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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역사 공부 「오늘」

[오늘] 콜럼버스, ‘대서양 항해 탐험’ 첫 항해 출범

by 낮달2018 2019. 8.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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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공부 ‘오늘’]  1492년 8월 3일, 콜럼버스 ‘대서양 항해 탐험’ 첫 출범

▲ 신대륙에 상륙한 콜럼버스. 그러나 그의 신대륙 재발견은 우연한 행운에 불과했다 .

1492년 8월 3일,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 1451∼1506)는 산타 마리아(Santa María), 핀타(Pinta), 니나(Niña)호 등 세 척을 배를 이끌고 스페인 남쪽 팔로스(Palos)항을 떠나 ‘대서양 항해 탐험’의 첫 항해에 나섰다.

 

‘대서양 항해 탐험’ 출범

 

이탈리아 제노바 출신의 이 탐험가는 대서양 항해 탐험이 성공하면 기사와 제독 작위, 발견한 땅을 다스리는 총독의 지위, 얻은 총 수익의 10분의 1이라는 실현 가능성 없는 조건을 제시하여 1484년 포르투갈의 왕 주앙 2세를 설득하는 데 실패했다.

 

같은 조건으로 스페인의 이사벨 여왕도 설득하지 못했지만, 그는 운이 좋았다. 무엇보다도 정치, 지리, 종교적 통일을 이룩하고 국가의 비상을 꾀하고자 했던 이사벨은 포르투갈교회에 대한 경쟁의식으로 더 넓은 선교지가 필요했던 스페인 성직자들의 설득을 받아들여 콜럼버스를 등용했다.

 

콜럼버스의 선단이 현재의 바하마 제도(Bahamas)의 와틀링섬(추정)에 닿은 것은 10월 12일이었다. 이에 미국에서 10월의 두 번째 월요일을 국경일인 ‘콜럼버스의 날’로 정해 신대륙 미국의 건국과 번영에 헌신한 이탈리아계(系) 미국인들의 공헌에 감사하고, 이들의 희생을 기리고 있다.

 

콜럼버스는 이 섬을 산살바도르(San Salvador, 구세주의 섬)이라 칭하고 쿠바·히스파니올라(아이티, Haiti)에 이르러서는, 그곳을 인도 일부라고 생각하고 원주민을 인디언이라 칭하였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팔자에 없는 ‘인디언’이 된 이유다.

 

첫 항해 후 콜럼버스는 1492년 12월에 귀국하여 ‘신세계’의 부왕으로 임명되었다. 아메리카에서 그가 가져온 금제품이 전 유럽에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이듬해의 제2회 항해가 17척의 배와 1,500명의 대선단이 된 것은 그의 선전에 따라 금을 캐러 가는 사람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콜럼버스는 히스파니올라섬에 이사벨라 시(市)를 건설하는 한편, 토지를 스페인인에게 나누어 주고 인디언들에게는 공납(貢納)과 경작과 금 채굴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금의 산출량이 보잘것없자, 항해자들은 인디언을 학대·살육하고, 노예로 만들었다. 스페인으로 보낸 산물은 주로 노예였으며, 이 때문에 본국으로 돌아오자(1496) 그는 문책을 당해야 했다.

 

제3회 항해(1498∼1500)에서는 트리니다드와 오리노코 하구(河口)를 발견하였으나, 히스파니올라에서 내부 반란으로 그의 행정적 무능이 문제가 되어 족쇄가 채워진 채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이렇게 해서 콜럼버스의 시대는 사실상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제4회 항해(1502∼1504)에서 콜럼버스는 온두라스와 파나마 지협(地峽)을 발견하고 귀국하였다. 1504년에 이사벨 여왕이 죽은 뒤 그의 지위는 더욱 떨어졌으며, 직책의 세습까지도 인정되지 않았다. 1506년 콜럼버스는 자기가 발견한 땅을 여전히 인도라고 믿은 채 스페인 바야돌리드에서 54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콜럼버스가 서인도 항로를 발견함으로써 아메리카 대륙이 유럽인들의 활동 무대가 되었다. 그러나 스페인 사람이 신대륙 식민지 경영을 시작하면서 아메리카 대륙에는 엄청난 인명 살상과 전염병으로 인한 문명파괴 현상이 초래되었다.

