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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를 위해 생각을 매도해야 하는 사회가 무섭다”

by 낮달2018 2021. 4.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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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검열’을 강요하는 ‘불온’한 사회

▲ 〈아하! 한겨레〉(175호) 중에서 ⓒ 〈한겨레〉 PDF

‘불온(不穩)’의 사전적 의미는 “①온당하지 않음. ②(일부 명사 앞에 쓰여) 사상이나 태도 따위가 통치 권력이나 체제에 순응하지 않고 맞서는 성질이 있음.”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 말은 ②의 뜻으로 널리 쓰인다. 불온사상, 불온서적, 불온 학생, 불온 인사, 불온한 태도……, 등에서처럼.

 

‘불온’의 정치 사회학적 의미

 

‘불온’의 반대편에 ‘온건(穩健)’이 있음을 추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온건’의 뜻풀이는 ‘생각이나 행동 따위가 사리에 맞고 건실함.’이다. 그러나 그 속뜻은 ‘사상이나 태도 따위가 통치 권력이나 체제에 순응하고, 맞서는 성질이 없음.’으로 보는 것이 더 합당한 까닭도 거기에 있다.

 

‘불온’이 매도당하고 백안시되는 것은 ‘온건’이 그 사회의 주류고 모든 가치판단의 척도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새로운 생각과 이론을 배척하면서 자신의 가치관을 확대 재생산함으로써 현재의 기득권과 체제의 영속을 꾀한다. 그러므로 ‘불온’을 매도하는 사회는 닫히고 경직된 사회다.

 

그러나 불온은 그 자체로서 한 사회의 변화와 발전을 앞당기는 표지다. 유사 이래, 역사 발전과 진보를 표방한 견해와 사상 가운데 어느 하나 불온하지 않았던 것이 있었던가 말이다. 불온으로부터 개혁과 혁명이 비롯하였고, 인류 역사는 비약하면서 오늘에 이른 것이다.

 

유달리 한국 사회는 ‘불온’이 넘치는 사회다. 다른 나라에 비겨 불온한 가치관이 성하기 때문이 아니라 사회 모순에 대한 상식적인 비판이나 변화에 대한 열망 따위를 도매금으로 ‘불온’이라 매기는 사회기 때문이다. 비판적 생각을 가졌거나 개진했다는 이유만으로 많은 상식적인 사람들이 ‘비(非)국민’이 되거나 ‘불순세력’이 되는 사회가 한국 사회다.

 

미국산 쇠고기의 위험성에 대해 상식적인 의문을 품고 관련 정책에 대한 항의의 뜻으로 촛불을 든 사람들은 간단하게 ‘체제 전복을 꾀하는 불순세력’의 선동에 현혹된 우중이 되었다. 일본의 대지진으로 야기된 방사능 공포를 우려하는 평범한 주부도 졸지에 ‘불순 좌파’로 매도당할 수 있는 게 현실이다.

 

그러다 보니 ‘불온’은 자기 검열로 치닫는다. 혹시 내 의견이 ‘불온’으로 찍히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은 말길과 글의 길을 머뭇거리게 한다. 인터넷 실명제를 비롯한 여러 제도적 장치들이 제약하는 ‘표현의 자유’는 결국 이런 불온에 대한 자기 검열로 이어지는 것이다.

 

한 고교생의 자기 검열, 그리고 좌절

 

이 자기 검열은 기성세대에게만 국한되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아이들도 자기 검열에 맞닥뜨린다. <한겨레>에서 발행하는 시사 NIE 논술 주간지 <아하! 한겨레>(175호)에 실린 한 학생 수습기자의 글은 ‘불온’에 대한 자기 검열이 청소년에게도 이르러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한 외고 재학생이 쓴 이 글은 “나는 그날, 죽었다”라는 심상치 않은 제목을 달고 있다. 이 학생은 한 해 동안 학교에서 벌인 인성 계발 프로그램 강연을 포트폴리오로 정리하는 과정에서 특정 강연에 대한 비판적 의견을 개진했다. 그런데 이를 본 학부모가 “대학입시 때 제출할 포트폴리오에 교수들이 생각하기에 ‘체제에 반발하는 불온한’ 생각”은 불이익이 될지도 모른다고 충고하자 그를 따라 ‘얌전한 글’을 따로 썼다는 것이다.

