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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가겨 찻집

“치료하실게요”라고요?

by 낮달2018 2020. 10.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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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 치료하실게요.”라고?

 

요즘 한의원에 다니고 있다. 반년이 넘었는데도 낫지 않는 목과 어깨의 통증 때문이다. 한 달 전만 해도 조금 찌뿌둥한 수준이었는데 지금은 뻣뻣해진 목을 움직이면 미세한 통증이 오곤 한다. 정형외과에서 방사선 사진을 찍었더니 의사가 목 디스크 기운이 있다더니 그게 빈말은 아니었던 게다.

 

젊은 의사가 놓는 침이 듣는 것 같아서 그간 세 번에 걸쳐 치료를 받았다. 찜질과 전기 치료, 침에 부항까지 시술받고 나면 몸이 좀 가뿐해지는 느낌이 있었다. 집에서도 멀지 않아 얼마간 더 다녀볼까 생각 중이다.

 

이 병원에서는 간호사는 물론이고 젊은 한의사도 말끝에 ‘~하실게요’를 붙이는 독특한 화법을 구사하고 있다. 어쩌다 그랬으면 무심히 넘어갔을 텐데, 이들은 자주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들이 말할 때마다 나는 머릿속에서 그걸 교정해 듣곤 한다.

 

“외투 벗고 누우실게요.” ( → “누우세요.”라고 해야지.)
“우선 물리치료부터 하실게요.” ( → 당신이 하니까 “할게요.”라고 해야 맞아.)
“10분 후에 침 치료하실게요.” ( → “치료할게요.”라고 해.)
“부항 치료하실게요.” ( → ‘하시지’ 말고 그냥 하셔.)

 

이 묘한 화법은 2013년 인기리에 방영된 KBS 2TV ‘개그콘서트’에서 유래했다. 어떤 여자 코미디언이 이 프로그램의 한 꼭지에서 “○○ 언니 ~하고 가실게요.”라고 하는 대사를 계속하면서 당시 유행어가 된 것이다. 이 화법은 시청자들만 따라 한 게 아니라, 각종 광고에도 쓰이기에 이르렀다.

미디어가 언중들의 언어생활에 무시하지 못할 정도의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실증적으로 드러낸 사례다. 신문이 꽤 촘촘한 교열 과정을 통해 맞춤법이나 어법의 오류를 걸러내는 데 비기면 방송은 구멍이 많다. 영국의 <비비시(BBC)> 방송의 영어가 표준 영어로 인정받는 것은 정책적인 노력의 결과라는 점에서 시사점이 크다.

 

이 말은 당시에도 어법에 어긋난다는 지적을 받았었다. 내 기억엔 없는데 이 꼭지가 방영될 때 ‘잘못된 표현’이라는 내용을 자막에 내보냈다는 것이다. 이 말의 바른 표현은 ‘~할게요.’, 또는 ‘~하겠습니다.’다.

 

‘-ㄹ게’는 “모음이나 ‘ㄹ’로 끝나는 동사의 어간 뒤에 붙어, 상대에게 어떤 행동을 할 것을 약속하는 뜻을 나타내는 말.”(<다음 한국어 사전>), 종결어미로 쓰인다. “내일 아침에 갈게.”나 “이제부턴 술도 끊고 담배도 끊고 새사람이 될게.”처럼 쓴다.

 

이형태로는 ‘-을게’(“그건 내가 먹을게.”)가 있다. 아직도 이를 ‘-ㄹ께’로 쓰는 이들이 적지 않은데 이는 비표준어다. [관련 글 : ‘되/돼’, ‘할께/할게’, 어느 게 맞아?]

 

‘-하실게요’에 쓰인 ‘-시-’는 문장에서 주체를 높이기 위해 쓰는 ‘주체높임 선어말어미’다. 이는 “아버지께서 말씀하시었다.”, “선생님께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니?”에서처럼 쓰인다. 그러나 자신을 주체로 한 문장에서는 쓰지 않는다. 아무도 자기를 높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실게요.’는 약속하는 주체가 ‘나’인데도 높임의 ‘-시-’를 씀으로써 같이 쓸 수 없는 두 문법요소가 붙어 서로 부딪치고 있다.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이 말이 인기를 끈 배경은 바로 이 모순 요소를 결합한 것일지도 모른다.

