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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길 위에서

‘최소한의 변화를 위한 사진 달력’을 받다

by 낮달2018 2020. 1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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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한의 변화를 위한 사진 달력’

▲ 2014 최소한의 변화를 위한 사진 달력은 낱장으로 걸 수도 묶어서 걸 수도 있다.

15장짜리 사진 달력을 받다

 

그저께 ‘최소한의 변화를 위한 사진 달력’(이하 ‘달력’)이 왔다. 지난해와 달리 꽤 포장이 크다. 그렇다. 전체적으로 판형이 커졌다. 스프링으로 묶었던 지난해 달력과는 달리 올 달력은 낱장으로 떼어서 붙일 수 있도록 느슨하게 묶어놓았다. 달력 상단에 구멍이 뚫려 있어 묶인 상태로도, 낱장으로 걸 수도 있게 해 놓았다.

 

‘최소한의 변화를 위한 사진’에서 전자우편으로 그런 사정을 알려왔는데, 오른쪽 사진처럼 간단한 끈으로 묶어 벽에 걸 수 있다고 했다. 달력은 올 10월부터 12월까지 석 달에다 내년 열두 달이 묶여 장수로 열다섯 장이다. 크거나 작고, 흑백이거나 칼라로 찍은 사진 속의 피사체를 묶는 열쇳말은 ‘노동’이다.

 

씨 마늘을 심고 있는 청산도의 어머니, 화전을 일구는 강원도의 할머니, 송전탑을 해체하고 있는 노동자, 머리를 깎고 있는 이발사,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 태풍주의보를 받은 해녀들, 철공장의 노동자…….

 

올 달력은 특별히 달력 첫 장에 제법 긴 글(아래 상자기사)을 붙였다. 사진으로 말하는 사진가들이 사진으로 하지 못한 말인 듯싶다. 이 글에서 사진가들은 자신들이 만나는 ‘사람들의 세상’이 ‘눈먼 자들의 도시’고 자유와 풍요가 넘치면서도 ‘도시 안의 섬’은 ‘단절의 섬’이라고 말한다.

 

그들이 ‘화염병’ 대신 ‘카메라’를 든 이유

 

“최소한, 최소한 단 한 번만이라도
고개를 들고, 귀를 열어
그들을 보고 그들 목소리를 들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래서 사진가들이 나섰다고. 결국 달력에 실린 사진들은 사진가들의 ‘카메라로 할 수 있는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어보자는 최소한의 몸짓’인 셈이다. 그것은 돈도 밥도 나오지 않는데도 ‘화염병 대신 카메라를 들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진가이기 이전에 한 명의 시민’으로서 이들은 ‘이 땅을 사람 사는 세상으로 만드는 일에 참여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실천하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듯, 실천하지 않는 사진은 죽은 사진이라 굳게 믿’는 이들 사진가는 ‘세상에 눈뜨게 하는 사진’을 통하여 소통과 ‘사람 사는 세상’을 추구하려 하는 것이다.

 

<최소한의 변화를 위한 사진> 누리집에 따르면 ‘2014년 빛에 빚지다’ 달력의 선구매 부수는 1,192부다. 애걔, 하는 소리가 나오는 걸 꿀꺽 삼켰다. 그게 다섯 자리, 만 부를 넘기면 얼마나 좋을까 하다가 여전히 이 달력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류가헌에서의 전시, 판매

 

<최소한의 변화를 위한 사진 달력>의 사진가들이 찍은 사진은 류가헌(http://www.ryugaheon.com)에서 지난 15일부터 오는 10월 27일(일요일)까지 전시되고 있다. 현장에서는 ‘달력의 판매’도 이루어진단다. 누리집에서는 기륭전자 비정규직 투쟁 사진집 <너희는 고립되었다>도 판매하고 있다.

 

‘빛에 빚지다’는 이들 사진가의 작업에 가장 긴요한 조건이라 할 ‘빛’에 대한 이들의 부채감의 표현이다. 빛은 한편으로는 ‘어둠’에 대응하는 ‘희망’과 ‘자유’와 ‘존엄’의 이름이기도 하다. 그렇게 새기자면 정작 우리 자신도 거기 얼마나 빚을 지고 있는가.

 

고작 1만3천 원이나 2만 원에 우리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는 빚을 얼마간이라도 덜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진 달력에 담긴 사진가들의 참여와 실천을 눈여겨보면서 나는 날마다 마음으로 이들 사진가의 실천과 투쟁에 함께할 수 있을 것도 같다. 그것은 또한 동시대인으로서 우리들의 희망과 연대를 새롭게 확인하는 것이라고 해도 좋겠다.

 

세상에 눈뜨게 하는 사진, 그 안에 사람 사는 세상이 있다.

식민지 인도에서 간디는 폭력에 저항하여 밥숟가락을 놓았다, 함께 살자며. 2000년대 한국의 노동자들은 오른다, 크레인에, 철탑에, 망루에. 우리를 죽이지 말라며.

