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권재혁 선생 40주기’ 추모제 기사를 읽고
오늘 아침 <한겨레>에서 ‘고 권재혁 40주기 추모제’란 기사를 읽었다. 기사의 제목은 “간첩 낙인 40년, 아버지 원망 이젠 내려놔”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가 발표한 ‘간첩’과 ‘빨갱이’ 조작 사건이 한둘이 아니어서 좀 심상해져 있는 게 사실이다. 워낙 생소한 이름이라 기사를 찾아 읽었는데, 마음이 여간 애잔해지지 않는다.
권재혁은 생소한 이름이다. 역사학자 한홍구 교수의 글(권재혁을 아십니까)에 따르면 그는 이른바 ‘남조선해방전략당’ 사건의 주범으로 사형을 당한 진보적 경제학자다. 지난 11월 4일이 그의 40주기였다.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한 권씨는 1955년 미국 오레곤대학 경제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한 뒤 귀국해 건국대와 육사에서 강사로 있던 장래가 촉망되는 학자였다고 한다.
촉망되는 경제학자를 ‘간첩’으로 만들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한 것은 독재정권의 권력 기구가 자행한 무자비한 고문이고, 그것을 추인한 사법부다. 늘 그렇듯이 진실과 정의가 밝혀지는 데는 너무 오랜 세월이 필요하다. 지난 4월 진실화해위가 “중앙정보부가 1968년 ‘권재혁 등 13명이 반국가단체인 남조선 해방전략당을 조직했다’라고 발표한 사건은 고문에 의한 조작이었다”고 진실 규명 결정을 내린 것(관련 기사)이다.
고인의 큰아들 권병덕(59) 씨 얘기 앞에서 나는 한참 동안 먹먹해졌다. 가족들은 서로 아버지 이야기를 꺼내는 걸 꺼리며 살아왔고, 한 번도 아버지 묘소를 함께 찾지 않았다고 했다. 어느 날 갑자기 수사기관에 연행된 아버지는 곧 처형되었다. “앞으로 면회 오지 말아라.”가 아버지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40년, 유족들에게 과연 ‘나라’는 무엇일까
아버지를 잃은 슬픔보다는 ‘간첩의 자식’이란 굴레가 더 끔찍했을 것이었다. 1975년 인혁당 사건의 한 희생자의 막내아들은 네 살이었는데, 동네 아이들이 ‘빨갱이 새끼’라고 나무에 묶어놓고 사형을 시키는 놀이를 했다고 하니 간첩으로 낙인찍힌 유족들이 견뎌야 했던 고통은 가히 ‘천형’ 수준이었으리라.
‘남조선해방전략당’ 사건으로 복역하다 대전교도소에서 암으로 숨진 이강복 씨의 아들은 38년 전 아버지의 주검을 찾으러 갔다. 그가 유언이라면서 받은 건 종이 한 장. 거기엔 “풀잎도 꽃잎도 애비 없듯이, 애비가 죽고 없어도 굳게 자활해 살아라.”란 글귀가 적혀 있었다고 한다.
“풀잎도 꽃잎도 애비 없듯이, 애비가 죽고 없어도 굳게 자활해 살아라.”
죽음을 앞두고 자식들에게 남길 유언을 쓰고 있는 아버지를 생각한다. 이 땅의 곡절 많은 현대사 곳곳에 얼룩진 것은 이런 죽음과 피눈물이다. ‘간첩’으로 ‘빨갱이’로 지탄받고 숨죽이며 살아온 세월, 40년이 지난 이제야 그게 ‘고문에 의한 조작’이라 한다. 그들이 감내한 그 40년의 세월은, 그 세월의 갈피마다 엉키고 서린 회한과 상처는 어쩌란 말인가.
40주기 추모제를 치르며 유족들은 자신들이 겪었던 고통의 세월을 떠올리고 뒤늦은 국가의 참회와 고백 앞에서 어떤 기분이었을까. 그들에게 국가는 무엇이었을까. 40년이라면 보통 사람들의 반평생에 해당하는 시간이다. 그 반평생을 숨죽여 살 수밖에 없도록 강제한 국가, 그리고 40년이 지난 뒤 그것이 ‘조작’이었다는 한 장의 결정문으로 내키지 않는 참회를 마감하는 국가란 대체 무엇인가.
다행히 그런 역사의 굴곡과는 먼, ‘장삼이사’ 아버지를 둔 것을 우리는 행운이라 생각해야 할까. 그 역사의 모진 손길이 나와는 무관하게 지나갔다고 가슴을 쓸어내려야 할까. 그래서 그게 몇몇 사람의 문제였다고, 분단 상황에서 부득이하게 일어난 일이라고, 시대적 특수 상황이라고 눙치고 말 수 있을까.
국가보안법 등으로 사형당한 이는 모두 180여 명
한홍구 교수에 따르면 국가보안법이나 반공법으로 사형을 당한 이는 박정희 정권 때 170여 명, 전두환 정권 때 10명가량이라고 한다. 또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 이후 남쪽 당국이 적발한 간첩이 1천여 명이고, 그 가운데 진짜 북에서 남파시킨 간첩은 50명이 안 된다고 한다.
그나마 해외 유학을 했거나 나름의 인맥도 있고, 또 민주화 운동이라도 했던 분들의 경우는 언론의 조명을 받고 과거사위의 조사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나머지 희생자 대부분은 억울한 ‘소시민’이라는 것이다. 그야말로 ‘국선변호인조차 귀 기울여 주지 않아 혼자서 맞춤법도 맞지 않는 탄원서 한 장 남겨놓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돈도 없고 빽도 없고 배운 것도 없고 증거도 없었던 사람들…….’(한홍구)이다.
그러나 그나마 과거사 진상규명을 위해 독립적인 국가기관으로 설치된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과거사위)는 오는 2010년 4월 해산된다. 아직 과거사 조상의 대상으로조차 오르지 못한 숱한 억울한 누명과 억울한 죽음은 어쩌란 말인가.
과거사정리위원회는 내년 4월 해산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지난 4년 동안의 활동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한계 때문에 만족스러운 성과를 내지 못한 게 사실이다. 그런데도 집권 여당은 국감 현장에서 “과거는 ‘역사’에 묻고 이제 정리할 때”, “과거사위 운영은 미래지향적인 사고를 하지 못하는 것”, “좌파 편향” 등의 발언을 하며 폐지를 촉구하고 있다고 한다.
과거사 정리는 말 그대로 ‘진실’과 ‘화해’를 위해서다. 그리고 진실이 규명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화해가 불가능하다는 건 상식이다. 과거사 정리를 ‘국론 분열’쯤으로 이해하는 보수세력의 인식은 걱정스러운 이유다. 그러잖아도 과거 군부 독재 시절의 폭압 통치 기구였던 안기부, 보안사 등이 이름을 바꿔 국정원, 기무사 등 새로운 폭압 통치 기구로 바뀌고 있다는 여론이 심상치 않다.
경제학자 권재혁을 비롯한 남조선해방전략당 사건 관련자들이 40년 만에 신원(伸寃) 되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뒤늦었지만 이들의 명복을 빈다. 지난 시대의 어두운 역사를 되돌아보는 뜻은 같은 어리석음을 되풀이하지 않고자 함이다. 그러나 되돌아보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여전히 역사의 신원을 기다리는 우리 시대의 한과 슬픔은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2009. 11. 4.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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