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양(仕樣) → 품목, 설명, 설명서’
어저께 출근하다 길가의 풍선 간판을 읽다 말고 실소했다. 어떤 피시(PC)방 앞 인도에 세워놓은 풍선 간판에 ‘구미 최고 사향’이란 글귀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건 ‘사양(仕樣)’을 잘못 쓴 게 틀림없었는데, 문득 일본식 한자어 사양은 이미 ‘품목(品目)’ 등으로 순화되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사양은 일본어 ‘시요(しよう.仕樣)’를 우리말로 읽은 것이다. <표준국어대사전>의 ‘사양’ 풀이는 “설계 구조. ‘설명’, ‘설명서’, ‘품목’으로 순화”다. 순화어가 여럿인 것은 상황에 맞게 순화하면 된다는 뜻이겠다. 흔히 쓰이는 ‘선택사양’은 ‘선택 품목’으로 ‘(제품) 사양서’는 ‘(제품) 설명서’로 바꾸는 식으로 말이다.
풍선 간판의 ‘최고 사양’은 아마 ‘최신 제품’이라는 뜻으로 쓴 듯하다. ‘품목’이나 ‘제품 내용’으로 바꾸어 쓸 수 있겠는데 역시 대중들은 익숙한 걸 선택하는 게 편한 것이다. 하긴 사양이라는 말이 좀 쓰이는가 말이다. 그걸 무슨 전문용어처럼 쓰지만, 사실은 엉터리 낱말인 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나는 간판을 지나치면서 ‘사양’ 대신 ‘사향’을 쓴 사람은 가게 주인과 간판장이 가운데 누구였을까 잠깐 궁금했다. 두 번째 궁금증은 그리 쓴 사람은 자기가 잘못 썼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하는 거였다.
‘항문’ 대신 ‘학문’은 애교?
개인병원이 전문화되면서 ‘대장·항문’으로 특화한 외과도 많이 생겼다. 이들은 ‘대장 외과’, ‘항문외과’ 등으로 표기하는데, 아무래도 ‘항문’을 그대로 쓰는 게 좀 ‘거시기’한 모양이다. ‘항문’을 같은 발음의 ‘학문’으로 바꿔 쓰는 까닭이 거기 있다.
이 경우는 몰라서가 아니라 의도적 ‘오용’인 셈이다. 요즘은 항문에서 ‘문’자를 뺀 ‘항 외과’, ‘항 편한 외과’ 따위로도 쓴다. 쓴 사람뿐 아니라 읽는 사람도 그 의도를 알고 미소를 지을 테니 이 경우는 ‘언어생활 오도’의 혐의를 받기는 어렵겠다.
상품 이름도 잘못 쓰는 경우가 더러 있다. 빙과류 가운데 ‘설레임’이라는 상품이 있다. 알고 그랬는지 모르고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예 ‘雪來淋(설래임)’이라는 한자까지 붙여서 판다. 그러고 보니 사람들은 너나없이 이 ‘설레임’을 편하게 쓴다.
‘설레임’ → ‘설렘’이 맞다
어떤 가요 앨범 이름도 ‘설레임’이고, 펜션과 병원, 한정식집 등의 이름도 ‘설레임’이다. 그러나 이는 잘못 쓴 표현이다. 동사 ‘설레다’의 명사형은 ‘설렘’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잘못 쓰고 있는 ‘설레이다’는 ‘설레다’로 써야 맞다.
‘설레다’가 ‘설레이다’로 쓰이는 것은 ‘깃들다’와 같이 ‘깃들이다’가 쓰이는 맥락을 오해한 것일까. 그러나 ‘깃들다’와 ‘깃들이다’는 뜻과 쓰임새가 분명히 다르다.
같은 동사지만, ‘깃들다’가 “아늑하게 서려 들다. 감정, 생각, 노력 따위가 어리거나 스미다.”의 뜻인 데 반해 ‘깃들이다’는 “주로 조류가 보금자리를 만들어 그 속에 들어 살다. 사람이나 건물 따위가 어디에 살거나 그곳에 자리 잡다.”의 뜻인 것이다.
그래도 사람들은 의심 없이 ‘설레이다’를, 그리고 ‘설레임’을 쓴다. 그래서 ‘설렘’을 ‘설레임’으로 잘못 쓰고 있는 이들 상품은 언어생활 ‘오도’의 혐의(?)를 면하기 어렵다. 그러나 역시 우리말 바르게 쓰기는 올바른 언어생활을 의식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시민들 모두의 몫이다.
2015. 5. 23.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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