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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길 위에서

카메라, 카메라 (2)

by 낮달2018 2020. 1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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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탁스에서 펜탁스로, 카메라와 함께한 시간들

▲ 4백만 화소(위)와 1600만 화소의 차이는 작은 사진에서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처음 사진기를 구경한 건 예닐곱 살 때쯤으로 기억된다. 열한 살 위의 누나를 따라다니면서 사진사를 만났다. 그 무렵 카메라는 워낙 귀한 물건이어서 그걸 가지고 다니는 이들은 ‘하이칼라’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사진사들도 대단한 인기를 누리던 때인데 누나와 함께 있었던 사진사는 사진을 찍어주면서 마을을 도는 이른바 ‘영업활동’ 중이었던 것 같다.

 

사진과의 첫 만남

 

나는 완강하게 사진 찍기를 거부했다. 왜 그랬는지는 알 수 없다. 나는 무언가 두려웠던 것 같다. 마을 뒷동산에는 늙은 소나무가 많았다. 나무를 꽤 잘 탔던 나는 솜씨를 뽐내려고 구부정하게 굽은 소나무에 기어올랐다. 그 순간을 사진사는 놓치지 않았고 불의에 사진을 찍힌 나는 울음을 터뜨렸다.

 

‘사진을 찍히면 영혼을 빼앗긴다’라는 믿음은 비 문명권에서는 일반적인 인식이었다. 지금도 파푸아뉴기니, 바누아투 등의 원주민들이 사진을 찍히지 않으려고 하는 까닭도 이 때문이라고 한다. 글쎄, 그 무렵의 내가 ‘영혼’의 존재 따위를 이해했을 리는 없다. 내가 취한 일련의 거부 동작은 낯선 기계를 매개로 한 어떤 행위에 대한 본능적 경계심이었을 것이다.

 

예닐곱 살 때 처음 사진기를 구경할 정도였으니 우리의 일상은 사진과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다. 백일과 돌 사진은 물론, 유년 시절의 사진도 내겐 없다. 사진을 간수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아예 그 시절에 사진은 찍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때의 사진은 몇 장 있을 법하지만 내게 남아 있는 건 한 장도 없다.

 

처음으로 몸소 사진을 찍은 게 첫애를 낳고 나서다. 형님의 사진기를 빌려 와 몇 날 며칠 동안 아이 사진을 집중적으로 찍었다. 그때 찍은 사진이 딸애가 정리해 둔 가족 사진첩을 가득 채우고 있다. 특별한 날이 아니고 사진을 찍는 게 쉽지 않던 시기였다. 무엇보다 사진기가 귀했고 사진을 찍는 데는 필름을 사고, 현상과 인화를 하는 등 일정한 비용을 부담해야 하는 일이었으니까 말이다.

 

내 것으로 사진기를 장만하게 된 것은 초임지였던 여학교에서였다. 일제 펜탁스를 12개월 할부로 샀는데 액세서리 포함해 삼십만 원이 넘게 들었다. 내 초임 본봉이 20만 원이 되지 않을 때다. 그걸로 한 이삼 년 동안 아이들을 열심히 찍었다.

 

첫사랑 펜탁스 ME-Super

 

틈이 날 때마다 아이들 일상을 사진으로 남겼고 그걸 인화하는 데서 즐거움을 찾았던 것 같다. 바쁘게 살긴 했지만 가끔 아이들을 데리고 산과 강, 내와 들을 찾았으며 그때마다 열심히 아이들을 사진기 앞에 세우곤 했다. 요즘과는 달리 필름이 아까워서 풍경은 찍을 엄두도 못 내던 때였다.

 

아이들이 자라 학교에 들어가고 잠깐 학교를 떠나게 되면서 사진 찍기도 좀 시들해졌다. 그러나 어려운 시기였지만 나는 봄이면 산으로, 여름이면 계곡으로 가족들을 데리고 다니며 아이들 사진을 찍는 걸 멈추지 않았다. 사진을 많이 남겨 주셔서 고맙다는 딸애의 공치사를 듣게 된 이유다.

 

복직하고, 다시 교원단체 활동에 전념하게 되면서 사진은 내게서 꽤 멀어졌다. 머리가 굵어지면서 부모와 동행하는 걸 심드렁하게 여기는 아이들의 성장도 한몫을 했다. 그래도 장롱 깊숙이 간직해 둔 내 사진기는 우리 가족이 건너온 시간의 흔적을 차분하게 기록하는 역할을 다해 주었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 컴팩트 디지털카메라가 서서히 일반화되기 시작했다. 2, 30만 원이면 천만 화소짜리 디카를 구매할 수 있는 지금과는 달리 당시의 디카는 꽤 고가였다. 두어 달 동안의 고심 끝에 2004년께 구입한 디카는 50만 원대, 4백만 화소, 광학 10배의 고배율 렌즈를 탑재한 올림푸스 카메디아 C-755uz였다.

