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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부음, 궂긴 소식들

활동가 ‘고 이상윤’을 보내며

by 낮달2018 2020. 1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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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2007.12.10

▲ 오윤 판화 <칼노래> ⓒ neolook.com

한 활동가가 죽었다. 불의의 사고다. 지난 10일 자정께 지인들과 술자리를 마친 귀갓길, 그는 횡단 보도를 건너고 있었고 한 음주 운전자가 그를 덮친 것이다. 내가 그의 죽음을 안 것은 이튿날 오후, 내가 고입 논술시험 채점을 하고 있을 때였다.

 

▲이상윤(1961∼2007)

소식을 전해주던 동료 하나는 이틀 전 그를 만났을 때, 그가 내 안부를 물었다는 얘기도 곁들였다. 채점을 마치고 바로 의료원에 들렀다. 이미 지역의 지인들과 활동가들이 장례식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나는 그들 중 하나에게서 그를 치고 달아난 사고 운전자가 잡혔다는 소식을 들었다.

 

막역하게 마음을 나누어 온 사이가 아닌 한, 타인의 죽음 앞에 눈물을 흘리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식장을 짓누르고 있는 슬픔과 숨죽인 비탄 사이에서 나는 조문했다. 상주는 부인과 두 아이. 큰아이는 내게 2년째 국어를 배우고 있는 반듯하고 아름다운 소녀, 작은 녀석은 아버지가 사망한 날, 논술시험을 치러야 했던 사내아이다.

 

문상을 마치고 딸아이의 손을 잡아주었는데, 아이는 내게 기대어 너무 서럽게 울었다. 아이의 오열 앞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늘 슬픔은 남은 사람에게로 향할 수밖에 없는 것인가. 나는 유족들이 겪어야 할 슬픔과 고통을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아마 그들은 오랫동안 남편이, 혹은 아비가 닫힌 현관문을 열고 들어올 것만 같은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로부터 놓여나지 못할 것이다. 가족, 피를 나눈 육친의 죽음은 오랜 부재의 깨달음이란 고통을 통해서 유족에게 그 자취를 남기는 것인지 모른다.

 

오늘, 마침 빈 시간이어서 9시 반부터 열리는 그의 영결식에 참석했다. 조사와 추도사, 조시를 통해서 나는 새삼스레 그를 새롭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를 만난 건 2003년께니 벌써 4년짼데, 정작 나는 그를 반쯤밖에 모르고 있었던 셈이다.

 

지난해, 그는 나와 함께 전임 학교의 학교 운영위원회에서 활동했다. 물론 그는 학부모 위원이었다. 그가 지역의 운동 단체인 ‘안동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과 ‘참교육학부모회’와 ‘열린 사회를 위한 안동시민연대’의 주요한 활동가였다는 것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그가 살아온 내밀한 삶은 알지 못했다. 우리는 주로 사무적으로 만났고, 마음을 나눌 기회가 따로 없었던 까닭이다.

 

그는 부산 사하구 감천동의 판잣집 단칸방에서 태어났다 한다. 그리고 곡절 많은 학창 시절을 거쳐 병역을 마치고 중장비 운전기사로 일하던 그가 안동에 온 건 임하댐의 도로공사 때문. 안동에 뿌리박은 숱한 타관 사람처럼 그도 여기서 삶을 나눌 반려자를 만나게 된다.

 

그는 그때 만난 아내를 ‘죽도록 사랑했다’고 했다. 그리고 양가의 반대를 무릅쓰고 10만 원짜리 단칸방에서 신접살림을 시작했다던가. 그리고 선택한 노동자 생활, 거기서 그는 장명국의 ‘노동법 해설’을 읽었고, ‘근로기준법’을 달달 외우는 이른바 활동가로 성장하지만, 이내 해고되면서 노동 현장의 옹골찬 투사가 되었다.

 

이후 몇 차례의 해고를 거쳐 안동에 정착한 게 1991년. 그러니까 이 땅에 산 지 16년째다. 그동안 “그는 ‘안동 시민들의 참여와 연대를 위해, 한미 FTA를 막아내는 일에, 평화와 통일을 여는 일에, 학부모로서 교육자치의 모범을 만드는 일에, 반평화 반통일 언론의 상징 ‘조선일보’를 반대하는 일”(추도사 중에서)에 자신을 아끼지 않고 던져 왔다.

