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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교단(1984~2016)에서

서른넷 풋내기였던 나, 학교에서 잘리다

by 낮달2018 2024. 5.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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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전교조 대량해직 사태 …그  순수와 광기의 시대

▲ 1989년 5월 28일 역사적인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결성식이 열려 비합법 노조가 출범하였다.

단순 산술로 스물일곱 살 이상의 성인이라면 누구나 1988년을 겪었다. 그러나 그때 젖먹이였거나 어린애였던 이들에게 그 시절을 떠올리라는 것은 무리다. 그러나 그때 열 살 전후였던 이들에게는 단편적으로나마 그 시절을 기억하는 게 어렵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런 뜻에서라면 서른일곱 살은 ‘1988년의 기억’, 그 상한이 된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신에게 유리한 것 위주로 과거를 기억한다. 의식에 강하게 각인된 기억만 남기고 가치가 없다고 여기는 것은 보거나 들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다. 이른바 선택적 기억이다. 그러나 굳이 선택적 기억을 불러오지 않더라도 사람들이 저마다 가진 기억의 층위는 다양하다.

 

1988년 열등반의 추억

 

1988년을 서울올림픽이 열린 해로 기억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공통된 역사적 경험 때문이다. 그러나 개인사로 보면 그것은 처음 취직한 해가 되기도 하고, 딸아이를 낳거나 어떤 시험에 낙방한 때이기도 하다. 또 그것은 어머니가 돌아가시거나, 사랑을 잃은 시간 등으로 기억되기도 한다는 말이다.

 

내게 1988년은 올림픽보다는 학교를 옮긴 해로 기억된다. 초임 학교였던 여학교를 떠나 고향 인근의 남학교로 옮겼다. 나는 아이들이 지금도 부엌 깊은 집으로 부르는 낡고 비좁은 슬레이트집을 얻어 이삿짐을 부렸다. 방에서 재래식 부엌으로 나가자면 성큼 높은 시멘트 부뚜막을 내려서야 하는 집이었다.

 

옮긴 학교에서, 공부가 시원찮아 열등반에 내쳐진, 무력감과 분노를 제대로 삭이지 못해 날마다 사고를 저지르던, 여드름이 숭숭 나고 코와 턱밑이 거무스레한 열여덟 살 사내아이들을 만났다. 그 아이들은 자신들을 무기력한 수렁 속으로 내몰았던 제도의 피라미드, 그 정점에 내가 교사라는 권력으로 존재하는 걸 깨우쳐 준 내 스승이었다.

 

그러나 여리고 고분고분한 여고생들과 달리 거칠고 자기표현에 서툴 뿐 아니라 때로는 무작정 반항적이기도 한 아이들을 다루면서 나는 분노와 체벌을 자제하지 못했다. 아이들을 감화시키지 못하는 자신에, 아이들에 대한 내 애정을 곧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아이들 때문에 나는 날마다 좌절하곤 했기 때문이다. (관련 기사 : 문제아는 발길질과 따귀로내가 왜 이러지?).

 

그때, 학교는 마치 행복은 성적순이라는 교리를 강요하는 이교도의 사원 같았다. 거기서는 교육적 지도라기보다는 비행에 대한 응징에 가까운 무자비한 체벌이 일상처럼 반복되곤 했다. 체벌의 강도만큼 아이들의 일탈과 반항도 상승하는 학교 현장은 그 시대 교육적 모순의 집합처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았다.

 

그 좌절과 상처로부터 나를 구원해 준 것이 젊은 교사들 중심으로 이뤄졌던 평교사회 조직이었다. 내 절망은 다른 많은 교사의 절망이기도 했던 것이다. 우리는 각자의 고민을 나누면서 위로받았고 공동의 실천을 약속하면서 힘을 얻었다. 이미 1980년대 초반부터 신군부의 탄압을 뚫고 교육운동에 나선 활동가 교사들이 뿌려놓은 참교육의 씨앗이 소읍의 시골 학교에서도 싹을 틔운 것이었다.

