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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XT(넥스트)’로 써도 시청자는 ‘곧이어’로 읽어라?

by 낮달2018 2020. 1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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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비전 화면에 로마자 쓰기, 방송이 잊은 것들

▲ 공중파 가운데 KBS 두 채널, EBS만이 다음 프로그램을 예고 화면을 한글로 쓰고 있다. MBC와 SBS는 영문 ‘NEXT’만 쓴다.

텔레비전도 그냥 재미나게 보고 말면 좀 좋은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맞춤법에 어긋난 자막과 잘못된 발음 따위가 저절로 눈과 귀를 어지럽힌다. 블로그에 그런저런 사연을 끄적이다가 정색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은 텔레비전 화면에 ‘로마자’가 넘치기 시작하면서다.

 

지금도 신문과 잡지 등에선 부득이하게 로마자를 표기해야 할 때는 한글로 쓰고 괄호 안에 알파벳을 함께 적는 방식을 쓴다. 신문 지면이 한글 전용으로 바뀌면서 독자의 이해를 도우려는 한자가 괄호 속으로 들어가 묶인 것과 같은 방식이다.

 

영어, 밀려난 한자의 자리를 대체한 걸까

 

신문 지면에 한글과 같이 섞여서 쓰이던 한자가 괄호 속에 묶인 현상의 함의는 분명하다. 그것은 더는 한자가 한글보다 우위에 있는 주류 문자가 아니라는 사실과 한글을 부차적 존재로 거느린 시대의 종언을 환기한다. 아울러, 이른바 ‘한주국종(漢主國從)’의 시대가 가고 ‘국주한종(國主漢從)’ 시대가 열렸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한글전용 세대들에겐 영어와 일본어나 다르지 않은 외국어로 인식되기도 하지만, 어쨌든 한자는 고대는 물론이거니와 근대에 이를 때까지 한국인의 문자 생활을 지배한 언어였다. 한글이 ‘언문(諺文)’과 ‘암클’ 따위로 폄하되면서 일반 민중의 문자에 머물러 있을 때도 한자는 지배층의 세계관을 결정짓는 문자였다.

 

1945년 패망한 일본이 물러가고 인천에 상륙한 미군이 지니고 온 이 낯선 언어(문자)는 꽤 오래 이방인의 문자 이상이 되지는 못했다. 더 잘살고, 더 힘센 나라의 언어라는 점을 빼면 그것은 30년 이상 일제의 식민 통치 시기의 주류 문자였던 일본의 그것 이상이 되지는 않았다.

 

묵서가(墨西哥:멕시코)·백이의(白耳義:벨기에)·서반아(西班牙:스페인) 등의 나라 이름은 물론, 나성(羅城), 백림(伯林:베를린), 해아(海牙:헤이그) 등 도시 이름, 나파륜(拿破崙:나폴레옹), 피택고(皮宅高:피타고라스) 등 인명도 한자 음역(音譯)으로 쓰이던 시대가 70년대까지 이어진 까닭이다.

 

이 한자 음역 시대는 한글 전용이 본격화하면서 막을 내리고 한글 표기로 옮아갔다. 한글로 외국 문자를 표기하기 시작했음은 그 이방의 언어가 더는 낯설지 않아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한글로 쓰면서 괄호 속에 알파벳을 함께 적게 된 것 역시, 이해를 돕는데, 로마자를 불러오는 게 자연스러워지게 되었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새천년 이후, 언제부턴가 로마자는 괄호 밖으로 튀어나와 본문에 자연스레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인쇄물과 영상물, 거리의 간판에, 일상의 대화 속에 영자(英字)는 차고 넘치고, 대중가요에도 영어 구절이 마치 고명처럼 끼어든 시대인 것이다. 더러는 한류를 타고 우리 노래가 바다를 건너기도 하니, 단순 반복의 영어 가사를 섞어 놓은 이들 노래는 말하자면 국제화 시대의 ‘트렌드’가 된 셈이다.

 

‘괄호 밖으로 나온 로마자’가 뜻하는 것

▲ 언제부턴가 기업들이 사명을 적으면서 영자를 쓰는 것은 일종의 트렌드가 되었다 .

