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 앞두고 아이들 문학기행에 인솔 교사로 참가하다
시월의 마지막 날에 아이들을 데리고 정지용 문학기행을 다녀왔다. 1·2학년 마흔 명에다 지도교사로 네 명의 국어 교사가 동행했는데, 나는 거기 묻어갔다. 같이 가겠느냐는 동료의 권유에 망설이지 않고 그러겠다고 한 것은 그게 교단에서 아이들과 함께 하는 마지막 여행일 것 같아서였다.
마지막 동행, 지용 문학기행
학교 예산으로 치르는 행사였지만 생각보다 아이들 반응은 미지근했다. 토요일이었지만 학원 수강 등을 이유로 참여를 주저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사내아이들이라서 그런 걸까, 아니면 아이들이 이 입시 체제에 너무 잘 길들었기 때문일까. 아이들은 눈앞의 이해에만 매달릴 뿐, 새로운 체험에 대한 호기심마저 잃어버린 것처럼 보였다.
문학 교과서마다 정지용의 시가 여러 편 실려 있어서 아이들은 ‘향수’를 비롯하여 ‘유리창’, ‘장수산’ 등의 시를 배우게 된다. 개중에는 대중가수 이동원과 테너 박인수가 부른 가곡 ‘향수’를 아는 아이들도 있다. 그러나 아이들은 시험에 나오는 많은 시인 중 하나를 그를 기억할 뿐, 그를 만나러 간다는 특별한 감흥을 갖지 못한 듯했다. 문제를 풀기 위해서 시를 배우는 우리 문학교육의 결과다.
내가 정지용(鄭芝溶 1902~1950)의 이름을 처음 접한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시인으로 문예 동아리 지도를 맡았던 선생님에게서 국어 교과서 권두시로 박목월의 ‘윤사월’을 배우면서다. 청록파를 설명하면서 선생님은 <문장>에 이들 시인을 추천한 정지용을 이야기해 주었었다.
지용의 시집이 <백록담(白鹿潭)>이어서 조지훈·박두진·박목월 세 시인이 공동시집 <청록집>을 냈다고 했다. 스승의 시집 이름 가운데 ‘백록’이 들었으니 제자들은 젊은 자신들을 칭하는 이름으로 청록(靑鹿)을 썼다는 것이었다.
2학년으로 진급해서는 바뀐 국어 선생님이 더러 암송해 주는 정지용의 시를 감상할 수 있었다. 한국전쟁에서 부상해 다리가 불편한 선생님은, 아, 그분의 성함은 잊었다, 지그시 눈을 감고 지용의 시를 나직하게 외어주곤 했다.
나는 선생이 암송해 준 시 가운데 ‘물소리에 이가 시리다’는 구절을 오랫동안 기억하고 있다. 그는 물소리를 들으며 ‘이가 시리다’고 표현한 지용의 감각이 놀랍다고 말했었다. 예의 시가 ‘조찬(朝餐)’이었음을 알게 된 것은 뒷날 아이들에게 문학을 지도하면서였다. 선생이 말씀하신 ‘감각’을 나는 아이들에게 ‘청각을 촉각으로 바꾸어낸 공감각적 표현’이라고 가르쳐 왔다.
선생님에게서 정지용을 배웠지만 단지 이름과 몇 편의 시가 다였다. 대학에 가서 교재에서 정지용을 ‘정○용’, 이른바 ‘복자(伏字)’로 배우면서 나는 그가 북으로 간 시인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민음사 판 김현·김윤식의 <한국문학사>에는 얼마나 많은 문인의 이름이 복자로 가려져 있었던가.
30년 넘게 ‘잊힌’ 시인 정지용
1988년 7월에 월북 문인 120여 명에 대한 해금 조치가 이루어지면서 비로소 이들 월북 문인들은 제 이름을 되찾았다. 내 서가에 꽂혀 있는 <정지용 전집> 2권은 그 무렵에 산 것이다. 시인으로서 이름을 되찾으면서 그는 당대에 손꼽던 서정시인의 지위를 회복했다.
정지용은 해방 후에 좌익계열인 조선 문학가 동맹에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했는데 1948년 정부수립 후 이 전력 때문에 보도연맹에 가입하여 전향 강연에 참여해야 했다. 그는 1950년, 한국전쟁 때 북한군에 끌려가 서대문형무소를 거쳐 평양 감옥에 수용되어 있다 폭사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추정이 사실이라면 그는 무려 30년 넘게 잊힌 이름으로 존재해 왔던 셈이다. 해방 전후 사회주의 계열의 문인단체 참여와 월북을 이유로 묻어 두었던 우리 현대문학사는 1988년에 대대적으로 해금되면서 그 반쪽을 되찾았다.
지용이 고향인 충북 옥천에서 ‘지용제’라는 문학축제로 다시 복권된 것도 1988년 5월이다. 이후 생가 복원과 문학관 건립, 지용문학상 등 기념사업이 이어졌다. 그는 옥천을 대표하는 역사 인물로 기려지고 있는데, 공교롭게도 인근에는 박정희의 부인이었던 육영수의 생가도 있어, 이를 찾는 발길도 적잖은 모양이다. [정지용 문학관 바로가기]
정지용은 1902년 옥천에서 태어났다. 옥천공립보통학교를 마치고 휘문고보로 진학하여 박종화·홍사용 등과 사귀었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이선근과 함께 ‘학교를 잘 만드는 운동’으로 반일(半日) 수업제를 요구하는 학생대회를 열었고, 이로 인해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다가 박종화·홍사용 등의 구명운동으로 풀려났다.
