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선산(구미) 이야기

연악산 수다사(水多寺), ‘은행’ 대신 ‘단풍’ 구경

by 낮달2018 2020. 11. 15.
728x90

구미시 무을면 상송리 수다사의 단풍

▲ 수다사는 통일신라의 승려 진감국사가 창건한 사찰로 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의 말사다. 대웅전 오른쪽이 명부전이다.

어제 오후에 수다사(水多寺)를 다녀왔다. 수다사 은행나무를 보러 가겠다고 벼르기만 하다가 뒤늦게 길을 나선 것이다. 농소리 은행나무 구경을 갔다가 허탕을 치고 돌아설 때 근처에 사진기를 들고 있던 초로의 사내가 넌지시 한마디를 건네주었다. 사진 찍기로는 수다사가 낫지요…….

 

옥성면 농소리에 있는 천연기념물 제225호 은행나무를 보러 간 건 꼭 한 주일 전이다. 그러나 450년 수령의 은행나무는 올해도 나를 실망하게 했다. 여러 해 전에 들렀을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내가 늦었다. 높이 30m에 이르는 나무 오른쪽 큰 가지의 잎이 죄다 떨어지고 없었다.

 

지난 10월 말일에는 인동 동락서원(東洛書院)을 찾았었다. 스무 살 남짓할 무렵 삼종숙을 따라 인근 선산에 시제(時祭)를 마치고 내려오다가 이 서원 앞 은행나무에 넋을 잃은 적이 있다. 나무 아래에서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노란 은행잎이 마치 눈발이 날리는 것처럼 떨어져 내렸기 때문이다.

▲ 동락서원 앞 은행나무(왼쪽)와 천연기념물인 옥성면 농소리의 은행나무

나는 그때의 기억을 오래 간직해 왔지만, 비슷한 기회는 다시 오지 않았다. 아무리 같은 상황이 재연된다고 하더라도 나는 이미 예전의 나가 아니었으니, 그걸 바라는 게 사실은 과욕이었을지 모른다.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막상 서원 앞에 닿았을 때, 나는 입맛을 다실 수밖에 없었다. 380년 수령의 은행나무 고목은 아직은 때가 일러 보였다.

 

아, 고목은 단풍도 늦게 드는구나. 일주일 뒤에 농소리를 찾은 것은 그래서였는데 역시 농소리 은행나무는 나를 기다려 주지 않았었다. 그래도 한 주일을 더 궁싯거리고 나서 수다사를 찾을 때 나는 이미 실망할 준비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40여 분 차를 달려 연악산(淵岳山) 수다사로 들어서면서 나는 경내를 일별하면서 은행의 노란빛이 눈에 띄지 않는 것을 보고 마음을 내려놓았다. 까짓것, 은행 단풍은 내년에 보면 될 테고, 경내나 한 바퀴 돌아가자고 나는 우정 마음을 달랬다. 수다사 경내에 있는 몇 그루의 은행나무는 이미 잎을 벗고 있었다.

▲ 수다사 일주문. 소나무 고목의 호위를 받으며 서 있는 일주문은 단아해 보인다.

구미시 무을면에 있는 연악산 수다사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진감(眞鑑)국사가 창건한 사찰로 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直指寺)의 말사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창건 연대를 신라 문성왕 때로 보고 있으나, <디지털 구미 문화 대전>은 수다사 연혁인 『수다사 약전(水多寺略傳)』에 따라 흥덕왕 5년(830)으로 기록하고 있다.

 

수다사는 진감선사(眞鑑禪師)가 연악산 상봉에 백련 한 송이가 피어 있는 것을 보고 연화사(淵華寺)라 이름 붙인 데서 비롯하였다. 고려 경종 1년(976)에 화재로 소실되었고, 명종 15년(1185)에 각원(覺圓)대사가 중창하여 절 이름을 성암사(聖巖寺)라 하였다. 이후 원종 14년(1273) 큰 수해를 입어 건물 몇 동만 전해왔다.

 

조선조 들어 선조 5년(1572)에 사명(泗溟)대사가 중수해 수다사라 이름하고 의승(義僧) 만여 명을 모아 의국법회(義國法會)를 열었다. 숙종 30년(1704)에는 사찰이 불에 타, 대웅전, 시왕전, 극락당 등만 남았다. 여기까지가 『수다사 약전』의 기록이다.

 

<디지털 구미 문화 대전>은 『수다사 약전』은 근거가 확실치 않으므로 조선 전기 김수온(1410~1481)이 남긴 「수다사상전기(水多寺相傳記)」의 기록이 정확한 것으로 본다. 「수다사 상전기」에선 수다사가 화엄승통(華嚴僧統) 화옹(和翁)에서 시작하여 해유(海乳), 성관(性寬), 학의(學誼) 등이 머문 사찰로 기록하고 있다. <디지털 구미 문화 대전>이 수다사를 고려 시대의 화엄종단 사원에서 시작된 사찰로 추측하는 이유다.