괄호 속에 묶여 있는 것으로 외국어(문자)임을 확인받았던 영자가 밖으로 풀려나오는 것의 의미는 꽤 무겁다. 그것은 풀려도 괜찮을 정도로 영자가 일상에 녹아들었다는 뜻이면서, 그런 현상에 대한 사회적 거부감이나 저항이 없으리라는 판단이 포함되었다는 의미기 때문이다. 한글 속에서 늠름하게 쓰이는 영어는 마침내 국한 혼용 시대의 한자어와 같은 지위를 얻은 것이다.

 

2013년부터 2017년까지 블로그에 세 차례에 걸쳐 ‘괄호 밖으로 나온 알파벳’ 이야기를 쓴 것은 그러한 언어 현실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다. 나는 우선, 기업체의 이름을 로마자로 표기하는 추세(또는 유행)와 한글 전용에 관한 분명한 정체성을 보여주고 있는 <한겨레>가 신문 꼭지 이름을 영자로 과감하게 쓰기 시작한 것부터 지적했다.

 

‘LG’부터 시작된, 알파벳 첫머리 글자(initial)로 기업명을 표기하는 사례는 이제 굳이 언급할 필요조차 없는 상황이 됐다. SK(선경)·KT(한국통신)·DB(동부그룹)·POSCO(포항제철)’ 등의 민영 기업은 물론, KT&G(담배인삼공사)·K WATER(수자원공사)·KORAIL(철도공사) 등 공기업도 앞다투어 영자로 기업명을 표시한다.

 

두드러진 데는 금융권이다. KB(국민은행)를 필두로 NH농협은행·KDB(산업은행)·KEB(외환은행)에 이어 지방은행도 동참한다. DGB(대구은행)·BS(부산은행)·JB(전북은행)·KJB(광주은행)이 뒤를 따랐고, 마침내 제2금융권의 MG(새마을금고)도 이른바 ‘글로벌화’ 물결에 편승했다. 세월이 그러니 이는 어쩔 수 없다고 인정하자.

▲ 로마자가 괄호 밖으로 나오면서 방송은 물론이고 한글전용의 원칙을 꽤 잘 지키고 있는 <한겨레>도 일부 제목에 영자를 쓰기 시작했다.

나는 당시, 지금도 KBS를 ‘케이비에스’라 표기하는 <한겨레>가 목요판 ‘ESC(이에스시)’에 ‘kite(연), Jirisan(지리산)’ 등을 쓰고, ‘Fun한 사람’·‘Fun한 이야기’·‘완소 피플’ 등을 꼭지 제목으로 쓰는 걸 보면서 적잖이 혼란스러웠었다. 물론 본문에서는 기존의 원칙을 지키지만, 괄호에서 풀린 로마자가 <한겨레> 지면에 커다랗게 박히는 현실이 너무 낯설게만 느껴졌던 까닭이었다.

 

2017년에 쓴 세 번째 글에서 내가 지적한 것은 종합편성채널 제이티비시(JTBC)의 ‘뉴스룸’ 화면이었다. 이 뉴스 프로그램은 당시 ‘TV 수신료를 JTBC로 내야 한다’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만큼 깊이 있는 뉴스를 제공함으로써 망가진 공중파를 대체하고 있었다.

 

뉴스룸 꼭지 가운데 ‘BEHIND THE NEWS(비하인드 더 뉴스)’라고 하여 뉴스의 이면을 다루는 순서가 있었다. 그런데 바로 앞 꼭지인 ‘팩트 체크’는 프로그램 이름을 한글로 쓰면서 JTBC는 유독 이 꼭지의 이름은 한글 없이 영자로만 썼는데 아무리 궁리해도 그 이유를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JTBC의 ‘뉴스룸’ 끝에는 ‘영문’이 흐른다

 

요즘도 ‘뉴스룸’은 진행자가 뉴스를 닫는 인사를 한 뒤 노래 한 곡이 흐르면서 끝나게 된다. 이 노래는 가끔 우리 가요가 선택되기도 하지만 대체로 외국 가요가 중심이다. 노래가 흘러나오면서 제목과 연주자 이름이 영자 자막으로 화면에 뜨는데 날것 그대로의 이 로마자를 바라보는 마음은 씁쓸하기 이를 데 없다.

