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길 위에서

참 스승 윤영규, ‘교육 민주화 선언’ 스물세 돌

by 낮달2018 2020. 5. 10.
728x90

윤영규 선생과 교육민주화 선언

▲ 1990년 벽두에 윤영규 선생님에게서 받은 봉함엽서. 발신지는 서울구치소다.

오늘은 5월 10일, ‘교육 민주화 선언’ 스물세 돌을 맞는 날이다. 서울·부산·광주·춘천 등 4개 지역의 교사들이 YMCA 중등교육자협의회 주최로 열린 제1회 ‘교사의 날’ 집회에서 ‘교육 민주화 선언’을 발표한 1986년 5월 10일로부터 스물세 해가 지났다는 뜻이다. [관련 글 : 5·10 ‘교육 민주화 선언’ 22, 역사의 퇴행 앞에서]

 

교육민주화선언과 윤영규 선생


우리 집에 걸린 달력 중에 유일하게 전교조에서 낸 달력에만 이날이 기록되어 있다. 교회에서 발행한 달력엔 ‘어버이 주일’로, 인터넷 서점과 교과서·참고서를 펴내는 굴지의 출판회사에서 낸 탁상달력에도 오늘은 ‘기념’되고 있지 않다. 그게 2009년 현재, 교육 문제를 바라보는 우리 사회 관심의 표지이며 동시에 지난 20여 년 동안 꾸준히 진행되어 온 교육운동의 현주소일지도 모르겠다.

 

딱히 오늘 때문은 아니었다. 한 일주일 전쯤에 나는 <윤영규>를 읽었다. ‘윤영규’라면 아마 이 땅의 교사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이름일지도 모르겠다. 윤영규는 한 개인을 가리키는 고유명사였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것은 참교육과 전교조를 아우르는 보통명사처럼 쓰여 왔다.

 

▲봉함엽서의 안쪽. 검열필 도장이 선명하다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펴내는 ‘시대의 불꽃’ 시리즈 열여덟 번째 책인 <윤영규>를 구입한 것은 전적으로 우연이다. 나는 창비에서 낸 공선옥 소설집 <나는 죽지 않겠다>를 찾다가 같은 작가가 쓴 <윤영규>를 발견했고 망설이지 않고 그것을 장바구니에 넣었기 때문이다.

 

윤영규(1935~2005)는 내 삶에서 아주 먼 이지만, 내 삶에 가장 긴밀히 이어진 분이다. 그는 의례적 수사로서가 아닌, 실체로서 나와 ‘동시대인’이었고, 우리는 같은 신념과 생각으로 한 시대의 공기를 공유했다. 그는 나 따위의 애송이 교사와는 비교할 수 없는 민주화 운동의 투사였고, 참교육, 교육운동의 고결한 지도자였다.

 

그가 전국교사협의회의 초대회장(1987)이 되었을 때 나는 겨우 교육운동에 간신히 눈을 뜨고 있었다. 1989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 창립과 함께 그가 초대위원장이 되어 현직에서 파면·구속되었을 때 나는 근무하고 있던 고교에서 쫓겨났다.

 

서울구치소에서 온 윤영규 선생의 답신

 

그해 말, 어느 해고자 연수에선가 옥중의 위원장에게 편지를 쓰는 순서가 있어 나는 그에게 짤막한 편지 한 통을 썼다.

 

이듬해 1월 초에 나는 뜻하지 않은 그의 답신을 받았다. 혹시나 해서 찾아봤더니 그 답신은 내 서랍의 묵은 편지뭉치 속에 남아 있다. ‘안양, 90.1.9.’ 소인도 분명한 그 봉함엽서는 경기도 의왕시 포일동, 서울구치소에서 온 것이었다. 뒤집어 안을 보니 ‘검열필’의 도장이 상기도 선명하다.