 

나는 뜻을 같이하는 이웃 학교의 교사들과 함께 시·군 지역 교사협의회를 꾸렸고, ·도 교사협의회에참여하면서 그해 하반기를 정신없이 보냈다. 내 삶과 역할을 이해하고 그것을 실천하려 하면서 나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내 눈길이 부드러워지고 넉넉해졌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우리 반의 이른바 꼴통들과 화해했고 아이들은 담임의 서투름이 자신들에 관한 관심의 일부거나 그 과잉이라는 걸 받아들여 주었다.

 

이듬해 2, 학년 초에 만났던 아이들 50명은 한 명도 낙오하지 않고 3학년으로 진급했다. 헤어지고 나서야 아이들은 나를 만날 때마다 환한 미소로 직전 담임의 진정성을 추인해줬다. 녀석들과의 이별을 내 교직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작별로 여기는 까닭이 거기 있다.

 

1989, 노동조합법 개정안 통과와 거부권 행사

 

19876월항쟁 이후 가파르게 상승하던 제도적 민주화의 진전은 19893월 야3당 단일안으로 13대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노동조합법 개정 법률안으로 만개하는 듯했다. "6급 이하 공무원을 포함한 근로자는 노동조합을 조직하거나 이에 가입할 수 있고 단체교섭을 행할 수 있다. 단 현역 군인 경찰공무원, 소방공무원, 교정공무원은 그러하지 아니하다"라는 내용의 이 법안은 교직원노조의 결성과 활동을 금지한 공무원법사립학교법이 자동 폐기되는 효력을 지니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 전교조 참여 교사들은 아이들 앞에 실존을 고민하면서 부끄러움으로 자신을 돌아본 사람들이었다.

이 법안은 심의 전 국회 문공위원회와 서강대 언론문화연구소가 공동으로 실시해 발표한 여론조사에서 드러난 시대적 흐름을 반영한 것이었다. 교사와 교육전문가를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 교원노조 건설에 대해 교사 84.1%, 교육전문가 79.8%, 학부모 53.7%가 찬성한 것이다.

 

그러나 여당인 민정당은 교원노조 절대 불허의 방침을 밝혔고, 대통령 노태우는 이 법안에 대해 의심 없이 거부권을 행사했다. 결국, 국회에서 의결한 노동조합법 개정안이 보류되면서 대통령이 교원노조 합법화의 길을 막아버린 것이었다.

 

교원노조를 추진하는 교사들에 대한 정권의 전 방위적 탄압과 이들을 좌경용공으로 매도하는 수구언론의 왜곡 선전은 일일이 기록하지 못한다. 2015년 현재도 횡행하고 있는 매카시즘이 그 시절에 어떤 방식으로 작동했던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514, 심술궂은 비가 흩뿌리는 가운데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전교조 발기인대회가 베풀어졌다. 교육관료들의 감시 아래서도 교사들은 축제 분위기 속에 대회를 마쳤다. 당시 수원 창현고 교사였던 나희덕 시인(조선대 교수)은 대회에서 느꼈던 감동을 우산이라는 시로 노래했다.

 

그날까지 나의 우산은 질기고 질긴 것이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발기인대회

마치 앞날의 선명한 대결을 예고하듯

빗줄기 길게 지나가고

사이사이 돋는 햇살이 유난히 눈부시던 날,

소나기 내리칠 때이다.

어깨에 어깨 걸었던 우리들 위로

우산이 하나둘 펴지기 시작했다

빗줄기는 더욱 극성스러워지고

내 한 몸 가리기에 급급하다 보면

언제든 떠나갈 준비가 된 어깨였다, 우산이었다.

그러나 온몸으로 당당하게 비를 맞고 계신 선생님,

팔년 전 내가 나의 제자들만 했던 시절

나의 국어 선생님이셨던 그분이 / 이제는 단상에서 발기문을 읽고 계셨다.