▲ JTBC ‘뉴스룸’의 마지막 장면. 영자로만 표기된 이런 화면은 지금의 뉴스룸도 이어가고 있는데 이는 적잖은 시청자를 당혹스럽게 한다.

굳이 우리말로 제목을 바꾸지 않은 이상 외국 가요의 제목을 우리말로만 표기하는 건 별 의미가 없긴 하다. 더구나 언제부턴가 외국 가요는 제목과 가사를 굳이 번역하지 않는다. ‘If you're going to San Francisco, Be sure to wear some flowers in your hair’를 ‘샌프란시스코에선 머리에 꽃을 꽂으세요’라고 이름 붙였던 시대는 이미 전설이 된 것이다.

 

갈무리 화면에 나오는 ‘Windmills Of Your Mind’은 직역해 ‘네 마음의 풍차’라고 써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가수 이름도 굳이 ‘STING’이라 쓰지 않고 한글로 표기해도 충분하다. 인명은 ‘도널드 트럼프’라 쓰지 굳이 영자로 ‘Donald Trump’라고 쓰지 않으니 말이다. 아무리 일상에 영자가 차고 넘친다 해도 영문으로 쓰인 이 자막을 익숙하게 여길 시청자가 얼마나 있을까. 나이가 많아서, 혹은 배움이 짧아서 그걸 해득하지 못하는 시청자에게 이 방송은 무엇일까.

 

방송은 신문과 비겨도 훨씬 더 대중적인 매체다. 그런데 신문도 감히 시도하지 않는, 방송 화면을 영문으로만 표기하는 게 ‘공중파’가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용납될 수 있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요즘 방송 화면에 로마자는 훨씬 더 과감하게 등장하는 추세로 보인다.

 

한때 JTBC가 ‘곧이어’를 ‘NEXT(넥스트)’를 적고 외국인이 이를 발음하는 형식의 화면을 보였다가 그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요즘 들어 ‘곧이어’와 같은 다음 프로그램 예고는 공중파와 케이블 방송을 가리지 않고 유행처럼 ‘넥스트’로 바꾸어 쓰고 있다.

▲  KBS 1TV 의 프로그램 예고 화면 .  맏형답게 한글을 주로 ,  영자는 부로 썼다 .  오른쪽 아래는 보조 예고 화면
▲ KBS 2TV의 프로그램 예고 화면. 영자 없이 한글만 썼다. 오른쪽 아래는 보조 예고 화면
▲ EBS TV 의 프로그램 예고 화면. 주 화면에는 한글 '이어서'  아래 'NEXT'를 썼고, 보조 화면(오른쪽 아래)에서는 영자만 썼다.
▲ MBC TV는 주 예고 화면과 보조 예고화면(오른쪽 아래) 모두에서 "NEXT"만 썼다.
▲ SBS TV의 다음 프로그램 예고 화면. 주, 보조화면 모두에서 영자만 사용했다. 오른쪽 아래가 보조 예고화면.

방송사들은 ‘병기(倂記)’라고 우길 테지만, 그것은 한국방송(KBS)의 두 채널과 교육방송(EBS)에나 해당하는 것이다. 한글이 우선이고, 영자가 그걸 보조하는 형식이라야 ‘병기’라 할 수 있을 듯한데, 나머지 방송은 모두 영자가 중심이고 한글은 그 아래 보일 듯 말 듯 박혀 있다. 괄호 속에 묶여 있던 영자가 풀리면서 한글은 그걸 보조하는 형식이 되어버린 것이다. 로마자가 ‘주’고 한글은 ‘종’인, 이른바 ‘영주한종체(英主韓從體)’가 된 것이다.

 

‘국민의 방송’을 자부하는 KBS1 텔레비전과 2 텔레비전은 ‘곧이어’라는 한글 안내가 중심이다. KBS1 텔레비전은 ‘곧이어’라고 커다랗게 쓴 한글 아래에 보조로, 영자 ‘NEXT’를 함께 적고 있는데, 보조 예고 화면도 마찬가지다. 2 텔레비전은 본 예고 화면은 물론, 보조 예고 화면 모두 영자를 쓰지 않고 있다. 이는 ‘국민’을 의식한 조치일까. 

