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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교단(1984~2016)에서

5·10 ‘교육 민주화 선언’ 22돌, 역사의 퇴행 앞에서

by 낮달2018 2024. 5.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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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학생, 학부모를 교육 주체로 - 교육 민주화 선언

▲ 박재동 만평(1988.5.28) ⓒ 한겨레 그림판

오늘은 한국 YMCA 중등교육자협의회(회장 윤영규)의 ‘교육 민주화 선언’ 스물두 돌을 맞는 날이다. 오늘은 이른바 ‘놀토’, 늦은 아침을 들고 ‘교육 민주화 선언문’을 다시 읽는다. 1986년 5월 10일이었다. 나는 그때 경주 지역의 한 여학교에서 초임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도대체 그런 움직임이 있었다는 것조차 알지 못했던, 날마다 술을 마시며 동료들과 비분강개하던 시절이었다. [관련 글 : 참 스승 윤영규, ‘교육 민주화 선언스물세 돌]

 

교육 민주화 선언은 “1986년 5월 10일, 서울·부산·광주·춘천 등 4개 지역의 교사들이 YMCA 중등교육자협의회 주최로 열린 제1회 ‘교사의 날’ 집회에서 발표한 교육의 민주화에 관한 선언”(엠파스 백과사전)으로 풀이된다.

 

당시는 대통령 직선제로의 개헌으로 정치적 민주화를 이룩하려는 국민적 열망이 높았고, 대학 교수들의 민주화 시국선언이 이어지는 등 각계각층의 민주화운동이 활발히 전개되던 때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감행된 이 선언은 ‘민중교육지 사건’ 이후 더 높아진 교육 민주화운동에 대한 의지를 모은 것이었다.

 

선언문의 문안을 무심하게 훑어보다가 나는 교육 민주화를 위한 최소 요구 조건에서 시선을 고정한다. 알려진 대로 그것은 다섯 개 항으로 정리되어 있다.

 

①교육의 정치적 중립성 보장

② 교사의 교육권과 제반 시민적 권리와 학생·학부모의 교육권 보장

③ 교육행정의 비민주성·관료성 배제와 교육의 자율성 확립을 위한 교육자치제의 조속한 실현

④ 자주적인 교원단체의 설립과 활동의 자유는 전면 보장

⑤ 정상적인 교육활동을 저해하는 비교육적 잡무 제거와 교육 파행을 심화시키는 강요된 보충수업과 비인간화를 조장하는 심야 학습 철폐

▲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창립 (1989.5.28.)

교육민주화선언 발표 5일째인 5월 15일, 참여 교사에 대한 정부의 징계방침이 떨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정부의 징계방침은 신일고 등에서 일어난 교사들의 반발과 학생의 연좌 농성, 방통대 교수들의지지 성명, ‘민주교육실천협의회’의 지지 호소 등 압박으로 경징계로 바뀐다. 결국, 정부는 주도 교사 5인에 대한 경징계로 마무리되었다.

 

그로부터 20년, 강산이 두 번 변한다는 세월이 흘렀다. 대통령 직선제 헌법의 쟁취 이후 여러 곡절을 거치긴 했지만, 민주적 정권교체 등 가시적 민주화의 과정은 눈부시게 진행되었다. 형식적으로 그때 제기된 요구는 일정 부분 실현된 것으로 이해해도 좋을 듯하다.

 

학교 자치가 여전히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는 점을 제외하면 교육자치제도 괄목할 성취를 보였고, 노동삼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는 불완전한 형태지만 자주적 교원단체로서 교원노조가 설립되어 합법화되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항목에서 절규하듯 제시된 ‘강요된 보충수업’과 ‘심야 학습’ 등은 여전히 이 밀레시엄 시대, 우리 고교의 초상이다. 새 정부는 ‘학교 자율화’라는 이름으로 ‘사교육’을 살리고 ‘학교의 학원화’와 ‘학생 건강권 포기’를 차근차근 실천(?)해 가고 있다.

 

▲ 단식 농성 중인 정진화 위원장

전교조의 정진화 위원장은 청와대 앞에서 현재 보름째 단식 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그는 “20여 년 전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다’라고 절규하며 죽어간 어린 제자들 앞에서 부끄러움과 참회의 마음으로 전교조의 참교육운동이 시작됐다”라고 회고하면서 “그러나 지금 우리는 학교 교육을 20년 전으로 되돌리려는 이명박 정부의 교육 정책 앞에서 또다시 참담한 마음으로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다”라며 고통스러운 심경을 밝혔다.