 

‘거’를 ‘꺼’로 쓰는 이들도 많다

 

‘-ㄹ게’의 ‘게’를 된소리(‘께’)로 잘못 쓰는 사례는 다른 말의 쓰임으로도 전이되는 모양이다. 의존명사 ‘것’의 구어적 표현을 대체로 된소리로 발음하는 경우처럼. 그래서인지 아예 표기도 된소리로 해 버리는 사례가 적지 않다.

 

의존명사 ‘것’은 “주로 관형사형 어미 ‘-을’의 뒤에 쓰여, 앞에서 말한 내용에 대한 추측이나 예상을 나타내는 말.”로 쓰인다. “내일은 아마 비가 올 거야.”처럼 쓰이는, 이른바 구어적 표현이다.

▲ 인기 연극의 제목에도, 만화 제목에도 '꺼'가 쓰였다.

그런데 문제는 이 ‘거’를 ‘꺼’로 쓰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거다. 지금도 공연 중인 연극 <오월엔 결혼할 꺼야>는 포스터에서조차 노골적으로 ‘꺼’로 쓰고 있다. 설마 맞춤법을 몰라서 그리 쓴 건 아닐 테지만 그렇게 소리 나는 대로 써서 무엇을 얻으려는지 궁금하다.

 

또 의존명사 ‘것’은 “주로 사람이나 무리의 뜻을 나타내는 명사나 대명사의 뒤에 쓰여, 그의 소유물임을 나타내는 말.”로도 쓰인다. “이 밭이 다 영호네 거라고?”처럼 말이다. 이 경우에도 아이들 어른 할 것 없이 ‘거’를 된소리 ‘꺼’로 표기하는 경우가 많다.

 

‘니꺼 내꺼’라고 쓰지만, 이는 ‘네 거 내 거’라고 쓰고 ‘거’는 의존명사니까 반드시 띄어 써야 한다. 핸드폰에다 ‘아무개 꺼’라고 써 다니는 아이들을 보면서 나는 아이들이 ‘거’를 ‘꺼’라고 잘못 알고 있는지 아니면 일부러 그런지 헷갈리곤 했다.

 

고대 국어에서 한국어 말소리는 예사소리[평음(平音)]뿐이었다. 코도 ‘고’였고, 칼도 ‘갈’, 뿌리도 ‘불휘’였다. 이러한 말소리가 중세 이후 점차 된소리나 거센소리로 강음화(强音化)되었다. 이는 전쟁이나 기아 상태와 같은 사회적 격변 사태가 언어의 소리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풀이한다.

 

그런데 전쟁도 가난도 없는 요즘, 된소리가 만연하게 되는 것은 절대적 가치 붕괴에 따른 무질서와 과소비, 퇴폐풍조, 폭력 사태 등으로 얼룩지는 사회 병리 현상 때문이라고 보는 것 같다. 한편으로 된소리는 예사소리보다 훨씬 분명하게 대상을 가리키기 때문에 선호하는 측면도 있을 듯하다.

 

바른 말글 생활은 의식적인 노력으로 이루어진다. 의식적으로 두세 차례만 제대로 쓰면 말은 입에 붙게 된다. 그런데도 글을 쓸 때, 제대로 쓰는지를 살피는 일로도 맞춤법과 어법에 어긋나지 않는 글을 쓸 수 있게 되는 걸 사람들은 잊어버리고 있다.

 

 

2018. 5. 6. 낮달


오늘 금년도 건강진단 예약을 하러 갔다가, 모처럼 다시 ‘-ㄹ게요’를 들었다. 진료를 기다리는 환자를 향해 간호사가 “아무개 님, 진료실에 들어가실게요.”라고 쓴 것이다. 글쎄, 우리 지방에는 쉽게 들을 수 있는 말이 아닌데, 8년째 이용하는 병원에서 이 말을 또 들을 줄은 몰랐다.

 

2020. 10.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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