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지방선거 이야기
지방선거일 아침은 여느 아침과 다르지 않았다. 임시 공휴일이어서 투표를 마치면 남아도는 시간이 쏠쏠하다는 것을 빼면 말이다. 우리 가족은 10시 반쯤에 인근의 투표소를 다녀왔다. 딸애 말마따나 ‘투표하지 않아도 도움이 될’ 노인들만 우글대고 있지 않은가 싶었는데 뜻밖에 투표소는 한산했다.
투표하러 온 유권자보다 작지 않은 공간에 종사자들 수가 훨씬 많았다. 한 번에 넉 장씩 두 차례나 투표지를 받아서 기표하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이삼 분에 지나지 않았다. 기표소 안에서 투표용지를 펴 놓으니 기도 안 찼다. 정말 아무리 들여다봐도 찍을 만한 데가 없었다.
6·2 선거, ‘국민의 승리’
우리 가족은 미리 합의한 대로 기초와 광역 자치단체 의회 비례대표를 뽑는 정당 투표지에만 여물게(!) 기표하는 거로 ‘민주시민’ 노릇을 다했다. 투표를 마치고 나온 늙수그레한 사내 하나는 투표소를 나오면서 머리를 갸웃거렸다. 복잡하고 헛갈리는 투표라는 뜻일 터였다.
나는 아내와 함께 인근 병산서원에 가서 차를 대고, 거기서 ‘하회마을 길’을 걸어 하회로 갔다. 강을 따라 난 길과 산길을 합쳐 약 4Km 거리였다. 날씨는 선선한 편이었지만 이내 땀이 나고 힘이 들었다. 한 시간쯤 후에 우리는 하회에 닿았고 거기서 콩국수로 늦은 점심을 들었다.
집으로 돌아온 건 네 시가 넘어서였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겠지만 나는 이번 지방선거에 대해서 특별히 기대하고 있지 않았다. 지금이야 엉터리로 판명되었지만, 투표일까지 보도를 통해 드러난 표심은 여당 쪽에 기울어 있었고, 무슨 변화의 조짐 따위는 전혀 드러나지 않았던 까닭이었다.
물론, 내심 의미 있는 반전을 전혀 기대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그걸 받아들이자고 나는 자신을 달래고 있었다고 말해야 옳다. 1987년 대선 이후부터 붙은 버릇이라면 버릇이다.
오후 6시에 방송 3사의 출구조사 결과를 듣고 나는 잠깐 헷갈렸다. 그것을 얼마만큼 믿어야 할지 종잡을 수 없었던 까닭이다. 이후 심야를 거쳐 이튿날 아침까지 벌어진 이 일련의 드라마에 나는 여전히 얼떨떨했다. 상황의 의미들을 제대로 추슬러 마음이 푸근해진 것은 출근해 몇몇 벗들과 통화를 하고 나서였다.
어쨌든 이번 지방선거는 ‘야권’이 아니라 ‘국민’의 승리로 끝났다. 선거 분석에서 드러나듯 야권이 받은 표가 전적으로 야당에 대한 지지로 보기보다는 여당에 대한 ‘심판’의 성격이 컸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예측 불가능했던 극적 드라마의 주인공은 두말할 것 없이 유권자다. 특히 16년 만에 최고의 투표율로 나타난, 나들이 대신 투표소행을 선택한 젊은이들이다.
투표로 드러난 성난 ‘민심’
나는 벗과의 통화에서 ‘반분이나마 풀렸다’고 말했다. 친구도 동감이라고 말했다. 2007년 대선 이후 삼 년, 이번 선거를 통해서 드러난 민의는 삼 년 전의 그것과는 명백히 상반되는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승패의 반전에 그치지만 이번 선거 속에 숨어 있는 의미들을 되새겨보는 일은 그리 녹록하지 않을 듯하다.
선거 결과를 바라보는 언론이나 일반의 평가는 대동소이하다. ‘국민의 준엄한 심판’이거나 ‘침묵하던 다수의 반란’이고 ‘성난 민심의 확인’이다. 이 화려한 말의 성찬에 담긴 공통 코드는 ‘민심(民心)’이다. ‘백성’이라는 뜻을 담은 ‘민(民)’이라는 어휘는 그 전근대적 의미에도 불구하고 그 함의가 매우 깊고 드넓다.
지난 2007년 대선 이후에 현 정부가 보인 행보 앞에서 절망하거나 분노한 유권자들의 반응은 대체로 비슷해 보인다. 분노하는 이들은 세 부류로 나눌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우선 자신의 선택과 무관하게 현 정권의 출범을 지켜보아야 했던, 자신을 ‘피해자’라고 여기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불만과 분노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편인데 자신의 선택과 관계없이 현실을 수용해야 한다는 점에서 이들의 심정은 일견 동정의 여지가 있긴 하다.
