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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부음, 궂긴 소식들

죽음, 혹은 영면(永眠)

by 낮달2018 2020. 12.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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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희 1940~2007.12.27.

▲ 향년 68세. 고단한 30년 세월이 슬프다.

형수님이 돌아가셨다. 지난 27일 오전 6시께. 급성 신부전증으로 투병했는데 좀 회복되는가 했더니 병마는 이미 당신의 몸을 망가뜨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향년 68세. 얼마든지 더 살아 있어야 할 나이다. 떠날 나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남은 사람의 슬픔은 더 컸다. 아니다. 당신이 산 세월이 워낙 고단해서 자식들의 비통함이 더 컸는지 모른다.

 

고인의 지아비, 그러니까 내 형님이 세상을 뜨신 게 1992년이니 15년 만에 내외는 이승이 아닌 저세상에서 만나게 될 것인가. 음력으로 치면 형님이 세상을 버린 날짜 하루 전이다.

 

정작 생전에 내외의 정리는 그렇지 못했으니 이건 웬 반어인가. ‘천생연분’이라고 말하면서도 사람들의 마음이 착잡해진 이유도 거기 있다.

 

형수가 우리 ‘새 아지매’(경상도 지역에서 형수를 이렇게 부른다. ‘자형’은 ‘새 형님’이고, ‘고모부’는 ‘새 아재’다.)가 된 지 그새 마흔 몇 해가 훌쩍 지났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이었고 형수는 스물 몇 살, 꽃다운 새색시였다.

 

‘도련님’ 대신 ‘디름’이라는 묘한 경상도 사투리로 불리면서 나는 초등학교에 다녔다. 대구의 중학교에 다닐 적에는 형님 내외의 단칸방에 한 해쯤 얹혀살기도 했다. 형님이 할부로 구매한, 정비석이 주해한 세 권짜리 두꺼운 <삼국지>를 읽은 게 이때였다.

 

누구에게나 그렇듯 형님 내외의 신혼은 무난했던 듯하다. 조카들이 태어났고 사업 때문에 살림을 나가 있기도 했다. 그러나 형님에게 형수는 그리 마음에 흡족한 지어미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언젠가 형님이 쓴 일기를 우연히 본 적이 있는데, 나는 거기서 형님의 불만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형님이 형수의 곁을 떠난 건 아마 장조카가 중학교에 입학하고 나서였던 것 같다. (그 내밀한 얘기를 여기서 다할 수는 없다.) 형수는 아이들의 어머니로 남아 있었지만, 지아비에겐 잊힌 존재로 15년을 살았다. 형님이 세상을 떠나고 나서도 15년이 흘렀다. 지아비 살아서 15년, 그리고 그를 보내고 다시 15년, 그 세월이 30년이다.

 

그 30년이란 무엇인가. 그건 단순한 물리적 시간의 집적이 아니다. 그것은 눈물과 고독과 한의 세월이고, 자기 존재에 대한 끊임없는 번민과 회한의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 회한은 당신뿐 아니라, 그런 어버이를 바라보아야 했던 아이들에게도 다르지 않았다. 그들이 감당해야 했던 상처의 세월을 무엇으로 위로할 수 있을까.

 

살아서의 외로운 삶에 비긴다면 주로 오누이들의 손님이긴 했지만, 장례 기간은 쓸쓸하지는 않았다. 장례식장의 제단 위에 형수는 마치 새색시 적의 얼굴을 하고 노랑, 보라, 흰색의 국화꽃 더미에서 물끄러미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다.

 

한 부부의 삶을 둘러싸고 파란만장하게 전개되었던 가족사는 눈물겹고 고단했다. 곁에서 그들이 감내해야 했던 간난의 세월을 바라보아야 했던 동기간들의 마음도 다르지 않았다. 우리는 모든 죽음 앞에서 남은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형수의 죽음을 이승의 고단하고 외로웠던 삶을 마감하고 고통도 절망도 없는 세상에서의 영면(永眠)으로 이해하려 했다.

 

형수님은 시립화장장에서 한 줌의 재로 바뀌어 형님의 유택 오른편에 묻혔다. 살아서 그랬듯 표나지 않게 봉분 없는 평장(平葬)으로 조용하게 말이다. 장지를 떠나면서 나는, 아니 모든 가족은 한 가지로 희망했을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믿는 모든 절대자의 이름으로, 고통과 절망도, 외로움도 눈물도 없는 세상에서 당신이 편히 쉬시기를 말이다.

 

 

2007. 12. 31.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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