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주의자 표창원의 발언들
“경찰 허위 발표로 당선…朴대통령 사퇴해야”
“국정원 게이트, 정권 이익 위해 사법 정의 짓밟은 ‘쿠데타’”
“법과 정의 짓밟은 박근혜, 더 이상 제겐 대통령이 아닙니다.”
내로라하는 야당 정치인이 내뱉은 말이 아니다. 모모한 재야 민주 투사의 일갈도 아니다. 그들의 말이었다면 그 말 속에 담긴 뜻은 그냥 의례적이거나 외교적 수사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자유롭게 말하기 위해 경찰대 교수직을 박차고 나온 ‘보수주의자’”(<한겨레> 연재 ‘표창원의 죄와 벌’의 필자 소개)다.
보수주의자 표창원의 ‘멘탈’
표창원은 지난해 대선을 전후해 자유인이 되었다. ‘정의로운 사람이 되는 게 항상 꿈’이었다는 이 보수주의자는 자신의 세계관으로 세상을 이해·인식하되 그것과 어긋난 현실에 대해 매서운 일갈 날리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여야 후보가 격돌하는 대선 국면에서 보수답지(여기서 말하는 ‘보수’는 이 나라의 자타칭 ‘보수’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들먹이는 그 ‘보수’다.) 않게 보수 여당에 불리한 발언을 서슴지 않았던 이유다.
표창원이 경찰대를 사직한다고 했을 때, 그의 진의를 ‘살짝’ 의심한 사람은 적지 않았을 것이다. 자칭 ‘보수’라고 거품을 물지만, 저게 어디 덩어리 큰 ‘떡’을 노리는 그렇고 그런 수작이 아닐까 하고 눈을 흘겼던 사람은 ‘묻지 마 보수’만은 아니었을 거라는 얘기다.
국립대 교수직을 던진 그는 “정치 건달을 불러 24시간 말싸움시키는 방송”(변희재)이라는 ‘종편’에 나와 자타칭 ‘정치 평론가’들과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한 번이라도 그 논쟁을 눈여겨 본 사람이라면 때론 격정적이고 때론 분노를 억제하지 못하는 그의 모습에서 마치 소년 같은 열정을 눈치챌 수 있었을 것이다.
한 종편 프로그램에 나와 ‘국정원 여직원 사건’과 관련해 여당의 한 전직 국회의원과 다투는 그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나는 솔직히 조금 안쓰러운 느낌이었다. 그는 예의 사건과 그것에 대응하는 여당 쪽의 태도에 대해서 매우 분노하고 있었고 그 분노 때문에 상대방의 발언을 중도에 끊어버리기 일쑤였다.
적어도 그는 노회한 토론자는 아니었다. 형식적으로 보면 그는 상대를 논리적으로 제압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논리가 모자라서가 아니라 사건을 바라보는 그의 순수하고 공정한 입장에서 비롯한 분노 때문인 것 같았다.
대통령 선거일 전날, ‘go발뉴스’ 홈페이지를 통해 생방송으로 진행된 ‘생방송 대선 뉴스쑈’에 나와 격정을 자제하지 못하고 책상에 얼굴을 묻고 통곡한 표창원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것은 그가 어린 시절부터 꿈꾸어 온 ‘정의’에 대한 좌절과 실망에서 비롯한 한 열혈 보수주의자의 눈물이었다.
본래 나는 무엇인가에 대해 쉽게 열광하지 않는 위인이다. 좋아도 그저 마음이 조금 당긴다고 여길 뿐이지, 그 좋음을 표현하기 위해 다른 어떤 행위도 잘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사춘기 때, 당시 꽤 좋아한 배우가 나온다는 쇼를 보러 극장에 간 게 내 ‘열광의 최대치’였다.
그건 사람이든 사물이든 다르지 않다. 취향과 기호도 마찬가지다. 어떤 일에 오롯이 빠져든 것은 1989년 이래 20여 년 가까이 참여했던 교육운동이 유일하다. 그렇다고 어떤 일이든 싫증을 잘 내는 편이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나는 무슨 일이든 비교적 꾸준하게 끌고 가는 편이다.
사람에 대한 호오는 분명하지만, 그 호감을 표출하는 방식은 지극히 소극적이다. 내게도 호감이 가는 문인이나 정치인이 있다. 그러나 멀찍이서 그것을 바라보며 내 선택이 합리적이었음을 확인하는 정도지 ‘그 앞에 냅다 엎어지는’ 스타일은 결코 아니다.
당연히 사람을 바라보는 시각도 좀 굼뜨다. 어, 저 사람 괜찮아 보이는데, 하고 느끼는 것과 ‘역시 괜찮은 사람이었어’하고 정리, 확인하는 데는 일정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대선을 전후해 표창원을 바라보면서 느꼈던 심사도 비슷했다.