다른 하나는, 흔히 하는 말로 ‘찍었던 손목을 자르고 싶다’라는 후회로 가슴을 저미는 이들이다. 이들의 수는 별로 많지 않다. 자신의 판단 오류와 책임을 솔직하게 인정하기는 쉽지 않은 일, 그것은 자신의 정치적 지향뿐 아니라 세계관을 드러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찍긴 했지만, 손목을 자르고 싶다’라는 생각도 함부로 드러내지 못하며 혼자서 분노와 후회를 되씹어야 하는 이들이다. 당연히 우리 주변에는 이들의 숫자가 가장 많을 터이다. 이들은 현 정권의 실정에 대해 자신에게도 일부 책임이 있다는 생각 때문에 매사에 조심스럽다.
실망과 좌절 때문이기는 하지만, 이들에 대한 ‘피해자’들의 분노와 빈정댐은 때때로 도를 넘기도 했다. ‘민주주의를 말할 자격도 없는 국민들’이라는 비아냥거림부터 시작해 ‘당해도 싸다’에 이르기까지 이들에 대한 저주와 폄훼의 언사는 차고 넘쳤다.
‘돌’ 대신에 ‘표’를 무기 삼은 사람들
노골적인 분노와 불만을 터뜨림으로써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는 이들에 비기면 이들의 고통은 갑절이다. 누구에게 말도 못 하고 홀로 가슴앓이로 견뎌온 세월이니 말이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이 저지른 선택의 오류를 잊지 않고 있었다. 이들은 다만 기다렸던 것 같다. 2년 전 선거에서 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선택을 통해서 국민에게 진 빚을 고스란히 되갚은 것이다.
민심을 담아내지 못한 여론조사도 마찬가지다. 투표일 전날까지 실시된 각종 여론조사에서도 변화의 조짐 따위는 드러나지 않았다. 여론조사 표집의 문제도 있다고 했지만, 사람들은 조사자에게 자신의 속내를 감춘 것이다. ‘미네르바 효과’든 다른 의도에서였든 속내를 드러내지 않은 이면에 숨어 있는 유권자들의 ‘결기’가 느껴지는 부분이다.
‘무섭다’라는 표현은 좀 과할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선거 결과를 천천히 반추하면서 가슴이 서늘해졌다. 내심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은밀하게 ‘선거일’을 손꼽아 기다린 국민이 적지 않았다는 얘기다. 적어도 이들은 잘못된 선택을 통해 자기 ‘표의 가치’를 확인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전 시대의 젊은이들이 던진 ‘돌’ 대신에 ‘표’를 자신의 무기로 삼은 것이다.
500만 표 이상의 표 차로 현 대통령을 뽑은 지난 대선에서의 선택과 이번 선거에서의 선택은 상반되는 내용에도 불구하고 그 주체가 다르다고 여길 수는 없다. 당시 국민의 선택과 오늘의 그것은 결코 다르지 않았다. 변한 것은 ‘유권자’가 아니라 선택의 잣대가 되는 현실 정치 상황이었던 것이다.
신영복 선생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 성찰한 ‘민중’을 떠올리게 되는 대목이다. 6·2 지방선거를 통해서 드러난 민심을 일러 “당대의 가장 기본적인 모순을 계기로 하여 창조되는 응집되고 ‘증폭된 사회적 역량’”이라고 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민심의 변화, 민주주의·정치발전으로 이어져야
그 역량이 ‘단일한 계기에 의하여 단번에 나타나는 가벼운 걸음걸이의 주인공이 아’니라는 것과 오랜 ‘역사 속에 점철된 수많은 성공과 실패, 그 환희와 비탄의 기억들이 민족사의 기저에 거대한 잠재력으로 묻혀 있다가 역사의 격변기에 그 당당한 모습을 실현하는 것’은 인간의 역사를 통해 증명된 진실이다.
2010년 6월의 우리 유권자들을 ‘민중’이라는 계급으로 설명할 수 있는지 어떤지는 과문한 나로서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민중을 이렇게 신성시하는 것도 실은 다른 형태의 감상주의’라는 선생의 지적에 동의하면서 6·2선거에서 드러난 ‘민심’ 앞에서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생각에 따라서는 ‘기대에 못 미치는 변화’이고 ‘한계가 분명한 반전’일 수 있지만, 그것이 민심의 실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설사 그것이 우리 시대의 한계나 ‘역사적 미숙’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 사회 전체가 져야 할 책임일 뿐, 민심의 선택을 폄훼할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
선거 결과가 몰고 올 여러 가지 실질적 변화를 짚는 신문 기사를 읽으면서 생각한다. 이 변화가 궁극적으로 우리 사회 민주주의의 성숙과 정치발전으로 이어갈 수 있을지를. 이 퇴행의 시간과 상황을 도도한 역사의 흐름으로 되돌릴 수 있을 것인지를.
2010. 6. 5.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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