집권은 자문위원이 아닌 번역원에 있다.”

“노벨상 수상자라는 주장을 수용해서 봄호에 <김대중 자서전>을 소개했다.”

“(<김대중 자서전> 사진이 빠진 데 대해) 편집 실무까지는 내가 챙기지 않는다.”

 

번역원 누리집(http://www.klti.or.kr/)과 <리스트> 매거진(http://www.list.or.kr/)에 들어가 보았다. 2011년 봄호에 <김대중 자서전> 기사가 있긴 하다. 그런데 아동 도서도 표지사진이 있지만, 이 책은 표지사진도 실려 있지 않다.

 

그는 ‘과천서부터 기었다’

 

나는 김주연 씨를 잘 모른다. 나는 70년대 후반에 문지에서 낸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평론집을 통해서 그를 알았다. 그가 독문학 전공의 문학평론가이면서 교수라는 사실 외에 나는 그를 잘 모른다. 그런데 일흔 살의 원로 문인으로서 그의 행위는 개운치 않은 뒷맛을 남긴다.

 

작가든 평론가든, 문인은 그 자신의 우주를 갖고 있으며 그것을 주재하는 사람이다. 세속의 질서와 권력에 영합하는 문인들이 세간의 비난을 비켜 갈 수 없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김주연 번역원장은 이미 작고한 전임 대통령, 그것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세계적인 정치인을 ‘책 소개를 부탁하는 현역의 뭇 정치인’과 동렬에 놓는 결례를 저질렀다.

 

그는 무엇이 찜찜했을까. 현재의 정치권력이 ‘잃어버린 10년’으로 매기는 전임 권력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다는 사실을 임명직 기관장으로서 그는 피해 가기 어려웠던 걸까. 설마, 임명권자인 문화부 장관이나 그 윗선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자서전 기사를 다루면 안 된다는 ‘지침’을 내렸을 리는 없다. 그렇다면 그는 일찌감치 ‘과천서부터 긴’ 것이 아닌가.

 

자문위원들의 항의에 대한 그의 변명은 권력을 좇는 뭇 문화 예술인들의 그것과 진배없어 보인다. 저열한 논리로 변명을 거듭하고 끝내는 표지사진이 빠진 리뷰를 싣는 실례를 저지른 것은 권력을 의식한 처신이라고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전직 대통령의 자서전을 홍보하는 것은 이 나라 국격에 누가 되는 걸까.

 

지난해 7월 나온 <김대중 자서전>은 국내에선 16만 권(8만질)이 팔렸다고 한다. 그것이 대중의 호응을 받은 것은 한 정치인의 자서전을 넘어 우리 시대의 역사의 행간을 담고 있는 책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은 올해 일본 이와나미출판에서 번역 출판됐으며 중국 인민대학 출판부에서도 출간을 앞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어쩌다 이 나라 문화판이 이 지경이 되었는지 참 서글프다. 배우 출신의 문화부 장관은 완장을 차더니 문화예술계의 원로 작가들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입혔고, 시민사회단체를 국고 지원 대상에서 배제해 버리기도 했다. 이념으로 판을 가르는 용렬한 반문화적 행태가 곳곳에서 저질러졌다.

▲ 표지사진이 없는 <김대중 자서전> 기사(왼쪽)와 일반 도서 기사 ⓒ 한국문학번역원 누리집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이념의 잣대로 가르기 전에 이 나라 민주주의의 상징이다. 일생을 통한 그의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과 투쟁은 우리나라 최초의 노벨상 수상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는 이미 고인이다. 그는 현실 정치에 개입하거나 영향력을 끼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런 전직 대통령의 자서전을 관에서 간행하는 매체에서 삭제하거나, 중요한 표지사진을 제외하고 반쪽만 싣는 행위가 어떤 의미인가를 생각할 능력을 그는 잃었던 것일까. 일흔 살, 마음이 시키는 대로 행동해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다[종심소욕 불유구(從心所慾踰矩)]는 세월을 넘긴 한 원로 문인의 행적 앞에 분노보다 씁쓸함을 감출 수 없다.

 

 

2011. 6. 8.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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