노회한 관전자 아닌 ‘열정적 참여자’
자기 생각에 겨워 가끔 상대방에 대한 배려를 놓치곤 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일단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여느 사람과는 달라야 한다는 걸 직감했다. 그는 노회한 관전자가 아니라, 상황의 한복판에서 그것을 자신의 문제로 여기고 전심전력으로 거기 접근하는 열정적 참여자였기 때문이다.
최근 이른바 ‘국정원 게이트’에 대한 표창원의 최근 발언은 눈부시다 못해 아슬아슬하다. 그가 다음 아고라에 올린 ‘국정원 게이트 국정조사’ 청원은 16일 정오 현재 4만 명을 돌파했는데 청원을 제안하는 그의 글은 격문에 가깝다.
한국 국정원 게이트는 6개월간의 경찰-검찰 수사로 조직적인 정보기관의 불법적 선거 개입 범죄가 확인됐지만, 체포/구속 0명, 실제 불법행위를 자행한 국정원 직원들은 기소유예 됩니다. 정권의 이익을 위해 국정원과 경찰, 검찰이 고의적으로 사법 정의를 짓밟은 ‘쿠데타’입니다.
[……중략……]
새누리당 정권이 천년만년 갈 것 같습니까? 언제든 바뀝니다. 불법과 부정 위에 쌓인 힘과 권력, 언젠간 무너지고 무너질 때 비참합니다. 국민이 잊지 말고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국정원과 경찰-검찰 담당자 이름을 반드시 기억합시다. 황교안 법무 장관과 곽상도 민정수석의 이름을 기억합시다. 새누리당 관계자들의 이름을 기억합시다.
[……중략……]
불법과 부정을 자행한 자들은 국민의 냉소와 무관심을 먹고 살고, 가장 큰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냉소하지 맙시다, 패배주의에 빠지지 맙시다. 관심 가집시다. 지금은 국정조사 실시! 한목소리로 외칩시다.
부탁드립니다. 호소드립니다. 다음 네이버 등 포털에, 언론사 게시판에, 새누리당과 민주당 등 정당 홈피에, 트위터에, 페이스북에 “국정조사 실시!”를 써 주십시오. 외쳐주십시오.
그리고 이 청원에 서명해 주십시오.
그래서, 국민의 대표인 국회가 제 역할 하게 해 주세요. 대한민국이 헌법에 명시된 것처럼, “민주공화국”임을, “국민이 주권자”임을,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확인하게 해 주세요.
우리 아이들에게 자랑스러운 민주국가를 물려주고 싶습니다.
그는 트위터에 올린 글을 통하여 “국정원의 오랜 기간에 걸친 불법적 색깔론 여론조작이 없었으면, 12·16 경찰의 허위 수사 결과 발표가 없었으면, 박근혜는 대통령이 될 수 없었다.”며 “국정원과 경찰을 이용한 쿠데타, 권력 찬탈이다. 박근혜 대통령도 닉슨처럼 사퇴해야 한다.”고 촉구하기에 이른다. [관련 기사 바로 가기 ☞]
그의, 보기에 따라서는 도발적으로 보이는 문제 제기의 백미는 그가 트위터에 남긴 글에 있다. 그는 ‘원세훈·김용판의 구속을 막은 대통령과 청와대, 정부의 정통성’을 부정한다면서 ‘박근혜, 더 이상 제겐 대통령이 아니’라고 선언하고 있다.
@DrPyo (표창원 전 경찰대 교수) : 원세훈 김용판 구속이 중요한 이유는 그 배후에 대한 신문 조사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구속을 막은 대통령과 청와대, 정부의 정통성 저는 부정합니다. 로펌 ‘전관예우 로비스트’ 황교안 법무장관과 곽상도 정무수석을 내세워 검찰 수사팀을 압박, 불구속 결정. 법과 정의 짓밟은 박근혜, 더 이상 제겐 대통령이 아닙니다. 다음 정통한 대통령 생길 때까지 공석.
그의 발언이 가리키는 주장과 판단에 대한 동의 여부와는 무관하게 날이 갈수록 선명해지는 그의 태도는 경이롭다. 나는 무엇보다도 그가 자신을 ‘보수’라고 자처하는 걸 높이 평가한다. 그의 주장과 태도는 실제로는 이 나라 진보의 그것과 훨씬 가깝다. 그런데도 그가 굳이 자신을 보수라고 매기는 것은 자기 신념에 대한 확신 때문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라. 이 나라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자신을 보수로 ‘참칭’하는가 말이다. 기실은 ‘극우적’ 사고에 익숙한 ‘수구(守舊)’들이 자신을 보수로 매기면서 원칙적 진보를 주장하는 이들을 ‘좌파’나 ‘친북’으로 매도하고 있다. 상대를 ‘친북좌파’로 공격하는 한 그들의 ‘보수’ 입지는 강화되는 정치·사회적 지형은 한편으로 이 땅의 사상적 후진성의 한 징표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들 수구 인사는 단순히 ‘가스통 할배’들이나 ‘군복’ 입는 민간인들에 그치지 않는다. 권력 주변을 맴돌며 엽관을 노리는 정치인에서부터 이른바 ‘헌법기관’이라는 국회에 입성한 선량들까지 보수를 참칭하는 자들은 차고 넘친다. 그러나 이들은 보수의 본질적 가치와는 멀리 떨어진 사람들이다.
