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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교단(1984~2016)에서

1989년 6월 12일, 그리고 20년

by 낮달2018 2021. 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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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6월 12일-전국교직원노동조합 경북지부 결성

▲ 전교조 20년 기념으로 만든 머그 잔. 지난 교사대회에서 한 후배 교사로부터 받은 것이다.

스무 살, 성년이 된 '전교조'

 

알다시피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은 지난 5월 28일 자로 창립 스무 돌을 맞았다. 20년이라면 갓난아이가 성년이 되는 시간이니 이 스무 해의 의미는 각별하다고 할 수 있겠다. 20년의 절반, 그러니까 10년 만에 전교조는 합법화(1999.7.1.)되었으니 올해는 합법화 10돌을 맞는 해이기도 하다.

 

1989년이라면 좀 골치가 아픈 해였다. 그해 3월 25일에 문익환 목사의 전격 북한을 방문 이래 형성된 이른바 ‘공안정국’(요즘도 심심찮게 듣는 소리다.)의 한복판을 뚫고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 민족·민주·인간화 교육을 모토로 하는 참교육의 깃발을 올렸었다.

 

그날, 우리 지회(성주·칠곡)가 전세 낸 버스는 교사들을 가득 태운 채, 구미에서 좌초했다. 주요 구성원들의 집 주변에서 거의 노숙하다시피 한 지역 교육청의 장학사들을 제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구미 버스 터미널에 포진한 전경 1개 중대 병력 앞에서는 역부족이었다. 우리는 결국 연세대에서 창립식이 벌어지고 있을 때 지역 교육청 회의실에서 항의 농성으로 시간을 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전교조 본부의 창립이 있고 난 후 각 시도 지부의 결성이 잇달아 이루어졌다. 우리는 전세 버스로 상경하겠다는 계획이 결국 본부 창립식에 참석할 수 없었던 실패의 원인이었다는 사실을 반성하면서 각개 약진의 방식으로 지부 결성식에 참석하기로 했다.

 

지부 결성식 참가기

 

지부 결성식이 예정된 1989년 6월 12일은 토요일이었다. 나는 1학년 담임이었고 그날 4교시 후에 우리 반에는 아이들의 합동 생일잔치가 베풀어질 예정이었다. 그때, 나는 참 얼마나 어수룩했던가. 전 행정기관이 동원되어 우리의 행사 참가를 막으려 기를 쓰고 있었는데도 나는 그날 아침까지도 행사를 마치고 출발해도 늦지 않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2교시가 끝나고 교무실에 왔을 때 나는 일이 어긋나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지역 교육청에서 장학사가 한 명, 경찰서 정보과 형사 1명이 교무실에 진을 치고 있었다. 언제쯤 대구로 가느냐는 질문에 대해 나는 시치미를 떼고 오늘 반 아이들 생일잔치가 있어서 늦어질 것 같다고만 대꾸했다.

 

수업을 모두 마치고 나는 교실에 내려가 아이들에게 상황이 뒤틀려 버렸다는 걸 알리고 양해를 구했다. 아이들끼리 행사를 진행해 달라고 부탁하면서 나는 아이 하나에게 본관 신발장에서 내 신발을 가져오게 했다. 아이들은 행사보다는 내가 뿜어내는 날이 선 긴장감을 은근히 즐기는 눈치 같았다.

 

나는 아이들에게 조용히 하직 인사를 하고 별관의 우리 교실을 빠져나와 학교의 후문을 빠져나왔다. 나는 잠깐 망설였다. 거기서 대구로 나가는 길은 국도와 고속도로를 거치는 길과 반대편의 지방도로를 거쳐 대구 외곽으로 돌아가는 길이 있었다. 정류장은 이미 막혔을 가능성이 컸다. 나는 서슴없이 지방도로 쪽을 선택했다.

 

아무 데나 서는 완행버스가 다닐 뿐 직행도 없는 외진 길을 어떻게 가나, 아무 차나 잡아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뒤에서 요란한 폭음 소리와 함께 우리 반 녀석 하나가 오토바이를 몰고 나타났다. 녀석은 씩씩하게 외쳤다. 선생님, 타십시오! 그는 마치 구세주 같았다. 나는 순식간의 대구 외곽에 도착했고 백배 치사하면서 녀석과 헤어졌다.