검은 두루마기 빗물에 더욱 검어지고

전교조 발기문을 교과서 삼아

국어교사가 된 나를 다시 가르치시는 음성,

그 음성이 빗발보다 더 거세게  

햇살보다 더 뜨겁게 나의 우산에 내리꽂히던 날,

비로소 나의 우산이 무엇이었던가 보이기 시작하였다.”

 

  - 나희덕, ‘우산’( <뿌리에게> 창작과비평사, 1991)

▲ 1989년에는 교사들이 경찰들에게 끌려가는 풍경은 드물지 않게 볼 수 있었다.
▲ 참교육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교사들은 굴비처럼 엮여 경찰로 연행되기 일쑤였다.

 몇 명의 교사를 의식화 교육 관련 국가보안법으로, 또 몇몇 교사는 국가공무원법으로 구속하고, 핵심 간부들에게 사전 구속영장이 발부된 가운데 528,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은 어렵사리 창립대회를 열고 비합법 교원노조의 출범을 선포했다.

 

울며 기다리실 어머니

철모르는 어린것들을 생각할 때

남의 자식 바르게 가르치자는 일로 소홀했던 내 자식들도 생각합니다.

우리들이 가는 길의 길목 길목을 경찰이 막아선 시대

한 걸음만 앞서가면 오랏줄에 묶여가는 시대

이것이 이 시대에 태어난 우리들이 져야 할 십자가라서 피하지 않고 갑니다.

오랏줄이 기다리는 서울로 갑니다.”

 

    - 도종환, ‘서울행 버스중에서

 

지방에서 출발해 천신만고 끝에 그 역사적 현장에 당도한 이들도 있었으나 정작 나는 서울 근처는커녕 우리 지역을 벗어나지도 못했다. ‘오랏줄은 서울까지 가지 않아도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당일 아침, 지역의 동료들과 함께 상경하던 우리 전세버스는 인근 구미에서 전경 1개 중대에 차단당하고 만 것이다.

 

그리고 6월부터 전국에서 교원노조 참가자들에 대한 징계가 속속 이뤄졌다. ‘탈퇴각서한 장만 쓰면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그 종이 쪼가리 한 장을 못 써서 전국에서 1600여 교사들이 학교에서 쫓겨났다. 그때를 회고하면서 내가 그 시절을 집단 광기의 시대였다고 농을 하는 이유다. 그 길고 지루한 여름 내내 우리는 단식과 농성과 집회로 저항했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체포·투옥됐다.

 

그 여름의 끝 무렵인 8월 하순에 나는 같은 국어과 동료 한 명과 같이 소속 학교 법인에서 해임됐다. 마지막 징계위원회에 출석해 입장을 밝히고 허정허정 걸어 나오던 성 베니딕트 수도원의 후덥지근한 공기가 어제처럼 떠오른다. 냉담자(세례를 받았으나 교회에 나가지 않는 가톨릭 신자)였던 동료의 영세명이 베네딕트였고 우리의 해임처분에 서명한 이는 수도원의 주교였다.

 

부끄러움으로 자신 돌아보며 사람과 교사의 길배웠다

 

광기였든 순수한 열정이었든 간에, 우리의 선택이 부화뇌동이라 폄훼되기도 했지만, 그 시절에 우리는 모두 주역이었다. 모든 선택과 결정을 온전히 자신의 삶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해직 교사는 물론이거니와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쳐 각서를 썼던 동료들 모두가 자기 삶의 든든한 주인들이었다.