 

이 학생은 ‘글을 쓴다는 것은 마치 아기를 갖는 것’과 같은데 불온 딱지가 붙을 것을 걱정해 이를 다시 쓴다면 ‘장애아가 태어날 것을 걱정해 낙태를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는 ‘대학이라는 곳에 들어가기 위해 기득권층에 동의하는 것처럼 보여야 하는 현실이 원망’스럽다고 고백한다.

▲ 〈한겨레〉의 시사 NIE 논술 주간지 〈아하 ! 한겨레〉

학생은 또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고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권리’는 존중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생각하는 바가 대학교수들이 좋아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신념을 저버리고 말았다’라면서 자신은 ‘죽은 것이나 다름 없다’고 자책한다.

 

학생은 ‘미래를 위해 생각을 매도해야 하는 이 사회가 무섭다’라고 말한다. 이어지는 그의 항변은 날카롭다. 그는 ‘사회에 발도 내딛기 전에 청소년들이 세상의 눈을 무서워해 자신의 의견을 꾸며낸다면, 그 사람은 물론, 그 사회까지도 썩게 한다’라고 주장한다. 그는 기득권층이 진보적 성향을 두려워하기보다 ‘다름’을 인정할 때 사회도 발전할 수 있다면서 글을 맺고 있다.

 

학생의 글을 읽고 나서 잠깐 망연자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기 눈으로 본 세상을 표현하고 비판하는 청소년의 시각까지도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우리 사회는 닫히고 막힌 것인가. 사회 일반의 ‘자기 검열’은 결국 고교생의 논리에까지 스며들고 있었다.

 

자기 의견이 가진 ‘불온성’ 때문에 장차 입을 불이익을 두려워하는 사회는 본의 아닌 ‘거짓’을 생산해 낸다. 입사 면접시험에서 대다수 응시생은 본인의 이념적 지향과는 무관한 시사 현안에 대한 의견을 거짓으로 주워섬긴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그 입사의 관문을 통과할 수 없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초청 강연 내용에 대한 비판적 이해와 인식을 기록한 포트폴리오가 장차 대학입시에서 불이익으로 돌아올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학부모의 두려움은 현실이다. 예측한 불이익의 실현 여부와 무관하게 그것은 우리 사회가 가진 폐쇄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표지다. 예의 두려움은 단지 부모의 ‘노파심’일 뿐이라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그런 학부모가 비겁하다고 비난할 수만은 없는 일이다.

 

이 아이에게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부모의 권유에 따라 예의 비판적 의견을 ‘얌전한 글’로 바꿔낸 이 고교생이 느낀 열패감과 좌절감은 또 어떤가. 그 아이에게 그런 현실적 불이익과 맞서라고 할 것인가. 아니면 그런 현실을 ‘우회하는 지혜’를 배우라고 현실과 타협하는 것도 역량이라고 강변할 것인가.

 

<한겨레> 4월 8일 자 ‘왜냐면’에는 이 학생에게 주는 충고의 글이 실렸다. 비슷한 상황을 겪은 올 대학 신입생이 쓴 이 글의 요지는 ‘절대 두려워하지 말라’다. 자신도 비슷한 고민을 했지만 흔들리지 않고 고비를 넘겼다는 것이다. 이 학생의 충고는 ‘지금 느끼는 불안함과 두려움에 항복해 글 속에 나타나는 자신의 가치관을 버리게 된다면, 앞으로의 삶 속에서 이와 비슷한 상황이 닥치면 똑같은 결정을 내리게 될 것’이라며 ‘먼저 자신부터 시작해 보는 것’은 어떻겠느냐는 권유로 끝난다.

 

‘먼저 맞은 매’를 거울삼아 이 학생은 후배에게 단호한 충고의 글을 남겼다. 그러나 정작 아이에게 답을 제시하여야 할 기성세대는 할 말이 없다. 미래를 위해 생각을 매도해야 하는 사회가 무섭다는 청소년에게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순전히 그 때문이다. 고교 1학년으로 보이는 이 학생의 자책은 실제 희망 대학에 포트폴리오를 제출하는 3년 후에는 어떤 모습일까를 헤아려 보는 것이 부끄러운 것은. 그것은 또 이 아이의 자책과 좌절 앞에 우리가, 이 사회가 져야 할 책임이 너무 무겁고 아프기 때문이다.

 

2011. 4. 11.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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