 

신대륙? 2만5천 년 전에 이미 발견된 ‘구천지’

 

사실이야 어쨌든, 미국인들에게 공식적으로 콜럼버스는 ‘신대륙의 발견자’다. 이 이탈리아인(이탈리아 이름 콜롬보) 탐험가 덕분에 오늘의 미국이 있게 된 것이니 저들이 10월 두 번째 월요일을 국경일로 기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긴 하다.

 

그러나 이 탐험가는 2000년대 이후 ‘영웅’에서 ‘악당’으로 해석되면서 위상이 추락하고 있다. <에이피>(AP) 통신은 이러한 상황은 최근 몇 년 새 일어나고 있으며, 앞으로 미국 내 많은 지역에서 이날을 ‘기념’하려 들지 않을 것이라 보도하고 있다고 한다. [관련 기사 : 콜럼버스의 굴욕]

 

상황이 바뀐 이유는 간단하다. 상황은 ‘이미 원주민이 있었는데 어떻게 아메리카를 발견할 수 있느냐’는 근본적 물음과 맞물려 있다. 알다시피 아메리카 대륙은 2만5천 년 전에 얼어붙은 베링 해협을 걸어서 건넜던 몽골리안들에게 이미(!) ‘발견’된 ‘구(舊)천지’였던 것이다. 이들 몽골리안은 대륙 전역에 걸쳐 독자적인 문화를 꽃피웠다. 따라서 콜럼버스는 아메리카를 ‘재발견’한 데 불과하다고 보는 게 맞는 것이다.

▲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 1451~1506)

텍사스주에선 초등 5학년 때부터 ‘콜럼버스의 교환’을 배우기 시작한다고 한다. 이는 1492년 이래 대서양을 오간 유럽과 아메리카 사이의 광범위한 교류를 일컫는 말이다. 그러나 이는 유럽인들에게는 축복이었고, 원주민인 아메리카 인디언들에게는 끔찍한 불행이었다.

 

콜럼버스, ‘영웅’에서 ‘악당’으로

▲ 『살아 있는 미국 역사』(수수밭, 2008)

 

유럽인들은 신대륙에서 황금과 보물 등의 재화를 약탈했고 원주민 인구를 격감시킨 질병들을 신대륙에다 제공(?)했다. 이런 상황이라면 ‘교환’이란 표현은 사실(史實)에 대한 기만이라고 보는 게 마땅하다.

 

2009년 미국의 초등학교에서는 모의재판 등을 통해 콜럼버스에게 스페인 왕실을 빙자한 절도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하기도 한다. 바야흐로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이해를 통해 ‘개척 영웅 콜럼버스’라는 허상이 벗겨지고 있는 셈이다.

 

1492년 10월 12일에 이루어진 콜럼버스의 신대륙 재발견은 기실 ‘판단 착오가 가져다준 행운’이었다. 인도를 찾아 떠난 원정단은 최종 목적지의 1/4 정도를 항해했을 때, 유럽과 아시아 사이에 있는 미지의 대륙에 도착한 것이다. 콜럼버스의 재발견은 어쨌든, 서로 독립된 채로 발전해 온 두 세계가 접촉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콜럼버스가 처음 밟은 곳은 카리브해의 바하마 제도에 속한 섬이었다. 콜럼버스를 맞이한 것은 ‘환대’와 ‘공유’를 신조로 삼고 있었던 아라와크(Arawaks)족이었다. 그는 항해일지에 다음과 같이 썼는데, 이는 콜럼버스가 얼마나 부에 굶주린 사람이었는가를, 그가 원했던 것은 ‘황금’이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들은 우리에게 앵무새, 솜뭉치, 창 등 여러 가지 물건을 가지고 와서 유리구슬이나 방울과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을 바꾸었다. ……그들은 체격이 좋고 용모가 수려한 건장한 사람들이었다.