 

‘올림푸스’ 디카 시절

 

내 똑딱이(콤팩트 디카를 얕잡아 이르는 말)는 조리개 우선 모드, 셔터 우선 모드, 메뉴얼 노출 기능을 사용할 수 있어, 노출의 수동조절이 가능한 놈이었다. 렌즈 밝기는 F2.8(광각) ~ F3.7(망원)이었는데 이 녀석으로 찍은 사진이 보여주는, 붉은 기가 도는 여느 디카와는 다른, 매우 자연스러운 색감을 가족들은 만족스러워했다.

 

다른 기종의 디카를 써 보지 않았을 뿐 아니라, 디지털카메라의 메커니즘을 제대로 알지 못하니 내게 디카의 성능에 대한 전문적인 이해 따위는 당연히 없다. 그러나 설사 내가 모르는 다른 치명적인 제약이 있다 하더라도 내가 녀석에 대해 만족하고 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유일하게 불만스러웠던 점은 셔터 속도였다. 똑딱이를 들고 나는 꽤 많은 곳을 다녔다. 찍은 사진에 대한 불만은 없었지만, 셔터를 누르고 한참이나 화상을 기록하느라 돌아가는 기계음에 나는 호흡이 가빠질 지경이었다.

 

똑딱이에 물릴 무렵에 나는 ‘D-SLR’을 알았다. 인터넷 동호회 등에서 만나게 된 그 기계는 마치 신천지처럼 내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여러 달에 걸쳐 이것저것 재던 끝에 내 첫 D-SLR 카메라 GX-10을 받아 든 것은 2006년 12월이었다.

 

나는 성급하게 인터넷을 뒤져 최저가로 사 놓은 UV필터, SD카드를 끼웠다. 셔터를 반쯤 누르자 자동으로 초점을 잡으려 혼자 바쁘게 회전하는 렌즈의 기계음과 초점이 잡혔을 때의 전자음 앞에서 느낀 희열을 지금도 뚜렷이 기억한다.

 

D-SRL 입문, 그리고

 

 

그날 밤은 내내 설명서를 읽고 카메라를 조작해 보는 걸로 시간을 보냈다. 똑딱이의 셔터 속도와는 완전히 다른, 엄청나게 빠른 셔터 속도에 나는 감격했다. 그리고 그것은 똑딱이의 그것과는 분명 격이 다른 사진을 뱉어냈고 나는 환호작약했다. [관련 글 : 카메라, 카메라]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시나브로 냉정해지기 시작했다. 좋은 사진기가 반드시 좋은 사진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데 생각이 미쳤고, 내가 가능하면 사물을 보다 사실적으로 재현할 수 있는 사진기를 원했지 그걸로 무슨 대단한 작품 사진을 찍겠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물론 나도 좋은 사진을 찍고 싶다는 열망 정도는 있다. 인터넷의 사진 동호회에 올라오는 만만찮은 내공의 사진들을 보면서 감탄하고 저런 사진을 찍으려면 얼마의 시간과 땀이 필요한지 어림잡아 보기도 하니 말이다.

 

D-SLR의 보급이 일반화되면서 대구경의 렌즈를 단 고가의 사진기로 무장한 아마추어 사진가들은 어디서나 볼 수 있다. 나는 그들의 내공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의 열정이 자신들이 갖춘 장비와 촬영에 들이는 노력 이상의 것이라는 걸 인정하여야 한다는 건 안다.

 

의식적이지는 않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그들과 자신을 엄격하게 구분한다. 나는 무엇보다도 그들에게는 기본이라 할 수 있는 ‘고가의 장비’를 갖출 생각도 능력도 없다. 동호회에 가입하여 ‘단체 출사’에 참여하거나 커뮤니티 활동을 벌이려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

 

어쩌면 나는 그런 적극적 활동을 의식적으로 회피함으로써 내 사진 찍기의 능력이 보잘것없다는 걸 감추고 싶어 하는지도 모른다. 나는 의식적으로 사진 찍기에 빠지지 않으려 한다. 내 사진 찍기는 얼마간의 여유를 두고 한껏 게으름을 누리는 것을 지향한다. 내가 사진에 빠지는 걸 두려워하는 까닭은 그런 활동으로 자신을 구속하고 싶지 않아서다.