 

그들은 누구였나. 아이들 앞에서 자신의 실존을 고민했던 사람들, 부끄러움으로 자신을 돌아봤던 사람들이었다. 이어진 5년여 시간 동안 그들의 삶을 옥죄었던 고단한 삶조차 기꺼이 받아들였던 것은 흔들리지 않는 믿음, 자신의 선택과 신념에 대한 확신이었다. 그들과 함께한, 짧지 않은 세월 속에서 나는 사람의 길, 교사의 길을 배웠다. [관련 글 : 전교조에서 사람의 길, 교사의 길을 배웠다]

 

그리고 26, 그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다. 1994년 복직, 1999년 합법화, 2013년 이명박 정부의 노조 아님통보 이후, 법적 공방이 이어지면서 현재 전교조는 불안하지만 합법노조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적어도 전교조가 낸 법외노조 취소소송 항소심 선고가 이뤄지는 2016121일까지는[관련 글  :  그가 간 지 30……, 팩스 한 장으로 되돌려진 법외노조]

▲ 감옥으로 끌려가고 학교에서 쫓겨나는 교사들을 위하여 아이들도 집단행동에 나섰다.

흐른 게 어찌 시간뿐이랴. 1989년 여름, 학교에서 쫓겨난 경북의 동료 가운데 여럿이 이미 고인이 됐다. 정영상, 배주영, 황현자, 지송월, 정관, 채희성, 그리고 같은 지역에서 해직돼 활동을 함께하면서 형제의 정을 나눠왔던 장성녕도 7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 세상과 인간의 삶은 그리 공평하지 않다는 것만으로는 그 죽음들을 쉬 위로할 수 없다.

 

고단했던 해직 5년의 세월은 우리들 달력 속에서만 살아 있다. 그 잃어버린 세월을 현실이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난해 우리를 내쫓았던 성 베니딕트 수도원의 새 주교는 우리를 초대해 과거의 불행한 역사에 대해 위로하고 사과했다. 내 삶에 박힌 옹이와 매듭 하나가 풀린 셈이다. 고마운 일이다(관련 글 : 나의 전교조 25, 그 옹이와 매듭).

 

스물여섯 해 전인 1989, 혈기 방장했던 서른넷에 학교에서 쫓겨났던 풋내기 교사는 새해엔 회갑을 맞는다. 그리고 햇수로 꼬박 32년의 교단생활을 마감하게 된다. 나는 좀 지치고 심드렁해졌다. 내가 이 마무리를 혹성탈출’‘’이라 부르는 이유다[관련 글  :  31, 뒤돌아보지 않고 떠납니다]

 

매월 조합비를 내면서 유지되는 조합원 신분은 이제 두 달 후면 끝이다. 조직 활동을 떠난 지 오래되면서 가끔 나는 전교조가 나의 조직이 아닌 것 같다는 느낌에 낯설고 아득해지곤 한다. 그러나 쉽지는 않겠지만 성년의 전교조는 현재의 위기를 곧 극복하게 될 것이다. 정권은 짧고, 사람들의 삶과 노동은 영원할 것이기 때문이다.

 

 

 

서른넷 풋내기였던 나, 학교에서 잘리다

1989년 전교조 대량해직 사태... 순수와 광기의 시대

www.ohmynews.com

순전히 응답하라 1988’ 때문에 이 글을 썼다드라마가 대중의 사랑을 받게 되면서 <오마이뉴스>에서도 같은 이름의 기사를 공모했다나는 그걸 무심히 넘겼지만퇴직이 확정되면서 문득 1989년의 기억을 떠올렸고 그게 1988년과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서둘러 송고했지만공모는 이미 하루 전에 마감되었다.

 

이 글은 일반 기사로 아주 잠깐만 메인 면에 배치되었다한밤중에 오른 것을 확인했는데 다음 날 아침에는 그게 사라지고 없었으니까 말이다어차피 시의성과는 거리가 먼 기사였으니하고 생각하고 나는 우정 그걸 잊어버렸다.

 

기사공모에 응한 것은 그것도 이야기가 될 듯해서였지만 교직을 떠나기 전에 지난 시간을 정리하고 싶다는 의도도 있었던 것 같다글쎄써 봐야겠지만 떠날 때까지 그런 시간이 얼마간 필요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굳이 26년 전의 이야기를 되씹을 필요는 없다새삼 거기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까닭도 없다그런데도 그 시절을 소환한 것은 객관적으로 그때의 자신을 돌아보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받아들여 주시면 좋겠다.

 

 2016. 1. 3.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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