땅을 딛고 사는 사람들의 세상은 그저 평온하고 아름답다. 상상할 수 없는 폭력과 탐욕이 난무하는 가운데서도 그들은 눈을 닫는다. 네가 죽어야 내가 사니까. 귀는 뚫려 사방천지 간의 외마디 비명은 들리나 눈을 닫아 아비규환을 보지 못하는 세상, 그야말로 눈먼 자들의 도시다. 속죄는 희생양을 필요로 하는 법. 그들이 사라져 줘야 내가 산다. 세상이 비상식적이든 비정상적이든 그건 내가 알 바 아니다. 자유가 춤추고, 풍요가 넘치면서 도시 안의 섬은 더욱 외롭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단절의 섬. 그 섬이 무섭다.

최소한, 최소한 단 한 번만이라도 고개를 들고, 귀를 열어 그들을 보고 그들 목소리를 들어야 하는 거 아닌가. 사진가들이 나선 것은 오직 하나 바로 0|것 때문이다. 인간으로서 최소한 해야 할 일, 사진가라는 직업인으로서 최소한 해야 할 일. 점같이 작아져 버린 그 모습들, 소음에 파묻혀버린 그 목소리들을 세상에 알려 보게 해 주는 것. 그거 하나다. 그나마 카메라로 할 수 있는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어보자는 최소한의 몸짓. 그거 하나다.

이들 사진가들도 젖과 꿀이 흐르는 세상에서 예술을 논하고 싶다. 패션사진 찍어 돈도 벌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싶다. 자식들 손잡고 유람선 타러 가고도 싶다. 사진작가, 선생님으로 불리고, 멋들어진 전시도 하고 싶다. 왜 그러하지 않겠는가. 누구 말대로 돈이 나오는가? 밥이 나오는가? 하지만 그건 아니다. 모습은 변했으되 본질은 여전히 그대로인 세상. 그 세상에서 화염병 대신 카메라를 들어야 하는 이유는 아직은 유효하다. 그들의 정체성이자 존재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인간이 자취를 감춰버린 사진, 그곳을 창의성이 자리를 잡아 예술이라 부른다면, 그런 예술은 단호히 거부한다. 정치적 목적을 띤 참여 다큐멘터리 사진은 그렇지 않은 사진보다 독창적이지 못하고, 그리하여 예술적이지 않다면, 그런 예술은 단호히 거부한다. 예술이란 본디 대중은 속물이라는 전제 위에서 성립하는 것. 대중의 시각과 배리되는 지점에서 예술이라는 레벨이 확보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술가들은 항상 자신들만의 가치관을 중심으로 이너서클을 결성할 수밖에 없는 것. 결국 그들이 추구하는 예술 가치는 그들만의 동류 가치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것을 창의성이라 칭할 때 그것은 그들과 손잡은 권력 안에서 규정되는 것이고 그것을 ‘속물적’ 대중이 바라보면서 추종하는 것일 뿐이다.

18세기 이후 부르주아 혁명과 자본주의가 성립되면서 만들어진 예술의 개념은 바로 이런 반(反)대중적 정서에 뿌리를 내리며 커왔다. 그래서 사진이 예술적이라 함은 부르주아적이어야 하고 자본주의적이어야 하며 대중을 속물로 쳐야 하는 운명을 지니는 것이다. 따라서 대중을 함께 해야 하는 동지적 존재이자 역사의 주체로 파악하면서 지배 계층에 저항하며 반(反)부르주아 반(反)자본주의 투사로서 참여 다큐멘터리 사진을 하는 것은 그들 이너서클의 잣대로는 예술 행위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살지 않는다. 실천하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듯, 실천하지 않는 사진은 죽은 사진이라 굳게 믿기 때문에.

직업인으로서 사진가이기 이전에 한 명의 시민으로서 이 땅을 사람 사는 세상으로 만드는 일에 참여하는 것이다. 무슨 거창한 유토피아를 추구하는 것도 아니다. 최소한의 진실과 상식이 통하는 사회 그것뿐이다. 그 작은 것을 위해 거대한 연대를 추구한다. 카메라를 둘러맨 연대. 카메라로 소통하는 연대. 그것이이 달력이자 사진집이 갖는 청체성이다. 이미지가 넘치고 말씀이 쏟아진 한국 사회에 이들이 지난 5년 동안 던진 사진의 외침은 죽비가 되어 우리의 정수리를 내리쳤다. 사진으로 그 동안 우리가 눈이 멀어 보지 않은 주변의 작은 이들이 사는 삶을 보게 하였다. 세상에 눈뜨게 하는 사진, 이것이 사진이다. 그 안에 소통이 있고, 사람 사는 세상이 있다.

- <최소한의 변화를 위한 사진 달력> 중에서

 

 

2013. 10. 23.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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