 

전교조의 참교육운동에서 가장 대중적인 호소력을 발휘한 대목이 ‘아이들이 죽어간다. 참교육으로 아이들을 살려내자’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것은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며 스러져 간 아이들의 죽음 앞에 선 교사들의 고통스러운 자기 확인이기도 했다.

 

교육 민주화 선언 스물두 돌을 맞으면서 다시 그 이전 시대로 학교 교육을 되돌리려는 정부의 전도된 교육 정책 앞에서 지금 전교조와 교사들은 들메끈을 고쳐 신고 있다. 그것은 이것이 단순한 물리적 시간의 퇴행이 아니라 역사의 퇴행이고 한편으로 미래에 대한 부정이라는 걸 그들은 알고 있기 때문일 터이다.


교육 민주화 선언문



학생들과 함께 진실을 추구해야 하는 우리 교사들은 오늘의 참담한 교육 현실을 지켜보며 가슴 뜯었다. 영원한 민족사 앞에 그 책임의 일단을 회피할 수 없음을 통감하게 된 우리는 더 이상 강요된 침묵에 머무를 수 없다는 결심에 이르렀다. 우리 교사들을 믿고 따르는 학생들의 올곧은 시선은 도도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방관자로 남아 있는 우리를 더없이 부끄럽게 만든다. 이제 우리는 맹랑한 꼭두각시의 허무한 몸짓을 그만 그쳐야 한다.

우리 앞의 저 학생들이야말로 이 민족의 미래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기성세대의 탐욕과 허위, 좌절과 패배주의가 저들을 병들게 하고 있음을 주목하자. 이 같은 부정적인 현상은 특정 세력의 허용과 독선에 바탕한 비민주적 사회와 이에 종속되어 학생들에게 비판적 안목과 문제해결 능력을 길러주지 못하는 비민주적 교육에서 비롯됨을 직시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요원의 불길로 타오르는 민주화의 열기는 역사의 필연이며 각 부분의 민주화는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대세가 되었다. 교사들이 주체적으로 이루어야 할 교육 부문의 민주화는 사회 전체의 민주화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교육의 민주화는 사회의 민주화의 토대이며 완성이기 때문이다.

돌이켜보건대 해방 이후 우리의 교육은 전 민족의 노예화를 획책하던 일제 군국주의 교육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채 시류에 따라 부침한 정치 권력의 편의대로 길들여진 충직한 시녀로 전락하였다.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은 누더기 같은 헌법 속에 그나마 사문화된 채 보장받지 못했고 식민지하에서 구조화된 교육행정의 관료성과 비민주성은 온존되어 왔다.

그 결과 민족운동의 중요한 몫을 담당하였던 교사들은 국민의 교사가 아니라 극도로 통제된 관료기구의 말단으로 떨어졌고 교직은 성직이란 미명 아래 점수 매김과 서열 짓기에 급급한 사이비 교육의 굴레 속에서 무조건적 희생을 강요당했다. 참다운 교육을 위한 교사의 주체적이고 창의적인 노력과 자율성은 배척되고 있다.

힘써 진리를 탐구하고 심신이 건전한, 인간미 넘치는 공동체의 성원으로 자라야 할 학생들은 열악한 교육환경 속에서 비정한 점수경쟁과 물질 만능적 상업주의 문화의 홍수에 시달리며 고통스럽게 방황하고 있다. 비민주적 교육 현장은 일방적으로 선정된 경색된 가치만을 학생들에게 주입할 뿐 민주시민의 자질을 함양할 기회를 제공하지 못한다.

모순에 찬 사회구조와 국민의 요구를 올바르게 충족시킬 수 없는 교육제도로 말미암아 갈피잡지 못하고 있는 학부모들은 문제의 본질을 파악할 여유도 없이 당면한 과열 경쟁 속에 자신과 사랑하는 자녀의 인간다운 삶을 저당 잡혔다.

산적한 교육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 당국의 행정력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인가. 그것이 전혀 가능하지 않음은 이미 증명되지 않았는가. 조령모개가 한국 교육 정책의 대명사로 된 지 오래이다.

교육의 주체인 교사․학생․학부모가 소외된 상태에서 추진되는 이른바 교육개혁이란 기술적이고 지엽적인 절차상의 손질일 뿐, 진정한 의미의 개혁이라 할 수 없다. 그것은 국민에게 또 하나의 환상을 심어줄 뿐이다.

