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아이들의 어휘력, 걱정이다
아무래도 시골 아이들이 대도시 아이들보다 어휘력이 떨어지는 것은 사실인 듯하다. 무엇보다 도시 아이들에게 비기면 시골아이들의 시청각적 자극은 제한적이다. 연극 같은 공연예술은 물론이거니와 영화 보기도 쉽지 않은(군 단위 지역에는 영화관이 거의 없다.) 아이들에게 문화적 자극은 TV가 고작인 것이다.
개인차로 볼 수밖에 없는 독서 체험도 시골 아이들이 대도시 아이들을 따라가기가 만만치 않아 보인다. 그런 격차가 자연스레 어휘력으로 드러나는 게 아닌가 싶다. 실제로 아이들의 어휘력은 심각한 구석이 많다. 중학생들의 경우에는 국어 시험이 아니라 가정이나 사회 시험을 치면서도 감독 교사에게 문항에 나온 말뜻을 묻는 경우가 적지 않을 정도다.
넉넉한 어휘력은 무엇보다 사유의 영역을 넓혀 준다. ‘그의 언어의 한계는 그 세계의 한계’라 한 비트겐슈타인이나 플로베르의 ‘일물일어설’을 굳이 불러올 필요도 없다. 풍성한 어휘력은 자신이 맞닥뜨린 세계와 사물뿐 아니라, 자기 내면의 풍경을 이해하고 표현하고, 판단하는 밑바탕이니 말이다.
사람들은 독서 체험을 통해서 새로운 낱말을 깨치게 된다. 낯설고 생경한 낱말을 사전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이해하는 것은 그 낱말이 쓰인 전후 맥락을 통해서다. 대체로 사람들은 맥락 읽기를 통해 새로운 낱말을 배우고 익히는 것이다.
어제 수업을 하다가 좀 난감한 상황에 부딪혔다. 어떤 시 구절을 설명하다가 ‘물상(物象)’을 ‘삼라만상(森羅萬象)’이라 풀어 주었더니 아이들이 되받았다.
“삼라만상이 뭔데요?”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나는 멀거니 아이들을 바라보기만 했다.
“정말 모르는 거야? 아니면 일부러 그러는 거야?”
“정말 모르는데요…….”
이과반이라서 그런가, 나는 다음 문과반 수업에서도 ‘삼라만상’을 물어보았는데, 아이들의 답은 다르지 않았다. 나는 ‘우주에 있는 온갖 사물과 현상’이라고 대답해 주고도 한참 동안 머리를 갸웃했다. 학력이나 지능이 떨어지는 아이들이 결코 아니다. 고교 비평준화 지역이어서 우리 학교 아이들은 관내 중학교에서 최상위의 성적을 거두었던 아이들이다.
소설(오정희의 ‘중국인 거리’) 수업을 하다가 ‘양공주(洋公主)’ 얘기가 나왔는데, 아이들은 이 말의 뜻도 몰랐다. 이과반에서 물었더니 ‘양딸?’ 하고 대답하는 아이 말고는 모두가 맹한 얼굴이었다. 그나마 한 아이가 뜻을 꿰고 있어서 새로 설명하는 수고를 덜었다.
하긴 전쟁이 끝난 지 반세기가 넘었다. 아이들은 1992년생이니 우리 해방과 전쟁 등 우리 근대사와는 한참 먼 세대들이다. 전후의 가난이 아니라, 풍요의 세월 속에서 자란 아이들이다. 나는 아이들이 ‘양공주’를 모를 수 있다는 걸 인정하기로 했다.
그러나 ‘삼라만상’은 그렇다. 한글세대이긴 하지만 아이들은 학교에서 ‘한문’ 교과를 배우며 자랐다. 한글세대라는 이유만으로는 그걸 설명할 수가 없는 것이다.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더니 이구동성으로 독서 체험이 부족한 걸 이유로 꼽았다.
좀 묵은 이야기다. 4, 5년 전에 중3을 가르치다 오래된 유머 하나를 이야기해 주었다. 미술 시험 시간이었다. 어떤 문제의 정답이 ‘로댕’이었다. 한 녀석이 커닝했는데, 제대로 못 봐 제 답안지에는 ‘오댕’이라고 적었고, 또 다른 녀석이 이를 베끼면서 똑같이 쓰는 게 찝찝해서 이를 풀어서 ‘덴뿌라’라고 적었다는 얘기였다.
그런데 아이들의 별 반응을 보이지 않는 거였다. 분명 웃음이 터져야 하는 상황인데 아이들은 좀 요령부득의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하는 수 없다. 내가 아이들에게 물었다. 야, 너희들 왜 안 웃어? 아이들은 볼멘소리로 대답했다. ‘덴뿌라’가 뭐예요?
여전히 아이들은 ‘어묵’보다 ‘오뎅’에 익숙하다. 우리 세대에 비긴다면 이들은 묵은 일본어 찌꺼기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롭다는 얘기도 되겠다. 그러나 그건 거기까지다. 아이들은 우리 세대처럼 ‘벤또’, ‘장껨뽀시’, ‘다마’ 대신 ‘도시락’, ‘가위바위보’, ‘구슬’을 쓰긴 하지만 여전히 ‘(소데)나시’, ‘와사비’, ‘찌라시’ 등의 일본어를 그대로 쓴다. 이는 전적으로 어른들이 말이 맑지 못한 탓이다.
아이들은 일본어의 찌꺼기로부터 자유로워지긴 했다. 그러나 그 자유가 제한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아이들은 새로운 한글세대로 우리 세대와는 다른 언어 감각과 이해력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삶과 무관하게 만들어진 낯선 한자어를 잃어버리는 대신 아이들은 새로운 외래어인 영어와 훨씬 친숙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연히 아이들의 어휘력을 확인하면서 입시경쟁에 묻힌 아이들에게 책을 읽지 않는다고 나무라기도 쉽지 않다는 걸 깨닫는다. 어쩌면 아이들의 어휘력 부족은 아예 ‘쓰기’가 실종해 버린 국어교육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2009. 6. 3.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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