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 한개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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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를 전후하여 나는 성주와 인연을 맺었다. 해직 동료 셋과 함께 마련한 고물 승합차를 타고 성주의 골골샅샅에 있는 학교를 찾았다. 성주읍을 중심으로 외곽의 면 지역은 새로 포장된 도로로 사통팔달 이어져 있었다. 그게 다 80년대 신군부가 집권한 덕이라고 우리는 쑤군대곤 했다. 전두환의 부인 본관이 성주였던 까닭이다.
3대 전통 마을인 성주 한개마을
그때 우리는 성주 관내를 빠지지 않고 돌아다녔지만 정작 돌아보지 못한 곳도 없지 않았다. 성밖숲이 그랬듯이 월항의 한개마을도 우리가 일찍이 들르지 못했던 곳이다. 성밖숲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고 군에서 대대적으로 정비하면서 새롭게 알려졌듯 한개마을도 마찬가지 경로를 밟은 게 분명했다.
확인해 보니 성주 한개마을이 국가 지정 중요민속문화재 제255호로 지정된 것은 2007년이다. 우리가 성주에서 활동하던 시절만 해도 한개마을은 아직 일반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셈이다. 전형적 민속 마을의 면모를 갖춘 한개마을은 안동의 하회, 경주 양동마을과 더불어 3대 전통 마을로 꼽히는 동네다.
‘한개’의 ‘한’은 ‘크고 넓다’는 뜻이고 ‘개’는 원래 ‘강이나 내에 바닷물이 드나드는 곳[포(浦)]’을 이르는 말이다. (서울 마포 麻浦의 옛 이름도 ‘삼개’였다.) 마을 앞 백천(白川)에 제방을 쌓기 이전에 큰물이 졌다가 빠져나가면서 생겨난 큰 개울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마을의 입향조는 세종 때에 진주목사를 지낸 성산인(星山人) 이우(李友)다. 후손들은 17세기 이후 과거를 통해 출사하기 시작하여 충절과 학행, 독립운동 등으로 기려지는 인물들을 배출하였다. 현재 마을에는 경북 지정 문화재 9채와 조상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6채의 재실을 포함한 집이 75채 있는데 대부분 18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에 걸쳐 건립된 전통가옥이다
한개마을이 낳은 인물로는 북비공 돈재 이석문(1713~1773), 응와 이원조(1792~1871), 한주 이진상(1818~1885), 대계(한계) 이승희(1847~1916) 등이 꼽힌다. 돈재가 사도세자에 대한 충절로 기려지는 이라면, 한주는 조선 6대 성리학자로 추앙받는 이고, 대계 이승희는 한말의 독립운동가다.
고택 구경보단 그 ‘삶과 역사’
이들이 남긴 고택이 북비고택(응와종택), 한주종택이니 나머지 진사댁이나 교리댁, 하회댁, 월곡댁은 그 주인의 벼슬과 안주인의 택호를 따 붙인 이름이다. 이들은 특정한 시기의 우리 전통가옥의 특징들을 보여주고 있어서 지정 문화재가 되었다.
그러나 전문가가 아닌 이상, 그런 전통가옥의 특징들이 길손의 눈길을 끌긴 어렵다. 또 이 나라에서 내로라하는 가문쯤 되면 2, 3백 년쯤의 역사를 자랑하는 고택을 지니는 것은 기본이 아닌가. 그러니 한갓진 집 구경보단 그 집에 산 사람들의 삶과 역사가 어떻게 만나고 있는가를 들여다보게 되는 것이다.
북비고택은 사도세자의 호위 무관이었던 돈재 이석문(1713~1773)의 집이다. 돈재는 27세에 무과에 급제해 사도세자의 선전관(전령 겸 호위무사)으로 발탁됐다. 그는 1762년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을 지경에 이르자 왕명을 어기고 세손(정조)를 업고 들어가 영조에게 부당함을 간하다 파직되어 낙향했다.
한개로 돌아온 돈재는 자신이 거처하는 집의 사립을 북쪽으로 내고 두문불출하는데 이는 한양에 있는 사도세자에 대한 충절과 그리움을 표현한 것이었다. 이 북으로 낸 사립문이 곧 ‘북비(北扉)’니, 돈재를 북비공이라고 부르게 된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는 뒷날 영조가 다시 조정으로 불렀으나 이에 응하지 않았다.
1821년(순조 21) 이석문의 손자인 사헌부 장령 이규진이 북비고택 뒤편에 정침과 사랑채를 지어 확장하였고, 1866년(고종 3) 증손 응와 이원조가 사랑채를 다시 고쳐 지었다. 북비고택이 응와종택과 대감댁으로 불리는 연유다.
대의보다 권력에 기우는 시대…
북비고택에 들어서면 솟을대문 오른편으로 난 작은 사립문이 북비다. 문을 들어서면 방 두 칸 대청 두 칸인 네 칸짜리 맞배 기와집이 남향하여 있으니, 이 집이 생전에 이석문이 거처하던 집이었다. 손자와 증손이 지은 사랑채가 날아갈 듯하지만, 오히려 이 소박한 네 칸 집을 돌아보게 되는 이유다.
섬기는 주군에 대한 충절은 전근대의 윤리요, 도덕이었다. 현대의 계약관계에 비기면 그것은 맹목의 정서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충과 절의 내용 가운데서 오늘날에도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것은 그 바탕에 깃든 충간(忠諫)의 마음이요, 흔들리지 않는 의(義)의 심지다.
사적 이익이 아니라 대의와 명분에 복무했던 이들 봉건 왕조 신료들의 행동양식은 오늘날 권력 앞에 길게 머리를 늘어뜨린 우리 시대의 관료들과 정치인들을 생각하게 한다. 직간(直諫), 충간은커녕 권력의 심기를 살피고, 그 속내를 따르기에 전전긍긍하는 가운데 민생은 피폐해지고 시민은 졸의 자리로 내몰리고 있으니 말이다.