…… 무기를 알지 못하는 비무장 상태인 그들에게 칼을 보여주자 그게 뭔지도 몰랐던 그들은 칼날을 쥐다가 다치기까지 했다. 철을 사용하지 않았던 그들은 등나무로 창을 만들었다.

…… 그들은 좋은 노예가 될 것이었다. 우리는 50명의 병사만으로 그들을 정복하여 마음대로 부릴 수 있었다.”

    - 하워드 진 『살아 있는 미국 역사』(수수밭, 2008) 중에서

 

콜럼버스는 신대륙에서 ‘원하는 만큼의 황금’과 ‘원하는 만큼의 노예’를 갖고 가기를 원했다. 그리하여 1495년부터 대규모의 노예사냥이 이루어졌고, 황금을 바치지 못한 인디언들은 스페인인에게 무자비하게 살해당했다. 아이티에 있었던 25만 명의 인디언들은 2년 후에는 살해와 자살 등으로 그 수가 반으로 감소했다. 한 세기가 지났을 때 섬에는 아라와크 족이 단 한 명도 남지 않았다고 한다.

 

▲ 인디언 추장 포와탄 (Powhatan)

콜럼버스와 아라와크족의 비극은 계속 반복되었다. 스페인의 정복자 코르테스와 피사로는 멕시코 지역의 아스테카문명과 남미의 잉카문명을 파괴했다. 그러나 백인들을 바라보는 인디언들의 생각은 달랐다. 영국인들이 버지니아에 도착했을 때 그 지역의 인디언 추장 포와탄(Powhatan)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우리 부족 그 누구보다도 평화와 전쟁 간의 차이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어찌하여 당신들은 사랑으로도 충분히 얻을 수 있는 것을 무력으로 빼앗으려 하는가? 어찌하여 당신들은 먹을 것을 제공한 우리를 파멸시키려 하는가? 전쟁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어찌하여 당신들은 우리를 경계하는가?

우리는 무기도 들지 않았고, 당신들이 예의를 갖추어 대한다면 원하는 것도 기꺼이 내줄 것이다. 그리고 내 가족들과 함께 좋은 음식과 편안한 잠자리에 조용히 생활하면서 영국인들과 웃고 즐기며 동전과 도끼를 교환하는 것이, 영국인들을 피해 도망쳐 숲속에서 도토리나 풀뿌리 등을 먹고 추적을 당하며 춥고 불안한 생활을 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는 것조차 모를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다.”

- 하워드 진 『살아 있는 미국 역사』 중에서

 

아메리카, 유럽인에겐 축복, 인디언·흑인들에겐 저주의 땅

 

굳이 하워드 진의 저작을 빌리지 않더라도 517년 전 한 탐험 상인의 아메리카 발견이 결코 평화롭게 살아가던 원주민들에게 끔찍한 재앙이었다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인디언들은 농장의 강제 노동에도 동원되었고, 그들이 오랫동안 간직하였던 신앙 대신 성경이 스페인의 법률, 언어와 함께 강요되었다.

 

우리는 19세기 제국주의의 팽창기에 강대국들이 약소국들을 식민지로 만들면서 행했던 과정을 알고 있다. 15세기 아메리카 대륙에서도 같은 방식이 행해졌다. 스페인 정복자들이 새로운 정복지를 늘릴 때면, 먼저 성경과 신부가 도착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그들은 신이 내린 ‘성스러운 임무(mission)’로 간주하였다. 그 미션은 한 세계와 한 원주민의 부정 위에 세워진 기만과 살육의 과제에 지나지 않았다.