▲ 산신각 아래 소나무 아래 좌정한 아기 부처님. 바라보는 것은 단풍일까, 세상일까.

그러나 한국학중앙연구원 자료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하동 쌍계사(雙溪寺)를 중창한 진감국사 혜소(慧昭) 스님이 창건주임을 밝히고 있다. 어쨌든 수다사는 도리사(桃李寺)와 함께 선산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절 중 하나다. 1731년 수다사에서 제작된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는 보물 제1638호로 지정되어 현재 본사인 직지사 성보박물관에 있다. 그 밖에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명부전이 유형문화재, 동종(銅鐘)이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수다사의 물(水)은 중생의 구세수

 

수다사(水多寺)란 중생을 위한 청정법계도량(淸淨法界道場)이라는 뜻으로 ‘수(水)’는 관음보살의 감로법수(甘露法水)를 말한다. 감로수(甘露水)는 관음이 지닌, 중생의 고통과 병고, 위급 시의 구세수(求世水)를 이르니, 이 절은 관음이 수호하는 도량인 셈이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나서자, 석축 위에 선 나목에 은행나무다. 입맛을 다시면서 경내를 일별해 보니, 대웅전도 명부전, 요사채도 그만그만한 규모의 조그마한 절이다. 고려 명종 때 각원이 중창해 성암사로 이름을 바꾼 뒤, “42성 관음 대법회(四十二聖觀音大法會)를 9천 일간 개설하고 『법화경(法華經)』을 강론하였는데, 승속 수만 명이 참여하였다”는 얘기가 긴가민가하다.

▲ 수다사 영산회상도. 보물 제1638호. 해인사 성보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임진왜란 때 사명당이 이곳에서 1만여 명의 의승(義僧)을 모아 의국법회(義國法會)를 열었다는 얘기도 마찬가지다. 거의 오백 년 전의 얘기라 해도 만 명이 참여할 만한 공간이 아니라는 건데, 그 진위를 따질 계제는 아니다. 절집을 보러 온 게 아니라 단풍을 보러 온 것이니까. 요사채를 포함하여도 몇 안 되는 전각도 한자리에 있지 않고, 높낮이가 다른 공간에 있을 정도니, 지각의 변동이 아니라면 옛 절의 위치는 달랐을지도 모르겠다.

 

경내에는 은행나무 말고도 단풍이 곳곳에 화사했다. 가족과 연인들 등 적지 않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것은 결국 단풍의 명성 덕분이겠다. 경내를 한 바퀴 돌아 나오는 길에 푸른 잎과 빨갛고 노란 잎을 단 단풍나무 몇 그루가 일품이었다.

 

그러나 은행잎이 다 떨어진 것은 이미 단풍의 쇠락기라는 뜻이다. 날씨도 흐렸지만, 전체적으로 단풍도 화사하다는 느낌보다는 다소 우중충했다. 이미 전성기를 지났다는 뜻이다. 때를 넘기면 사람도 나무도 쇠락하는 게 자연의 법칙이다.

▲ 주차장에서 경내로 오르는 돌 축대 밑에 휘영청 늘어진 단풍나무.
▲ 옆길에서 올려다본 단풍나무. 나무 뒤로 보이는 아치형 다리는 극락교다.
▲ 경내의 단풍나무는 꽤나 묵은 고목이다. 한 나무에 푸르고 노랗고 빨간 잎을 달았다.
▲ 연화교에서 내려다 본 일주문.
▲ 경내로 오르는 옆길 좌우의 단풍나무. 사람들이 죽 이어지는 것은 역시 단풍의 명성 덕분이다.
▲ 요사채 아래 잎 벗은 감나무에 감이 주렁주렁 달렸다.
▲ 연화교 쪽에서 바라본 단풍나무. 한 그루에 갖가지 빛깔의 잎이 달렸다.
▲ 돌 축대 아래 떨어진 단풍잎.

사진을 찍으면서 덜 우중충하게, 더 화사하게 찍으려고 애를 쓰는데, 결과는 내 능력이 아니라, 사진기의 성능, 빛과 구도에 달렸다. 집에 와서 늘 하던 방식으로 과하지 않게 보정(補整)하니 화사한 빛깔이 되살아났다. 어차피 인간의 육안에 잡힌 풍경과 사진기의 파인더로 붙든 풍경이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여러 차례 보정한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내년엔 언제쯤 가야 전성기의 은행과 단풍을 만날 수 있을지를 곰곰이 저울질해 본다.

 

 

2020. 11. 15. 낮달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