 

나는 시내버스를 타고 서문시장까지 간 다음, 거기서 택시를 탔다. 일단 지역의 거머리처럼 달라붙던 훼방꾼들은 따돌렸지만, 막혀 있을 교문을 통과하는 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경북대학교 북문 쪽으로 달리던 택시가 언덕바지를 넘는 순간, 차는 불심검문에 걸렸다.

 

순간적으로 나는 지난 5월 28일의 악몽이 재현되는가 싶은 절망에 빠졌다. 차가 멎을 때 나는 운전사에게 낮게 소근댔다. 복현동으로 간다고 말하세요. 그러나 정작 늙수그레한 경찰은 내게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고 나는 인근의 아파트로 간다고 대답했다. 그는 심드렁하게 손을 흔들었다. 나는 그제야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히 교문은 막혀 있지 않았다. 야호! 나는 택시를 타고 행사장 턱밑까지 들어갔다.

▲ 전교조는 1989년 5월 28일, 공안당국의 방해를 뚫고 창립되었다.

전교조 경북지부 결성식은 비장감과 온갖 방해를 뚫고 이루었다는 흥분이 교차하는 가운데 야외공연장에서 베풀어졌다. 우리는 좀 들떠 있었고, 저마다 곡절을 겪으며 행사장에 오기까지의 무용담을 나누었다. 그날, ‘교원노조가’를 부르며 힘차게 내젓는 팔뚝질하는 동료들의 팔은 얼마나 눈부셨던가.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지 않은가. 밥도, 쌀도, 돈도 나오지 않을뿐더러, 온 가족이 말리고 동료들이 말리고 온 행정기관이 달려들어 말리는 ‘교원노조’에 마치 ‘부나비’처럼 모여들었던 그 자랑스러운 얼굴들을 나는 지금도 하나씩 떠올릴 수 있다.

 

그리고 다시 20년을 향하여

 

그들 중 상당수는 이후 두세 달 동안 학교에서 쫓겨났다. 몇몇은 일찌감치 세상을 떠났고 또 몇몇은 조직을 떠나기도 했다. 거듭하는 이야기지만 20년이라면 한 아이가 성년으로 자라게 되는 시간이다. 그때, 30대 중반으로 진입하고 있었던 나도 이제 학교에서 ‘노틀’ 동아리에 편입되었으니 말이다.

 

나는 지부 결성 후, 두 달쯤 지난 1989년 8월 23일 자로 학교에서 해임되었다. 그리고 4년 반, 1994년 3월 복직할 때까지 나는 지회와 지부에서 상근했다. 월 2, 30만 원씩 나오는 생계비에 목을 걸었던 시절인데, 살림은 궁했지만, 그 시절엔 낭만이랄까, 삶의 여유가 넘쳤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지역 해고자 4명과 현직 동료들이 십시일반 갹출하여 중고 승합차 한 대를 샀다. 우리는 그 고물차를 끌고 다니며 학교를 방문했고, 돌아오는 길에는 시내나 보에서 투망으로 천렵을 즐기곤 했다. 우리가 잡은 물고기로 매운탕을 끓여 놓으면 근무를 마친 현장 동료들이 몰려와 같이 술을 마시며 조직의 진로를 함께 고민했다.

 

모든 게 꽉꽉 막혀 있는 듯했지만, 그 시절에는 우리는 그래도 절망하지 않았고,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던 것 같다. 우리는 아무도 자신의 선택을 뉘우치지 않았고 오히려 해직의 멍에를 자랑스러워했다. 1994년 복직, 1999년 합법화를 맞이하면서 마침내 참교육 운동은 그 전성시대를 맞은 듯했다.

 

그러나 새 천 년의 세월은 모질기만 하다. 한때는 ‘꿈과 희망’으로 불리던 전교조는 동네북 신세가 되었고, 다수 국민과의 소통을 포기한 구제 불능의 ‘이익단체’로 매도되기에 이르렀다. 시운이 나빴다는 것 말고도 우리에게 귀책 되는 사유가 어찌 하나둘이겠는가. 20년 전 오늘을 회고하는 것조차 민망하기만 하다.

 

누구도 쉽게 이 세월을, 현재의 질곡을 벗어날 수 있는 묘안을 갖고 있지 못하다. 그리고 그것은 섣부른 이야기로 정리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닌지 모른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자신에게, 대중들에게 끊임없이 되묻는 가운데 우리의 화두는 그 실마리를 보여줄지 어떨지 모르겠다.

 

 

2009. 6. 12.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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