교사, 학생, 학부모를 교육 주체의 자리에 확고하게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바로 교육 민주화의 첫걸음이다. 이에 우리는 교육의 민주화를 위한 최소한의 조건을 천명하는 바이다.
 

1. 헌법에 명시된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은 실질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 교육은 정치에 엄정한 중립을 지켜 파당적 이해에 악용되어서는 안 된다.

1. 교사의 교육권과 제반 시민적 권리는 침해되어서는 안 되며 학생과 학부모의 교육권도 최대한 보장되어야 한다.

1. 교육행정의 비민주성, 관료성이 배제되고 교육의 자율성이 확립되기 위해 교육자치제는 조속히 실현되어야 한다.

1. 자주적인 교원단체의 설립과 활동의 자유는 전면 보장되어야 하며, 이에 대한 당국의 부당한 간섭과 탄압은 배제되어야 한다.

1. 정상적 교육활동을 저해하는 온갖 비교육적 잡무는 제거되어야 하며, 교육의 파행성을 심화시키는 강요된 보충수업과 비인간화를 조장하는 심야 학습은 철폐되어야 한다.

                                                                                 1986.5.10. 한국 YMCA 중등교육자협의회

 

2008. 5. 10. 낮달


교육 민주화 선언, 37년 후

 

윤석열 정부 들어서면서 우리 사회의 여러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퇴행’에서 교육도 예외는 아니다. 지난해 이명박 정부 시절 도입됐다가 수업 파행 등 각종 부작용을 낳고 폐지된 국가 수준 학업성취도 전수평가(일제고사)가 이름만 달리해 5년 만에 사실상 부활했다.

 

이에 발맞추어 12월 8일, 서울시의회 국민의 힘 소속 의원들이 중심이 되어 기초학력지원조례(안)을 발의했다. 이 조례(안)는 학기 초 각 학급, 학교에서 진단평가를 보고 그 결과를 공개할 것과 결과 공개를 위해 노력한 학교와 교사를 포상하는 것이 중심이다.

 

이 조례안은 올해 3월 10일 서울시의회를 통과했고, 4월 3일 서울시교육청(교육감 조희연)이 재의를 요구했다. 서울시교육청은 “외부 기관에 법률 자문을 의뢰한 결과, 기초 학력 보장에 관한 사무는 ‘기초학력보장법’과 같은 법 시행령에 따른 국가 사무로 조례의 제정 범위에 속하지 않는다고 판단된다”라고 밝히면서 “기초 학력 진단검사의 지역·학교별 결과 등을 공개할 수 있다고 규정한 것은 ‘교육관련기관의 정보공개에 관한 특례법’ 위반의 소지가 있다”라는 것 등으로 재의 요구 배경을 설명했다.

 

이에 서울시의회는 5월 3일, 해당 조례를 재의결했다. 재의결 중단을 촉구해 온 서울지역 교육 시민사회단체는 기초 학력을 핑계로 학생들의 성적을 공개하는 조례는 일제고사 부활과 사교육비 폭등으로 이어질 것이라며 서울시의회의 강행을 규탄했다. [관련 기사 : 교육 시민단체, ‘서울시의회 기초학력지원조례 재의결 ’규탄]

 

이명박 정부 때인 2008년 도입된 일제고사는 학교를 서열화하고, 교사와 학교, 교육청에 돌아가는 경제적 보상을 결정하게 되면서 일선 학교들은 학습 부진 학생들의 학력을 끌어올린다는 본래 목적보다 ‘성적 낮은 학생 없애기’에 집중했다. 교육청이 성적을 조작하거나 교사가 부정행위를 유도하기도 했다. [관련 글 : 일제고사’ 1등의 시골 학교는 어떻게 되었나]

 

그러나 일제고사는 2017년 부활한 지 9년 만에 사실상 폐지되었다. 그런데, 윤석열 정부에서 이 실패한 정책을 다시 되돌리려고 하는 것이다. 게다가 서울시의회의 조례는 모든 학교와 학생을 성적순으로 줄 세우기를 하겠다는 것이다.

 

1986년은 쿠데타로 집권한 신군부의 독재와 억압 아래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아이들이 죽어가던 시절이다. 교사들이 들어 올린 교육 민주화의 횃불이 기존의 교육 모순을 극복하는 첫걸음이었지만, 37년 만에 역사는 퇴행하는 것일까.

 

 

2023. 5. 10.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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