▲ 인디언 학살. 멕시코 북부지역에 살던 1천만 명의 인디언들은 유럽인의 이주 이후, 백만 명 이하로 감소했다 .

인디언에 대한 무차별 살육으로 모자란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해 유럽의 백인들은 인디언 대신 흑인 노예들로 채우기 시작했다. 아프리카 서쪽 해안 지대에 거주하던 이들 흑인은 납치되어 족쇄에 채워진 채, 노예선에 실려 신대륙으로 옮겨졌다. 약 6~10주간을 항해하는 동안 대부분 노예는 죽고, 살아남은 노예들은 경매 방식으로 주인들에게 배당되었다. 오늘날 신대륙의 흑인들은 이들 슬픈 아프리칸들의 후예인 것이다.

 

결국, 신대륙은 콜럼버스와 유럽인들에게는 축복의 땅으로, 인디언과 흑인들에게는 저주의 땅으로 세계사에 기록되었다. 오직 부를 축적하겠다는 유럽인들의 욕망은 살육과 착취, 억압과 강제의 방식으로 채워졌다. 신대륙의 세계사 편입은 약육강식의 법칙이 지배하는 악몽이었다.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에 발을 디뎠던 청교도들이 건설한 이상 국가로 자국을 이해했던 미국인들이 새롭게 저들의 역사를 이해하고 있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들이 자랑해 마지않는 서부 개척사도 운디드니 사건 등에서 드러나듯 야만적 살육과 착취의 역사,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최근 수십 년 동안 ‘콜럼버스의 날’이 상당한 논란을 빚고 있는 이유도 거기 있다. 아메리카 원주민을 중심으로 미국 사회 일각에서는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다는 주장에 반대한다. 그들은 ‘신대륙 발견’의 공로를 인정받아야 할 주체는 콜럼버스가 아니라 아메리카 원주민이라고 주장했다.

 

‘콜럼버스의 날’?, 아니! ‘아메리카 원주민의 날

▲ 미국 뉴욕의 센트럴공원에 있는 콜럼버스의 동상.

화해를 추구하는 의미에서 시민들은 주 정부와 지방정부에 아메리카 원주민의 날을 정식으로 지정하거나 콜럼버스의 날을 ‘아메리카 원주민의 날’로 대체하라고 청원했다. 일선 학교에서 ‘콜럼버스의 날’ 교육과정에 아메리카 원주민에 관한 내용과 유럽인과의 접촉에 따른 영향을 포함하기 시작했다.

 

현재 일부 주의 경우에는 콜럼버스의 날과 아메리카 원주민의 날이라는 명칭을 동시에 사용하고 있다. 그 외의 주들은 아메리카 원주민의 날을 별도로 지정했다. 사우스다코타주는 토착민을 기리는 뜻에서 공식적으로 콜럼버스의 날을 아메리카 원주민의 날로 대체했다.

 

영웅에서 악당으로. 콜럼버스의 위상이 추락하고 있다는 소식을 확인하면서 하워드 진의 『살아 있는 미국 역사』의 제1장 ‘신대륙 개척 신화에 가려진 진실’의 마지막 대목을 다시 읽어 본다. 그것은 이 야만의 세계사를 민중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한 진보 사학자의 역사관으로 이해해도 좋을 듯하다.

 

“콜럼버스를 비롯한 유럽인들은 야생의 세계에 도착한 것이 아니었다. 유럽과 다를 바 없이 번화한 곳도 있었다. 인디언들은 고유의 역사와 법률, 문학이 있었다. 그들은 유럽인들보다 훨씬 훌륭한 평등을 누리며 살고 있었다.

과연 ‘진보’라는 말에는 그들의 사회를 파멸시켜도 될 명분이 충분히 있는 것일까? 인디언들의 이러한 운명은 정복자나 지배자들의 이야기보다 훨씬 중요한 무언가가 역사 속에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 하워드 진 살아 있는 미국 역사 중에서

 

2019. 8. 2.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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