표창원의 원칙과 ‘소년적 열정’
역사학자 한홍구 교수는 “보수주의자들은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지혜로 전통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로 규정한다. 그는 또 “그들(이른바 지금의 보수라고 외치는 이들)은 진정한 보수주의자들의 덕목인 도덕성, 일관성, 책임감, 지혜 등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가당치 않은’ 족속들”(<대한민국사>)이라고 말한다.
‘정의로운 사람’을 꿈꾼 보수주의자 표창원은 시방 일찍이 장엄한 최후를 맞은 이건창 등 한말의 보수주의자들이 간 길을 어렵사리 찾고 있다. 그는 보수주의자이되 보수의 치부를 과감히 드러내고 스스로 그 부끄러움을 감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나의 ‘유불리’와 무관하게 선거는 공정해야 하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그는 ‘자랑스러운 민주국가’를 만들고 그것을 자신의 아이에게 물려주고 싶어 한다. 그는 파당이 이해보다 자신의 원칙을 포기할 수 없었던 사람인 것이다.
그는 “대선과 관련한 견해를 표명하는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경찰대 교수로서의 직위’가 이용될 수 있음을 인식하고”, “경찰대와 학생들의 엄정한 정치적 중립성에 부당한 침해가 발생할 가능성을 방지”하기 위해 국립대 교수직을 던졌다. 요즘 말로 ‘쿨’하기 이를 데 없다. 그리고 이는 정치권과 대학을 자신의 필요에 따라 오가는 이른바 ‘폴리페서’와 분명히 구분되는 태도다.
나는 매주 <한겨레> 토요판에서 그가 쓰는 ‘죄와 벌’을 읽는다. 범죄심리학자 표창원은 주요 범죄 사건을 돌아보면서 그 범죄의 이면에 도사린 문제점을 짚어내고 그것의 현재적 의미를 묻는다. 거기서 드러나는 것도 역시 원칙적 보수주의자로서의 그의 단호한 태도다.
그는 늘 망설임 없이 문제의 핵심을 짚고 그것을 단순하고 명료하게 규정한다. 그것은 때로 거칠고 직설적이기도 하다. 그런 단호한 태도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역시 자신의 신념에 대한 믿음인 듯하다. 어쩌면 그는 그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으로 인식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지난 12일, 출근길에 나는 CBS 라디오의 <김현정의 뉴스쇼>를 통해 표창원 인터뷰[기사 바로가기 ☞“원세훈 불구속 기소는 흥정의 결과”] 방송을 들었다. 방송이 끝나기 전에 목적지에 도착했지만 나는 시동을 끄고 인터뷰를 끝까지 들었다. 그리고 나는 오래 유보해 둔 그에 대한 평가에 마침표를 찍었다.
“그래, 표창원이 맞아. 그는 ‘옳은 쪽’에 서 있어.”
그는 문제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면서 애매모호한 태도나 언술을 취하지 않는다. 그의 언급은 늘 핵심과 정곡을 찌른다. 그는 당사자에게 있음 직한 어떤 고려나 여지도 두지 않는다. 그는 ‘법무부의 수사 개입’이라는 민주당의 입장에 동의하느냐는 진행자의 물음에 서슴없이 동의한다. 그리고 이 사건이 ‘법무부 장관 해임’까지 가야 할 사안으로 보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도 명쾌하게 답변한다.
“저는 해임뿐만 아니라 사실이라면, 이분의 직권남용 혐의에 대한 범죄 수사도 이루어져야 된다고 봅니다.”
그는 집권당과 정부, 최고 권력에 대해서 어떤 사정도 두지 않는 건조하고 직접적인 언어를 구사한다. 그게 혹여 가져올지도 모를 ‘후환’이나 ‘뒤끝’ 따위에 연연하지 않는, 보기 드문 초연한 모습이다. 그래서 그의 진의를 의심하던 사람들도 이미 예의 미심쩍은 시선을 거두어들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글쎄, 야인이 되어 보수주의자로서 원칙을 지키면서 민주주의와 정의를 꿈꾸는 표창원의 미래를 나는 예측할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의 문제 제기는 여야가 누구건 간에, 모든 반민주와 불의 앞에 일관되게 이루어지리라는 것이다.
민주주의와 정의를 위한 그의 부단한 관심과 추구는 결국 ‘정의로운 사람이 되고자 하’는 그의 꿈과 이어져 있는 듯하다. 그리고 대중들은 아마 그를 ‘정의’와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드문 ‘보수주의자’로 기억하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가 자신의 소년과도 같은 열정을 잃지 않는 한 말이다.
2013. 6. 16.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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