▲ 허세욱 추모제(2007.4.21. 안동) 그는 언제나 거기 있었다 .

추도사를 한 시민연대의 공동대표인 선배 선생님께서는 그를 ‘스물일곱 살’이라고 말했다. 정작 살아온 세월은 마흔일곱 해지만, 그는 늘 ‘스물일곱 청년의 열정과 순수’로 ‘부정 정신과 비판 정신을 놓지 않’고 ‘열혈 청년’으로 살았다. 그러나, 그가 가면서 남긴 것은 그 뜨거운 삶의 자취와 씨익, 지어내는 미소뿐이다. 그가 어진 아내와 사랑스러운 아이들에게 남긴 유산은 그런 ‘자랑스러운 삶’이다.

 

지난해, 학교운영위원회 활동을 하면서 나는 그에게 배운 게 많다. 그는 본질과 원칙은 반드시 승리한다는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고, 나처럼 앞뒤를 재지 않고 분명하게 자신의 의무와 권리를 다했다. 그는 원칙과 공동선이 훼손되는 교육 현실에 자주 분노했고, 스스로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해 그 현실을 바꾸려 했다.

 

마지막 활동을 통해 그는 자신이 옳았음을 증명했다. 그는 관행상 고치기 어렵다는 학교 예산의 상당 부분을 어려운 학생들의 체험학습 지원으로 돌리자는 의견을 냈고 다소 성급하지 않겠느냐는 내 우려를 잠재우고 그걸 따냈기 때문이다. 그걸 가능케 한 힘이 그의 원칙에 대한 집요한 천착이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자신을 ‘열 받으면 피부터 흥분하는 사람’이라고 했지만, 정작 그는 남의 말을 귀 기울여 들을 줄도, 울화도 슬기롭게 삭일 줄 아는 이였던 듯하다. 결국 그는 겸손한 사람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가 이승을 떠나는 영결의 자리를 가득 메운 선후배, 친구와 지인들은 그것을 그의 따뜻한 품성으로 받아들인 이들이었을 것이다.

 

영결식이 진행되는 동안 나는 인간은 죽음의 자리에서 그가 살아온 세월과 자취를 검증받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안동에서 유명을 달리한 지인 하나를 더 보탰다. 88년에 떠난 내 친구와 90년의 배주영 선생, 92년에 떠난 정영상, 그리고 2002년에 세상을 뜨신 어머니에 이어 그의 죽음은 내가 안동에서 겪고 보내는 다섯 번째 죽음이 된 것이다.

 

그의 참한 딸 연희는 눈물을 거두고 유족 대표로 의젓하게 인사했다. 아버지를 위해 눈물 흘리는 사람들을 통해서 아버지의 삶을 이해하게 되었노라고, 그런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여길 것이라고, 그리고 그 애는 진부하게 너무나 진부하게 ‘아버지, 사랑합니다.’라며 인사를 끝냈다. 그리고 그 진부한 마지막 인사말이 학교로 돌아오는 내내 내 귓전을 덥혔다.

 

그 마지막 날 아침에 그는 늦잠을 자 조반을 들지 못하고 등교하는 반듯하고 공부 잘하는 딸애에게 빵조각을 굳이 건네주었다던가, 사랑한다고 말하던 아이의 젖은 목소리와 함께 그의 사람 좋은 미소가 떠올랐고 나는 우리의 삶과 그 사랑에 ‘진부함’이란 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지향하는 바가 같으면 다른 배를 타더라도 서로가 등을 돌리지 말자고’ 했다는, 그리고 스스로 그렇게 살았던 이 마흔일곱 살 먹은 부산 사나이. 자신의 고단한 삶보다 더 아름다운 세상을 목말라했던 성실한 활동가, 이상윤. 병원을 떠나면서 나는 그에게 마음속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상윤씨, 잘 가요. 다시 만나면 자기가 좋아하는 소주를 사지.

 

 

2007. 12. 13.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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