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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셍종엉젱’과 ‘세종어제’

by 낮달2018 2020. 10.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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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보 구조물에 새긴  훈민정음 언해본’ 표기 오류

▲ 여주보 . 인근에 세종의 능이 있어 해시계 ,물시계 등의 조형물을 설치하고 훈민정으 언해본을 새겨 놓았다 .

4대강 사업으로 한강에 건설한 여주보의 보 구조물에 새긴 ‘훈민정음 언해본’(언해본)의 표기 오류가 화제다. 얼마 전 일반에 개방된 여주보는 부근에 세종대왕릉이 있어 자격루(물시계)와 앙부일구(해시계) 조형물을 설치해 놓았는데 언해본을 새긴 구조물도 그런 기념물 가운데 하나다.

▲ 문제가 된 훈민정음 언해본의 어제 서문. 아래쪽의 원본과 비교해 보라 .

훈민정음 언해본은 한문으로 된 <훈민정음>에서 어제 서문과 예의(例義) 부분만을 한글로 풀이하여 간행한 책이다. 문제가 된 표기 오류는 이 세종이 지은 서문[어제 서문]의 첫 부분, ‘세종어제(世宗御制)’에서 나왔다.

 

옛이응, 쓸 자리엔 안 쓰고 안 쓸 자리엔 썼다

 

한자 ‘세종어제’를 당시의 표기로 쓰면 ‘솅종엉졩’으로 쓴다. 그런데 여기서 ‘엉’의 초성은 ‘옛이응’(꼭지 달린 이응)인데 꼭지 없는 ‘이응’(o)으로, ‘졩’의 종성(받침)은 꼭지 없는 이응이지만 꼭지가 달린 이응으로 새겨져 있는 것이다.

 

‘어’의 초성이 ‘이응’이든 ‘옛이응’이든 ‘발음 자체가 달라질 일은 없다. 그러나 15세기 중세국어로 표기한 것이니만큼 오류는 바로잡는 게 맞다. 그런데 더 중요한 문제는 사람들이 ‘솅종엉졩’을 무심코 현대 발음으로 읽는 일이다. ‘세종어제’가 아닌 ‘솅종엉졩’으로 읽으면서 사람들은 잔뜩 헷갈릴 게 틀림없다.

 

대체로 사람들은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서 훈민정음을 배운다. 그러나 일상어가 아닌, ‘고어’를 잊지 않고 기억하는 일은 쉽지 않다. 마땅히 당시의 어법을 헤아려 바르게 읽게 해 주는 배려가 필요한 까닭이 여기 있다. 옛글을 새기는 데 그칠 게 아니라 친절한 해설이 아쉽다는 얘기다.

 

훈민정음 음운체계에서 꼭지 없는 이응(ㅇ)은 ‘여린히읗’(ㅎ에 꼭지가 없는 글자)과 함께 한자음을 표기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연히 그것은 형식적인 자음일 뿐 실질적인 자음이 아니었다. ‘형식적’이라 함은 소릿값[음가(音價)]이 없다는 뜻이다. 이응은 묵음(默音)이므로 ‘솅종엉졩’는 ‘세종어제’라 읽어야 하는 것이다.

▲훈민정음 언해본 서문

우리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는 서로 통하지 아니 하여서 이런 까닭으로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가 이것을 가엾게 생각하여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니,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쉽게 익혀서 날마다 쓰는 데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다.

어제 서문에 나와 있듯이 훈민정음은 초성(자음) 17자에 중성(모음) 11자의 ‘스물여덟 자’ 체계다. 알려진 대로 자음은 발음기관을 모양을 본떠서 만들었는데, 초성 체계는 당시의 국어 현실에 맞지 않는 것이었다. 한자음을 중국 원음에 맞추려고 동국정운의 음운체계를 따른 결과였다.

 

초성 17자에는 된소리(ㄲ, ㄸ, ㅃ, ㅆ, ㅉ)도 제외되어 있다. 중세국어에서 널리 쓰인 ‘순경음 ㅂ’도 빠져 있다. 순경음 ㅂ은 국어에서는 쓰였지만, 동국정운의 한자음에는 쓰이지 않았기 때문에 초성 체계에서 제외된 것이다.

 

그러나 영국의 언어학자 제프리 샘슨은 일찍이 훈민정음의 초성 체계의 독창성을 확인했다. 샘슨은 기본글자(ㄱ)에 획을 더해 동일 계열의 글자(ㄲ, ㅋ)를 만든 독창성은 어떤 문자에서도 볼 수 없는 것이라고 칭송한 것이다.

 

한편 훈민정음의 중성 체계에 나타난 것은 천지인 삼재(三才) 사상이다. 세상의 궁극적 근거를 하늘, 땅, 사람으로 바라보는 삼재 사상은 훈민정음 모음체계의 바탕이다. 삼재를 상징하는 기본글자를 서로 조합하여 초출자와 재출자를 만들어 낸 것은, 자음에서 기본자에 가획하는 형식과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일반인에게 어학은 낯설고 어려운 일이긴 하다. 그러나 억지로 암기하여야 하는 지식으로서가 아니라 우리 문자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과 관심으로 접근하면 그것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닐 성싶다. 이 가을, 차분하게 우리 한글의 이모저모를 한번 살펴보는 것은 어떨는지…….

 

 

2011. 10. 18.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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