 

첫 D-SLR을 장만하면서 나는 이른바 ‘장비병’에 빠지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번들 렌즈로 만족하기는 쉽지 않았다. 나는 중저가의 서드파티(3rd Party) 렌즈 두어 개로 만족하는 법을 배우기로 했다. 표준줌 하나에 망원 하나, 그리고 70mm 단렌즈……. 아, 하나 더 있다. 필름 카메라에 쓰던 수동 50mm 렌즈.

 

초기에는 꽤 공부를 한다고 했다. 주로 인터넷의 동호회 등에 나온 자료들을 받아 읽었는데 진득하게 공부하는 데는 소질이 없었는지 이내 시들해졌다. 아주 기초적인 사진 관련 이론들이었는데, 이게 좀 전문적인 영역으로 들어가게 되면서 슬슬 정나미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런 시시콜콜한 것까지 파서 무슨 대작을 남길 것도 아니고……. 나는 곧 공부를 접어버렸다.

 

그리고 몇 년. 나는 꾸준히 사진을 찍었다. 내게 사진은 일상의 평범한 기록이면서 가끔 감행하는 답사나 여행의 동반자다. 무슨 대단한 사진을 찍겠다는 생각은 애당초 없다. 나는 내가 기록하고자 하는 피사체가 내 육안으로 보는 것만큼 사실적으로 재현되기를, 아니 그보다 훨씬 더 멋있게 표현되기를 바랄 뿐이다.

 

한번 나가면 대개 2, 3백장의 사진을 찍으니 나는 그리 부지런한 편에 끼지도 못하겠다. 수백 장의 사진이라고는 하지만 쓸 만한 사진은 그리 많지 않다. 또 어떤 결과를 의도하고 찍은 사진이 반드시 그 의도와 합치하지는 않는다. 그러니 고를 수 있는 사진은 범위는 더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게 뭐 대수인가. 안타깝긴 하지만 나는 그 가운데 차선을 고르는 걸로 만족한다. 고른 사진은 보정 프로그램으로 가장 초보적인 보정을 한다. 노출과 채도, 명도 등을 보정하거나 필요한 부분을 자르는 트리밍을 거친다. 보정에 대해 꽤 까다로운 사람도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나는 어떤 거리낌도 없이 보정 작업을 한다.

 

내게 보정이란 ‘제대로 표현되지 못한 사진을 되살리는 작업’이다. 눈속임이나 인위적 합성이 아닌 한, 보정은 나뿐만 아니라 사진을 보는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구실을 하니 말이다. 이런 생각을 무심히 할 수 있는 것도 내가 찍은 사진을 굳이 타인의 평가 앞에 내놓는 ‘작품’으로 바라보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쉬움, ‘표현의 한계’?

 

사진을 바라보는 시각은 지금도 특별히 다르지 않다. 여전히 나는 무심히 사진을 찍고 그것으로 지난 시간과 기억을 복기한다. 그러나 무어라고 해야 하나, 무언가가 자꾸 미진하다. 새삼스럽지만 ‘표현의 한계’라 할까, 그런 것을 의식하게 된 것은 최근에 와서다.

 

전문가들이 챙기는 ‘핀’을 의식해 얼마 전에는 아이를 시켜 바디와 렌즈의 핀을 점검하기도 했다. (사실 나는 핀의 개념을 정확히 모른다.) 그러면서 새해에는 어디 사진 강좌라도 한번 나가볼까 하는 생각을 하는 것도 그런 까닭에서다.

 

단순히 일상의 기록에 그친다 하더라도 사진의 기계적 메커니즘 등 그 이론을 이해하는 일은 필요하다면 필요한 일이 아닌가 싶은 것이다. 책으로 독학하는 것은 내 경험으로는 별로다. 나는 아직 사진기의 사용설명서도 다 떼지 못했으니 말이다.

 

겨울이 깊어가고 있다. 이 잿빛의 계절에는 사진기를 메고 집을 나서는 일이 드물다. 여전히 밝고 화사한 것만을 선호해서일까, 나는 겨울의 잿빛 풍경을 기록하는 것을 그리 즐기지 않는다. 가라앉은 겨울 풍경은 그것대로 충분히 아름다워야 마땅하지만 나는 거기서 늘 쓸쓸함과 우울만을 확인하기 때문이다.

 

책상 위 서류함 왼편에 내 사진기는 얌전히 모셔져 있다. 지난 13일 서울에서 열린 교사대회를 다녀온 이래 녀석은 쉬고 있는 참이다. 언제쯤 녀석과 함께 어디론가 떠나게 될지 알 수 없다. 처박아 두었던 사용설명서나 찾아 이 겨울 동안 차근차근 읽어보는 건 어떨까 생각하고 있지만 글쎄다. 몸이 마음을 잘 따르지 않으니 그것도 꽤 힘이 쓰이는 일임에는 틀림이 없다.

 

 

2011. 11. 25.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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