 

의례적인 인사에 이어 선생은 편지 속에서 그렇게 썼다. “선생님과 저는 서로 만나 차 한 잔 나누지 못한 처지이지만 뜻이 같고 생각 같아서 지향하는 바가 같아서 전혀 낯설지 않고 친형제처럼 따뜻함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렇다. 그러고 보니 선생은 1992년에 세상을 떠난 내 맏형님 또래다.

 

그는 오랫동안 민주화 운동에 종사해 온 대표적 활동가였고, 나는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하던 풋내기였다. 차 한 잔은커녕 따뜻하게 인사 한번 나누지 못한 사이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는 전교조 초기의 어려운 시절을 온몸으로 견뎌내며 민주주의와 참교육을 꿈꾸었던 후배 교사들의 든든한 방패가 되어 주었다.

 

무명 소졸이 바라보는 장수란 어떤 뜻에서는 ‘실체’가 아니라 ‘이미지’일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그게 설사 이미지에 그친다고 하더라도 ‘윤영규’를 경의 없이 이르지 못한다. 개인적으로 그를 알지 못하지만 나는 그가 상징하는 저 8, 90년대의 열정과 희망 앞에서 온몸을 떨었었다. 그는 전방위적 탄압 속에서도 우리의 신념과 열정을 지켜 준 그늘 짙은 나무였다.

 

나는 ‘전기’ 따위는 잘 읽지도 사지도 않는다. 그게 쓰인 속내야 너무 뻔한 일인 까닭이다. 그런데도 내가 <윤영규>를 산 것은 나이 들어가면서 몽환처럼 보낸 내 젊음의 한때를 함께 했던 운동가의 삶을 들여다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거기서 만나는 그의 여정 속에 숨어 있는 내 삶의 파장을 찾아보고 싶어서였다.

 

<윤영규>를 읽으며

 

당연히 나는 별로 기대하지 않고 <윤영규>를 폈다. 그러나 나는 단숨에 책을 읽어 치웠다. 무엇이 그렇게 나를 빨아 당겼던 걸까. 앞서거니 뒤서거니 그 시대에 우리가 꿈꾸고 이루었던 희망과 투쟁 탓이었을까. 나는 잠깐 마음의 동요를 느끼긴 했지만, 거의 들뜨지 않은 차분한 기분으로 책을 읽었다.

 

책의 부제는 ‘교사를 가르친 교사, 우리 시대의 참 스승’이다. 어떤 이들의 삶은 그 자신의 것만이 아니라 한 시대를 같이한 이들의 것이기도 하다. 윤영규는 그런 사람 중의 하나다. 작가가 등단작 <씨앗불>을 발표하고 나자 고맙다고 전화를 걸어와 불고기 백반을 사준 윤영규와 작가의 인연이 이 책을 낳았던가.

▲ 1986년 5월 10일, 교육민주화 선언에 참여한 교사들

 

책은 윤영규의 삶을 세 시기(선생 윤영규, 시민 윤영규, 스승 윤영규)로 나누는데 이는 윤영규의 삶을 압축적으로 반영해 준다. 시시콜콜 속 내용을 모두 들 필요는 없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가난과 싸우고 벗하면서 교회와 공부를 놓지 않은 청년 윤영규는 맨 처음 선생이 되었다. 그는 거기서 부패한 사학과 맞서 싸우면서 학교에서 쫓겨나기도 하면서 평범한 교사가 되는가 했다.

 

그러나 대학 시절, 4·19 혁명 때 ‘대학생 수습원’으로 활동했던 윤영규는 유신 시대를 거쳐 80년 5월 광주항쟁에 참여하면서 ‘시민’으로 태어난다. 그는 내란·소요죄로 7개월간 복역한 뒤, 복직해 YMCA중등교육자협회의 창립을 주도하면서 그예 ‘스승 윤영규’로 거듭나게 된다.

 

‘시대의 스승’ 윤영규

 

1986년 5·10 교육민주화선언과 전국교사협의회장을 거쳐 초대위원장으로 1989년 5월 28일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창립을 주도한 윤영규는 두 차례 파면·구속되는, 형극의 길을 걸었다. 이후 민주쟁취국민연합 공동의장 등의 활동을 거치면서 그는 ‘시대의 스승’이 된 것이다.

