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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교단(1984~2016)에서

‘내복과 담요’, 학교의 겨울나기

by 낮달2018 2020. 1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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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운 학교, 내복과 담요로 겨울나기

▲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갖가지 빛깔의 담요 . 아이들이 이걸로 겨울을 난다 .

드디어 ‘내복’을 입다

 

어제 수능 감독을 하면서 올해 처음으로 ‘내복’을 입었다. 감독은 피하고 싶었지만 3학년 담임 빼고 수험생 학부모 빼고 하니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다행히 원한 대로 복도감독에 선정되었다. 2개 층에 세 명의 교사가 배치되어 각 고사장에 연락하거나 결시생을 파악하는 등의 업무를 맡는 자리다.

 

난방이 되는 고사장에 직접 들어가는 감독관이면 굳이 방한을 준비할 일은 없다. 그러나 내가 근무할 장소는 정작 볕이 나는 바깥보다 더 추운 복도다. 지난해에 편하다고 복도감독을 했다가 추위에 당한 동료 하나는 아예 손사래를 쳤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짧으면 80분, 길면 126분 동안이나 꼼짝없이 수험생들을 지켜봐야 하는 감독관보다 못하랴.

 

나는 아내에게 내일 입고 갈 내복을 챙겨달라고 부탁했다. 아내가 꺼내놓은 내복은 좋이 5, 6년은 된 것들이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오래된 것일지도 모른다. 지난 10년간 내가 내복을 입은 날수는 10일이 채 되지 않았을 테니까. 아내가 내놓은 내복은 제법 두꺼운 것이었다.

 

내복 바지를 입고 나니 든든했다. 수험생들 앞에 설 일이 없으니 굳이 양복을 입을 필요도 없다고 생각해서 편하게 두꺼운 겨울 점퍼를 입고 출근했다. 평년 기온이라고 했는데도 안개가 잔뜩 끼어 있었고 날씨는 여전히 쌀쌀했다.

 

복도가 춥긴 추웠다. 실내인데도 귀때기가 시렸다. 내복 입은 효과는 확실했다. 뺨이 시린 걸 빼면 나머지는 든든했다. 쉬는 시간에 교무실에서 쉴 때도 든든하기 이를 데 없었다. 오후가 되자 기온이 올라가면서 감독하기가 한결 나아졌다. 나는 오후 6시 5분 5교시까지 근무를 마치고 귀가했다.

 

오늘 아침, 나는 망설이지 않고 다시 내복을 입었다. 어쩔까 하다가 걸어서 출근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한 삼십 분가량 걷는 동안 나는 전혀 추위를 느끼지 않았다. 평소 같으면 가랑이 사이로 들어오는 한기를 성급한 발놀림으로 쫓으며 걸었을 터였다.

 

오전 근무를 마치고 나니, 아무래도 몸 움직이기가 좀 어둔하다. 아랫도리에 내복 하나 더 보탰는데도 그 착용감은 제법 부담이 되는 것이다. 애당초 내복 입기를 꺼린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추위로부터 몸을 보호하는 데는 내복 입는 것만 한 게 없다. 그러나 추위를 막는 대신 잃어야 하는 것도 있다.

▲ 조개탄 난로와 학교에 설치된 냉난방 시스템. 격세지감이 있긴 하다 .

내복 입기, 그 ‘실과 허’ 사이

 

몸이 둔해지는 건 사람에 따라 받아들이기 나름이다. 그러나 내복을 입으면 몸이 따뜻해지는 대신 마음도 좀 느슨해지는 느낌이 있다. 식후하고는 좀 다른 나른한 포만감 같은 게 생기면서 매사에 좀 굼뜨게 반응하게 되는 것이다. 그건 단순히 몸의 느낌이 아니라, 생각이 느슨해진 결과로 보는 게 맞다.

 

물론 이는 의도적으로 ‘편안’이나 ‘안온함’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는 내복을 입음으로써 느껴야 하는 불편과 바꾼 또 다른 불편의 하나다. 일부러 불러들인 것은 아니지만 적당한 추위는 정신의 긴장을 일정하게 유지하게 해 준다. ‘겨울 추위는 몸을 차게 하는 대신 생각을 맑게 해 준다’는 신영복 선생의 말씀은 옳고도 옳은 지적이다.

 

여전히 주변에는 난방비가 무서워 전기장판에 의지해 한겨울을 나야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들의 남루한 삶 앞에 내복 없이 나는 겨울을, 그 ‘찬 몸과 맑은 정신’을 이야기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그것은 따뜻한 일상과 잠자리마저 빼앗긴 그들의 고단한 삶에 대한 모욕이겠기 때문이다.