 

EBS는 본 예고 화면은 영자 없이 ‘이어서’를 크게, 그 아래에 ‘NEXT’를 함께 적고 있다. 보조 예고 화면은 한글 없이 영자로만 ‘NEXT’를 쓰고 있다. 사소한 차이가 있긴 하지만, KBS와 EBS는 한글 예고에 영자 예고를 보조하는 형식은 닮았다.

 

같은 공영방송이지만, 문화방송(MBC)는 과감하게 대형 글꼴로 ‘NEXT’를 쓰고 있다. 한글은 아예 없다. 본 예고 화면은 MBC 로고가 그나마 국내 방송이라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보조 예고 화면에도 ‘NEXT’가 중심, 한글은 예고 프로그램 제목에만 쓰였다.

 

서울방송(SBS)도 다르지 않다. 오히려 MBC보다 더 크게 화면 전체를 가득 채우는 ‘NEXT’다. 보조 예고 화면도 대동소이하다. 단지 글자의 크기가 줄었을 뿐 ‘NEXT’만 쓰고 있다. MBC와 SBS는 마치 ‘NEXT’의 크기로 경쟁하는 느낌이다.

 

누구의 잘못인가? 방송인가, ‘국수적’인 ‘나’인가

 

지상파가 이럴진대 구태여 케이블이야 구태여 들여다볼 필요가 어디 있으랴. 텔레비전 방송에서 멀쩡한 제 나라 문자가 있는데도 굳이 로마자를 사용하는 까닭은 무얼까. 워낙 영자가 위세를 부리는 세상, ‘넥스트’가 ‘곧이어’보다 전달력이 나아서일까? 아니면 밋밋한 화면에 영자를 쓰게 되면 화면이 멋있어져서일까. 아니면,이 국제화 시대에 세계 공용어인 영어를 지나치게 ‘국수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나의 문제'인가.

 

전근대에 한자가 그랬던 것처럼 영어는 이 땅에서 일찌감치 우월적 언어, 고급 문자의 지위에 올랐다. 한글날을 즈음해 반짝 조명될 뿐인 한글은 이미 주류에서 밀려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세계 최대의 ‘토익 공화국’으로, 각종 영어 인증시험 비용에 바쳐지는 땀과 수조 원으로 출렁이는 관련 시장은 주류 언어에 대한 서글픈 짝사랑을 웅변한다.

 

영어가 세계 공용어로서 지위를 확고히 하는 만큼 역설적으로 우리의 고유한 언어와 문자의 정체성은 환기될 수밖에 없다. 국제화 시대라는 구호에도 불구하고 개별 언어와 문자의 가치가 새롭게 조명되는 까닭이 거기 있다. 모국어와 나라글자에 대한 이러한 인식과 그걸 지키려는 노력을 세계화의 걸림돌이나 진부한 민족주의적 편협성으로 이해하는 게 온당하지 않은 이유다.

 

이미 영어가 일상이 되고 있는데, 텔레비전 방송에서 영자 몇 개를 쓰는 게 무어 문제냐고 반문할 이도 적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개인의 문자 생활과 불특정 다수의 접근이 보장된 방송의 언어 선택은 다른 문제다. 시청자 가운데 소수라도 그걸 읽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면 그 문자는 선택되지 않아야 마땅하다. 공공의 소유 자산인 전파를 송출하는 방송은 그 주인인 국민 대중의 이익에 복무하는 것이 방송의 공익성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린 것일까.

 

글쎄 그러지 않아야 하겠지만, 뉴스룸이 ‘News room’으로 여행이 ‘Travel’로 일상적으로 쓰이는 날이 조만간 올 수도 있겠다는 예감은 씁쓸하다. 조리법과 전설이 스스럼없이 ‘레시피’와 ‘레전드’로 쓰이는 이상, 그게 ‘recipe’와 ‘legend’로 쓰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지 모르니 말이다.

 

 

2020. 11. 10. 낮달

 

 

'곧이어'와 'NEXT'... 이 방송이 잊고 있는 것

한자의 자리를 대체한 영어 표기... 이렇게 가다간 영어만 남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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