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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선산(구미) 이야기

다시 ‘북봉산’

by 낮달2018 2021. 5.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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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 뒷산, 북봉산

지난 주말에 아내와 함께 ‘마침내’(!) 북봉산에 올랐다. 가파른 우리 아파트 뒷길을 피해 이웃 아파트의 뒷길을 택했다. 조팝꽃이 하얗게 핀 산기슭을 오르자 평평하고 제법 널따란 등산로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 길은 매우 평탄하고 넉넉하게 산마루를 타고 정상으로 이어졌다.

 

대개 산이 그렇듯 북봉산은 소나무가 많은 산이다. 이 산이 4월부터 짙푸르러 보이는 것도 신록으로 옷을 갈아입는 잡목들 가운데서 소나무가 그 변함없는 푸른빛을 지켜주기 때문이다. 주말인데도 등산객은 생각만큼 많지 않았다.

 

한 시간 남짓 오르니 정자 하나가 나타났다. 산꼭대기에 정자를 세우는 것은 이 지역의 특징인 듯하다. 북봉산 정상이다. 해발 388m. 산악인들이 세운 빗돌 곁에 벽진 이씨의 한 종회가 세운 ‘북봉산의 유래’라는 안내판이 서 있다.

 

“성남촌(星南村)의 북봉산은 해발 405m 고지다. 조선조 광해군 8년(1616) 벽진인 이민선(李敏善, 1548~1626)은 가선대부 병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행 통훈대부를 지내고 낙남하여 정착한 곳이 멱우(覓于)골이며 현재까지 별남고을로 알려진다.

 

조선조 선조실록 1594년 2월 이민선은 임진왜란 때 성균관 대성전이 왜적들에 소실되자 이에 국난을 극복하려고 국왕에게 중수할 것을 상소하여, 국왕은 기꺼이 윤허를 내렸으며, 중수를 마친 후 난세를 떠나 이곳 북봉산 아래 성남촌으로 이주한 기록이다.

 

송자대전에 우암 송시열은 조선조 인조 12년 4월(1634) 영남으로 유람을 하게 된다. 우암은 동춘당 송준길과 함께 선산 성남촌에서 만나기로 한 기록에 성남촌으로 고증하고 있다. 이 사료적 근거로 보면 이민선의 아호(訝號)를 ‘북봉’이라 하고 뒷산을 ‘북봉산’(속칭 등골)이라고 한 명칭이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전하고자 하는 뜻은 알겠는데, 정말 요령부득의 안내문이다. 대부분 문장이 비문이고 북봉산의 높이도 공식 기록과는 차이가 있다. 아호에 쓴 한자도 틀렸다. ‘雅號(아호)’가 아니라 ‘訝號’로 써 놓았는데 ‘아(訝)’는 ‘맞을 아’다. 혹시 그렇게도 쓰는가 싶어 찾아봤으나 없다.

 

우리 동네 아랫마을을 ‘별남마을’이라고들 하더니 그게 조선조 광해군 때의 문인 이민선이 마을에 정착할 때부터 써 온 오래된 이름인 모양이다. 안내판의 문맥은 이민선의 아호로 ‘북봉산’으로 부른 듯하지만, 사실은 이민선이 마을 뒷산의 아름을 따 아호로 삼은 것으로 보는 게 맞다. 사람보다 산이 먼저 있었을 터이니 말이다.

 

정자에서 물로 목을 축이고 잠시 쉬다가 바로 하산했다. 가파른 아파트 뒤쪽으로다. 정상에서 도시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데 날씨가 맑은데도 시가지는 흐릿하게 보인다. 어느 날부턴가 하산이 더 힘들어졌다. 가파른 하산길은 무릎 관절에 부담을 주기 때문이다. 다음부터 오른 길을 되짚어가자고 아내와 약속한다.

 

산을 거의 다 내려올 때쯤 소나무를 타고 있는 청설모 한 마리를 만났다. 녀석은 사진기를 피해 요령 있게 이 나무 저 나무를 오르내렸다. 산 중턱에 이르니 찔레꽃이 지고 있었다. 끝물이라 지저분해 보이지만 기실 이 흰 꽃의 기품은 놀랍다.

 

쉬엄쉬엄 오르긴 했지만 대체로 두 시간 남짓이 걸렸다. 냉면 생각이 간절해져 딸애를 불러 인근 냉면집에 가서 냉면을 먹었다. 날씨 탓일까, 손님이 꽤 많았다. 겨자를 좀 낫게 쳐서 좀 맵게 먹었다. 돌아오면서 아내와 다음 주에도 오르자고 약속을 했지만 글쎄, 언제쯤 다시 이 산에 오를 수 있을지….

2012. 5. 27.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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