 

‘내복 입기’는 경제적 의미도 크다. 내복을 입으면 체감온도가 3도가 올라간다. 따라서 온 국민이 내복을 입고 난방온도를 3도만 낮출 경우, 국가적으로는 1조8천억 원의 난방에너지를 절약할 수가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에너지 중 97%는 수입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내복 입기’의 의미는 훨씬 커진다. 내복을 입으면 연간 이산화탄소 발생량도 약 2,400만 톤 줄일 수 있단다.

 

작년 이맘때, 청와대에서 시작된 대통령의 ‘내복 입기’ 권유도 이러한 경제적 의미를 주목해서 나온 것일 터이다. 경제적 효과가 작지 않은 내복 입기를 국가 원수인 대통령이 솔선해 실천하는 모습은 국민의 귀감이 될 수도 있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예의 뉴스를 전후해 일기 시작한 비판의 핵심은 그게 6·70년대 권위주의 시대의 모습을 답습하는 매우 우스꽝스러운 풍경이었다는 것으로 기억된다.

 

기사를 확인해 보니 당시에만 해도 행정안전부가 ‘대통령 명의의 선물로 전달할 수만 벌의 내복을 주문할 예정’이었고, ‘전국 자자체와 함께 범국민 내복 입기 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킬 계획’이었다고 한다.

 

글쎄, 이후 ‘범국민 내복 입기 운동’이 펼쳐졌는지 어떤지는 기억에 없다. 그러나 궁금한 것은 올해도 대통령을 비롯한 국무위원들이 착실하게 내복을 입고 있는지 어떤지다. 국무회의가 이루어지는 청와대의 회의실 실내온도도 궁금해지긴 마찬가지다.

 

교실, 이제 19세기는 넘었지만

 

30년도 전에 지어진, 단열 장치가 거의 안 된, 교사(校舍)에서는 아이들뿐 아니라 교사들도 겨울을 나기가 그리 쉽지 않다. 예전처럼 일정한 실내온도조차 유지하지 못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실내온도와 무관하게 책상 아래에 도사린 냉기를 몰아내기에는 여전히 첨단의 시스템 냉난방 장치로도 역부족이다.

 

내복을 입고 바라보자니 아이들이 안쓰럽다. 교복 치마를 입는 한 아이들이 내복을 입을 방법은 없다. 아이들은 스타킹으로 겨우 드러난 다리에 닿는 냉기를 차단할 뿐이다. 그러잖아도 남자아이와는 달리 예민한 여자애들이다 보니 교실에서도 얇은 담요를 뒤집어쓰거나 그걸로 무릎 아래를 덮고 지낸다.

▲ 아이들의 학교생활에서 담요는 이제 필수품이 되었다 .

교실은 그래도 양반이다. 과장하면 ‘한데보다 그리 낫지 않은’ 복도를 지날 때마다 온몸으로 달려드는 냉기는 겨울이 깊어질수록 예사롭지 않다. 아이들보고 담요를 치마처럼 휘감고 다니지 말라고 주의를 주면서도 요즘 날씨 같으면 아이들을 나무랄 수만은 없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 것이다.

 

물론 무쇠 난로에다 조개탄을 때거나 석유난로를 때던 시절에 비기면 학교의 21세기는 그래도 목하 발전 중이다. 난방 인심도 예전보다 훨씬 좋아졌다. 난로를 때는 문제로 학교장과 다투던 이야기는 책 한 권으로 부족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믿어질지 모르지만, 아직도 석유난로를 때고 있고, 병아리 눈물만큼만 기름이 지급되는 사립학교가 얼마든지 있다. ‘19세기 교실에서 20세기 교사가 21세기의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게 이 나라 교육의 초상이었다. 첨단(?) 시스템 냉난방 시설이 들어왔지만, 여전히 더위나 냉기를 시스템이 지배하지 못하는 교실은 이제 겨우 20세기에 턱걸이를 한 셈이라고 할 수 있을지.

 

자꾸 의식할수록 내복의 부담이 만만하지 않다. 쓸데없이 나는 내일 아침에는 내복을 입을까 말까를 고민해 본다. 내복을 입고 벗는 게 문제가 아니다. 지난해와 달리 유난히 두드러지게 느껴지는 추위가 어쩐지 켕겨져서다. 결국 추위 앞에 내 저항력이 지난해만 못하다는 사실을 이젠 꼼짝없이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아서다.

 

 

2010. 11. 19.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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