마을 왼쪽에 치우쳐 있는 북비댁과 마을 안쪽에 자리 잡고 있는 한주(寒洲) 종택은 입양으로 얽혀 있는 집안이다. 이석문의 동생 석유가 후사가 없어 석문이 둘째 아들을 양자로 보냈고 그마저 후손이 없자, 석문의 작은 손자를 출계(出系)하였다. 그런데 4대째에는 석문 가문에 후손이 없어 석유 가문에서 북비댁에 양자를 보낸 것이다.
석유의 증손으로 북비댁으로 출계한 이가 응와 이원조다. 그는 공조판서에 오를 만큼 입신하여 북비고택이 번성하게 되었는데, 그는 거꾸로 본가의 조카인 한주 이진상(1818~1886)을 키웠다. 한주는 심즉리설(心卽理說)을 정립해 한주학파를 이루어 조선 6대 성리학자이자 조선 후기 3대 성리학자로 꼽히는 이다.
한개마을이 낳은 독립운동가들
한주 이진상은 1876년 운양호 사건으로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되자 망국의 위기를 직감하고 의병을 일으키려고 동지들을 규합하다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뜻은 맏아들인 대계 이승희(1847~1916)와 제자 곽종석(1946~1919)과 장석영(1851~1926)에게 이어졌다.
곽종석은 1905년 을사늑약 후 늑약의 폐기와 늑약 체결에 참여한 매국노를 처형하라는 상소를 올렸고 또 3·1운동 후 ‘제1차 유림단 의거’(파리장서 의거)를 주도했다가 옥고를 치른 이다. 뒷날 스승 한주의 묘지명을 지은 회당 장석영도 스승의 뜻을 이어 중국으로 망명,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대계 이승희는 국채보상운동에 참여, 서상돈과 모금 운동을 벌였고 고종 양위사건이 발생하자 1908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 이상설 등과 함께 동포들의 교육과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그는 끝내 살아서 고국에 돌아오지 못했지만, 못다 한 광복의 꿈은 그의 제자이자 열혈 독립운동가인 심산 김창숙(1879~1962)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이 같은 선비들의 기질은 마을에서 연면히 이어져 일제 시기에 독립운동에 참여한 이들이 줄을 이었다. 이승희(건국 훈장 대통령장)와 그의 아들 이기원(건국 훈장 애족장), 이기인(건국 훈장 애족장) 삼부자를 비롯하여 족질인 이기형(건국 포장), 이기정(건국 훈장 애족장), 이기윤(대통령 표창) 등이 나와 선비의 기개를 드높인 것이다.
한주정사를 비롯한 안채는 수리 중이었다. 대문 안 오른편에 있는 사랑채도 그리 크지 않은 소박한 맞배집이었다. 좁은 청마루의 처마 밑에 걸린 편액 ‘주리세가(主理世家)’ 현판이 무색할 지경인데 그것은 당당한 양반가임에도 자신을 낮추고자 하는 뜻이 담겼다던가.
한개마을의 ‘돌담길’
한개마을의 골목길을 걸어 나오다 보면 고택들 말고도 나그네의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예스러운 고샅의 돌담길이다. 이 마을의 돌담길은 군위 부계면 한밤마을과 함께 경상북도 지방의 대표적인 ‘아름다운 돌담길’로 알려져 있다.
전통가옥을 둘러싸고 이어진, 모두 3천300m에 이른다는 이 고샅길 담장은 대부분 흙 돌담이지만, 높은 비율의 황토 반죽에 크기, 색깔, 모양이 제각각인 자연석을 박아놓았다. 그러나 한개마을의 돌담길은 한밤마을의 그것과는 매우 다르다.
이들 골목길의 담장은 유난히 높고 출입구가 폐쇄적이라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기가 어렵다. 또 안길과 대문이 바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 여기엔 일족이 공동체를 이루어 살지만, 집마다 나름의 사생활을 지키려는 양반들의 자존심과 집을 독립된 하나의 소우주로 갈무리하고자 하는 의도가 숨어 있는 것이다.
담장의 높이는 고택에서 멀어질수록 낮아지는 느낌이 있지만, 한밤마을의 돌담처럼 그리 수더분하거나 정겹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바깥의 틈입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완강한 의지가 드러나는 것은 이 마을이 수백 년 동안 지켜온 자존심이라 여기면 될 일이다.
주말이지만 마을은 적막하다. 조심스레 사립 안으로 들어서 사진 몇 장을 찍고 돌아 나오는데 어쩌다 만나는 주인장에게 인사하기조차 민망하다. 사람들은 무심히 오래된 집을 둘러보고 가지만, 지키는 노인들에겐 드넓은 집을 건사하는 게 힘겨워 보이는 까닭이다.
나그네들은 무심히 드나들지만 정작 그 집을 지키고 사는 이들에겐 자기 삶을 드러내놓는 일과 다르지 않다. 사람들에겐 그저 그렇고 그런 옛날 집 구경을 하는 호사일 뿐이지만 그 집의 내력과 그 조상들이 여며 온 역사, 그 내밀한 사연을 알아주지 않는 사람들의 무심한 출입이 야속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마을 어귀에 선, 키 큰 은행나무의 단풍이 곱디곱다. 가끔 불어오는 바람에 은행잎이 우수수 날리며 떨어졌다. 지난여름에 혼자서 찾은 지 일 년이 넘었다. 마을과 거기 어린 삶을 제대로 보고 이해하려면 몇 번이나 더 길을 나서야 할까를 생각하며 나는 한개마을을 떠났다.
2015. 11. 21.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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