1923년 일본 도시샤(同志社) 대학 영문과에 입학했으며, 1926년 유학생 잡지에 시 ‘카페 프란스’ 등을 발표했다. 1930년 김영랑과 박용철이 창간한 <시문학>의 동인으로 참가했으며, 1933년에는 모더니즘 운동의 산실이었던 구인회에 참여했다. 1939년에는 <문장>의 시 추천위원으로 박목월·조지훈·박두진 등의 청록파 시인을 등단시켰다.
아류가 아닌 지용의 이미지즘·모더니즘
정지용은 영문학을 전공한 시인답게 형태주의적 기법을 시도한 최초의 이미지스트이자 모더니스트로 평가된다. 그는 시어를 고르고 다듬는 데 세심한 노력을 기울였다. 일상에서 잘 쓰지 않는 고어나 방언을 시어로 폭넓게 활용하고, 언어를 독특하게 변형시켜 자신만의 시어로 개발한 것이다.
동갑내기인 김소월이 1920년대에 자기감정을 과다하게 노출하는 감상적 낭만주의의 경향을 보였다면, 지용은 대상의 뒤에 자신을 숨기고 대상을 적확하게 묘사하는 모더니즘-이미지즘의 시 세계를 연 시인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최동호는 정지용의 모더니즘을 “서구 추수적인 아류의 이미지즘이나 유행적인 모더니즘을 넘어서서 우리의 오랜 시적 전통에 근거한 순수시의 세계를 독자적인 현대어로 개진함으로써 한국 현대시의 성숙에 결정적인 기틀을 마련”한 것으로 평가한다.
충북 옥천군 옥천읍 향수길, 청석교 근처의 정지용 생가에 도착한 것은 10시 반께였다. 직전에 그가 다녔던 죽향초등학교를 들렀었다. 교문을 들어서자 목조의 오래된 교사 한 동이 남아 있었다. 이 초등학교는 6·70년대 18년간 집권했던 박정희의 부인 육영수도 다녔는데, 지용의 조그만 시비 옆에는 그가 내렸다는 휘호탑이 큼직하게 세워져 있었다.
정지용의 생가는 초가 두 채다. 청석교 아래로 흐르는 개울이 ‘향수’의 실개천이라는데 실개천이라기엔 규모가 다소 크지 않나 싶었다. 본채 마루에 걸터앉아서 해설사의 이야기를 듣는 아이들의 모습이 좀 심드렁해 보였다. 해설사는 정지용이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는 걸 시시콜콜 설명했는데, 그걸 듣고 있는 교사들은 좀 민망했다.
하긴 인근 괴산 출신의 작가 홍명희(1888~1968)를 기리는 홍명희 문학제는 청주와 괴산에서 번갈아 열렸으나 지난해에는 괴산이 아니라 경기도 파주에서 열려야 했다. 1948년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한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한 뒤 북에 남았던 벽초에 대한 보수단체의 반대 때문이었다. 1988년에 해금되긴 했지만, 아직도 우리 문학사를 가르고 있는 이데올로기의 벽은 높고 견고한 것이다.
옥천에는 곳곳에 정지용을 기리는 시설이 있다. 생가 주변의 거리 이름도, 주변의 공원도 ‘향수 길’이거나 ‘향수 공원’이다. 주변 아파트 이름조차 그걸 따르고 있다. 또 인근에는 지용 문학공원도 조성되어 있다. 문학관을 관람하고 지용의 동상 앞에서 기념촬영을 한 뒤, 일행은 인근의 장계 유원지로 옮겨 깊어가고 있는 가을 풍경 속을 거닐었다.
장계 산책길에 깊어가는 가을
장계관광지는 1980년대에 대청호 주변에 조성한 유원지인데 낡은 놀이시설과 공원으로 방치되어 왔다. 옥천군은 이 주변을 정지용 시인의 시작품과 정지용 문학상을 받은 시인들의 육필 시작품을 새긴 시비를 세운 산책길로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정지용 문학상을 받은 이들은 우리 문단의 유명 시인들이다. 1989년 제1회 박두진을 시작으로 김광균, 이가림, 이수익, 김지하, 송수권, 정호승, 문정희, 강은교, 도종환, 정희성, 나태주 시인 등이 이 상을 받았다. 그러나 아이들은 시비를 살피기보단 가을의 햇살을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문학기행은 대전 가톨릭문화관 공연장에서 뮤지컬 드라마 한 편을 감상하는 걸로 주요 일정을 마감했다. 지방 극단이 연중 계속하고 있는 공연인데, 우리 일행 말고도 관객이 제법이었다. 맨 앞자리에 앉아서 거의 십여 년 만에 연극을 관람했다. 드라마에서 그려지는 사랑 이야기는 뻔한 귀결인데도 어쩐지 애틋하게 다가왔다.
정지용 전집을 뒤적이다가 시 ‘귀로’에 눈길이 머문다. 글쎄, 가을이어서 그런가. 어쩐지 그 시에 차분하게 담긴 시인의 쓸쓸한 정서가 마음에 닿아와 감긴다. 이마에 닿는 ‘계절의 입술’도, 그 ‘쌍그란’ 느낌도, ‘디딜 데 디디는 삼십적 분별’도 쓸쓸하긴 매일반이다.
그렇다. 어느덧 11월도 중순으로 달려가고 있다. 수능 시험이 12일, 올 한 해 농사도 수확이 코앞이다. 시나브로 이 해도 저물고 있는 것이다.
2015. 11. 8.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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