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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미디어 리포트

‘독자’와 함께 가는 길 - 한겨레, 오마이뉴스, 프레시안의 경우

by 낮달2018 2020. 1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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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와 함께하는 언론 매체들

▲ 프레시안이 실시하는 프레시앙 되기

한 보름쯤 전에 <프레시안>이 실시하는 ‘프레시앙 되기’에 참여했다. 나는 정해진 금액 중 최소액의 CMS 출금 자동이체에 동의했고 어제는 내 은행 계좌에서 첫 출금이 이루어진 것도 확인했다. ‘프레시안에서 FTA 광고를 그만 보고 싶지 않은가’라는 의견광고에서 시작된 <프레시안>의 이 움직임은 간단히 말하면 자본으로부터 독립을 통해 언론의 품위와 생존을 지켜가겠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프레시안>을 처음 만난 건 2001년께였다. 동료들에게 ‘권할 만한 인터넷 신문’이라는 제목의 글을 써서 돌렸는데, 거기에 <오마이뉴스>와 함께 추천한 온라인 신문이 <프레시안>이었다. 그때, 나는 <오마이뉴스>가 매우 대중적인 논조(기자 구성이나 운영의 성격으로 불가피한)의 진보(개혁) 언론이라면 <프레시안>은 속보성은 뒤지지만 전문 기자의 안목에 돋보이는 고급지로서의 성격을 보인다고 썼던 것 같다.

 

그리고 어느새 두 온라인 신문은 괄목 성장하여 종이 신문에 버금가는 영향력을 가진 언론으로서 우뚝 서게 되었다. 나는 집에서는 창간 주주로 참여하고 있는 <한겨레>를 받아 읽고, 온라인에서는 위의 두 신문을 통하여 세상을 이해하고 있다. 나는 ‘조·중·동’ 따위에는 곁눈도 주지 않는 편이다. 포털에서 공급하는 기사가 눈길을 끌더라도 그 출처가 조중동이라는 걸 확인할 때는 주저 없이 클릭을 멈추는 편이다.

▲ 오마이뉴스의 '자발적 유료화' 안내

<오마이뉴스>가 ‘자발적 유료화’라는 형식으로 독자들의 지원을 구함으로써 안정적 운영을 꾀할 수 있게 된 것처럼 이번 <프레시안>의 실험은 그것과 상응하는 ‘독자들의 참여’로 이해할 수 있겠다.

 

나는 1년 전쯤에 <오마이뉴스>의 자발적 유료화에 동참했다. 물론 <프레시안>과 약정한 금액과 같은 액수다. 후원이야 다다익선이겠지만, 나는 종이 신문 <한겨레>의 구독료를 기준으로 그 정도 액수가 내 부담 능력에 비겨 합리적이라 판단한 것이다.

 

나는 진보 언론에 대한 기대와 실제 사이의 틈이 현실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비교적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편이다. 나는 <한겨레>는 물론이거니와 <오마이뉴스>나 <프레시안>에 대한 열혈 독자들의 애정 어린 비판이 이들 신문의 성장에 ‘쓴 약’ 역할을 한다고 믿는다. 아울러 그런 기대치에 못 미치는 현실에 실망하고 등을 돌리는 독자들의 진정성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나는 적어도 제도권에 들어간 신문을 운동권 조직의 기관지나 팸플릿과 단순 비교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제도권에 등록하는 순간, 이미 그 신문은 이 자본주의의 패러다임과 메커니즘을 수락하는 것이며 그 세계 안에서 자구와 생존을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여서는 아니 된다는 규율에 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제도권에 진입한 진보 언론들이 감내해야 하는 딜레마를 바라보는 우리의 눈길이 조금 부드러워질 필요가 있다고 믿는다. 언론을 통제하거나 억압하는 것은 이제 권력이 아니라 자본이어서 그런 딜레마들은 주로 광고에서 드러나기 마련이다. 물론 진보 언론이 자신의 정체성에 반하는 광고를 천연덕스럽게 싣고 있는 모습은 결코 아름다워 보이지는 않는다.

▲ 한겨레의 주주 되기 안내

<한겨레>가 지난해 포스코 건설노조와 관련한 의견광고 거부에 이어 올해 금속노조 의견광고 게재를 거부한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더구나 판매국이 한미 FTA 홍보 책자 20만 부를 신문에 끼워 독자들에게 배포한 데 견주면 이 조치는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자해행위에 가깝다. 그러나 우리는 이 문제가 독자들의 혹독한 비판뿐 아니라 한겨레 내부의 문제 제기를 끌어내는 계기가 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메이저 언론을 자부하면서 기득권과 지배 계급의 이해를 적나라하게 대변하고 있는 이른바 ‘전단지(傳單紙, 찌라시)’ 신문과 그 종사자들이 희희낙락, 풍요와 안일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을 때도 평균 미만의 임금을 받으며 사회적 이슈와 진보적 가치를 천착하고 있는 이 기자들의 자정을 위한 노력은 그것만으로도 기릴 만하지 않은가.

 

제호만 다를 뿐 똑같은 정치적 입장의 수사적 차별만으로 존재해 온 보수 일간지의 반대편에 <한겨레>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 존재의 의미는 특별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이번 삼성 비자금 관련 보도에서 <한겨레>는 그 존재 의의를 웅변으로 증명해 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삼성의 광고를 잃었다는 통쾌한, 그러나 걱정스러운 소식을 들으면서 나는 이 자본의 시대에서 지켜야 할 언론의 자리를 잠깐 생각했다.

 

<오마이뉴스>나 <프레시안> 역시 예외는 아니다. 각기 조금씩 차별화된 이념적 태도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자신들의 독자와 함께 우리 시대의 삶과 사회를 듬직하게 지켜왔다고 나는 믿고 있다. 그런 뜻에서 나는 보다 많은 사람이 ‘자발적 유료화’나 ‘프레시앙 되기’에 참여하기를 바라고 있다.

 

더구나 ‘프레시앙 되기’는 앞서 말한 정체성에 반하는 광고 따위의 억압으로부터 언론을 독립시키는 일일진대 그 성공 여부와는 무관하게 이는 진실로 뜻깊은 일임이 틀림없지 않은가. 벌써 천여 명이 이 운동에 동참하고 있다는데 이 실험은 그 성공 여부를 떠나서 우리에게 이 이상 반동의 시대에 진보 언론이 나아갈 길을 암시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거듭 말하지만, 세상에 지선지고(至善至高)한 언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시대와 겨레가 원하는 책무를 다하는 진보 언론은 고비마다 만만찮은 성장통을 앓으며 자라고 있다. <한겨레>와 <오마이뉴스>, <프레시안>이 제각기 펼쳐 온 주주·독자들과 함께 하는 열린 운영 방식은 이 디지털시대의 언론이 적극적 참여를 통하여 독자들이 새롭게 만들어 간다는 걸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2007. 11. 29.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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