 

전교조가 합법화된 것은 1999년, 창립된 지 꼭 10년 만이다. 1994년에 이미 복직했던 우리는 당연히 환호했지만, 숱한 고비를 넘긴 윤영규에게 그것은 어떤 의미였을까. 그는 광주충장중학교로 복직했고 이듬해 정년 퇴임했다. 2005년 3월의 마지막 날, 윤영규는 외출에서 돌아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70세. 누리기보다 겪은 세월이 많은 간난의 삶이었다.

 

책을 모두 읽고 나는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역사의 진보와 발전에 대한 믿음은 현재의 고통을 감내하게 한다. 그러나 역사는 반드시 순류(順流)만을 보여주지 않는다. 엊그제 신문에서는 우리 아이들의 주관적 행복감이 OECD 국가 중 최하위라는 소식과 경제자유구역에 들어서는 외국 교육기관이 ‘과실 송금’을 할 수 있게 하는 이른바 ‘교육 서비스 선진화 방안’이 발표되었다고 전한다.

▲ 윤영규 선생. ⓒ 시민의 소리

사실상 ‘공교육을 통한 돈벌이’를 가능케 하는 정책이 ‘선진화’란다. 이는 ‘교육 영리화’ 또는 ‘교육 민영화’의 신호탄으로

볼 수밖에 없다는 우려가 나오는 까닭이다. 현 정부 들어 가파르게 시작된 교육 시장화 정책과 경쟁과 효율의 논리는 이미 공교육의 지형을 바꾸고 있다.

 

교육민주화 선언 23돌의 한국 교육

 

또 내국인 학생 비율을 정원의 30%로 완화하겠다는 계획은 ‘무늬만 외국 교육기관’이 될 공산과 함께 ‘고급 사교육 수요를 부추길 것’이라는 우려를 심각하게 제기한다.

 

국내총생산(GDP)의 0.1%로 OECD 평균의 1/5에 불과한 아동복지예산에 드러나는 사회의 구조적 무관심은 결국 ‘나라의 미래’라는 아이들의 불행감을 키웠다.

 

‘주관적 행복감’은 건강 만족도, 학교생활 만족도, 주관적 행복도로 구성된다. 조사에서 우리 아이들이 ‘행복하다’고 답한 비율은 55.4%로 평균(84.8%)에 크게 못 미쳤고, ‘건강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비율은 24.4%로 평균보다 10%포인트가량 높았다고 한다.

 

영어에 대한 압박감과 일제고사 등에 내몰리고 있는 아이들, 자살이 청소년 사망원인 2위라는 이 참담한 기록 앞에서 ‘주관적 행복감’은 어불성설이다. 최근 대통령은 ‘아이들이 공부에 시달리지 않도록 하겠다’고 했다는데 이 무한경쟁을 강요하는 교육 상황에서 그게 가능하기나 할까.

 

5·10 교육 민주화 선언에서 ‘최소한의 조건’으로 천명한 ‘학생과 학부모의 교육권 보장’이나, ‘교육의 파행성을 심화시키는 강요된 보충수업과 비인간화를 조장하는 심야학습’은 지금 어떻게 되었나. 일제고사 응시의 선택권을 보장한 교사들은 교단에서 쫓겨났고, 학생들은 여전히 입시 전쟁에 시달리고 있다.

 

4년 전 세상을 떠난 윤영규 선생을 떠올리면서 나는 우울하게 책을 덮는다. 역사의 진보와 발전에 대한 믿음은 결코 버릴 수 없다. 그러나 절망은 가깝고 희망은 멀고 아련하다. 나는 자신에게 되묻는다. 역사는 과연 제 물줄기로 흐르고 있는가. 언제쯤, 언제쯤 ‘스승 윤영규’는 이 땅의 시름과 모순을 잊고 편히 쉬실 것인가…….

 

 

2009. 5. 10. 교육 민주화 선언 23돌에 낮달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