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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텃밭일기

[2010 텃밭일기 ⑨] 거둠과 이삭(2)

by 낮달2018 2020. 10.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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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주말에 우리는 ‘밭을 놓았다’. 고춧대를 모두 뽑아 고랑에다 뉘어 놓았다 .
▲  밭을 놓고 나자 드디어 우리 텃밭은 지난 4월의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  올 농사가 끝난 것이다 .

그간 모두 여덟 편의 ‘텃밭일기’를 썼다. 첫 일기는 4월 28일 텃밭농사를 짓기로 결정한 뒤 밭에 퇴비를 뿌린 일에 대한 기록이다. 그리고 파종, 햇상추, 개화, 결실, 병충해에 관한 이야기를 한 꼭지씩 다루었고 9월 5일에 올린 마지막 여덟 번째 일기는 고추를 거두고 이를 말린 이야기였다.

 

아파트 어린이 놀이터의 구조물 지붕과 에어컨 실외기 위 등을 오가며 건조한 고추는 아내가 방앗간에 가 빻았더니 네 근 반쯤이 나왔다고 했다. 한 열 근은 너끈히 거둔다고 했던 이는 이웃 이랑에서 고추를 지었던 선배다.

 

“애걔, 겨우 그거야?”

“올 고추 농사는 다 그렇대. 그간 우리가 따 먹은 풋고추를 생각해 보우. 감사하고 감사할 일이지 뭐…….”

 

맞다. 뒷간 갈 적과 볼일 보고 난 다음의 마음이 다른 것일 뿐이다. 지난 여름내 우리가 따 먹은 풋고추가 얼마였던가. 그리고 날마다 굵어지는 그놈들을 보며 우리 내외는 얼마나 기쁘고 행복했던가. 거기서 따 먹은 고추뿐인가. 가지도 있고 오이도 있다.

 

9월 5일 여덟 번째 일기를 올린 지 한 달 보름이 훌쩍 지났다. 그 동안 나는 거의 밭에 걸음을 하지 않았다. 9월 중순에 고추를 보러 갔다가 맥이 풀리고 나서부터다. 대충 굵은 놈은 따냈지만 여전히 빽빽하게 달린 고추를 기대하고 갔는데 고추는 그 동안 시나브로 번지던 병충해로 거의 결딴이 나 있었다.

 

곱게 붉어진 고추의 선홍색 살결에 번진 병충해의 흔적은 참혹했다. 탱탱하던 윤기와 탄력을 잃고 시들기 시작한 고추 과육은 이내 흐물흐물해지고 허옇게 말라간다. 종당에 남은 것은 속이 말라버린 빈 껍질뿐이다. 병에 걸린 놈들은 제대로 자라지도 않는 모양이다. 이내 무슨 애벌레처럼 안으로 오그라지고 만다. 병충해가 미처 옮지 않은 놈들도 지레 커다 만 느낌이다.

 

으레 그러리라는 걸 짐작하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막상 그 꼴을 보니 아예 맥이 빠졌다. 마치 지난 여름내 지은 텃밭농사가 마치 허구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고랑에 떨어져 수북하게 쌓인 벌레 먹은 고추의 잔해, 싱싱하게 물이 올라 검푸르던 잎은 윤기를 잃고 튼튼해 뵈던 줄기도 앙상해진 밭 주위를 둘러보는 마음은 허허로울 수밖에 없었다.

 

▲  지난  9 월 중순에 미리 캐 본 우리 호박고구마 .  나머지는 얼마 전에 했다 .
▲  우리가 수확한 호박고구마 .  종이상자 하나의 분량밖에 안 된다 .

“내년에는 고추는 대여섯 포기만 지어 풋고추나 따 먹지 뭐. 앞에다 푸성귀라도 좀 갈까요?”

“됐어. 이제 고구마나 걷고 말지 뭐.”

“내년에는 여보, 고구마를 많이 갑시다.”

“됐어. 내년에 또 이 짓을 하자고? 이제 그만할 때도 됐지 않아?…….”

 

그러고 지지난 주에 아내는 혼자서 고구마를 수확했다. 고구마도 변변찮다. 굵기는 괜찮은데 전부 다 자라면서 겉이 터져버렸다. 성장이 빠르게 이루어지면서 일어나는 현상이라 했다. 어쨌든, 나는 고구마는 별로 당기지 않았다. 수확한 고구마는 중간 크기의 종이상자 하나쯤의 분량이다.

 

아내는 그것만으로도 기꺼워한다. 호박고구마는 아이들이 매우 좋아한다. 처음 수확한 걸 구웠을 때는 물기가 부족해서 맛이 별로였는데 한 열흘쯤 지난 뒤에는 물기도 적당해서 제법 호박고구마 맛이 났다. 고무된 아내는 내년에는 고구마 농사를 제대로 짓자고 하는데 나는 심드렁하기만 했다.

 

그리고 지난 주말에 텃밭을 놓았다. ‘놓는다’는 것은 수확을 끝내고 다음 농사를 준비하기 위해 논밭을 갈아엎거나 마지막 남은 작물들의 수확을 포기하는 것을 이르는 우리 고향 말이다. 밭을 ‘놓는다’‘’는 것은 오래 몸에 붙여 온 농사를 푼다[放]는 의미로 보면 될 듯하다.

 

나는 먼저 고춧대를 버티게 하려고 쳐 놓은 비닐 끈을 자르고 지지대를 뽑았다. 그것도 뽑아보니 적지 않다. 그리고 이랑에 시들고 있는 고추를 포기째 뽑아냈다. 짜부라진 줄기는 쉬 뽑혀 나왔다. 그걸 고랑에다 비스듬히 일렬로 뉘어두는데 기분이 참 쓸쓸해진다.

 

잠시 만에 작업은 끝난다. 어느새 이랑은 우리가 지난 4월에 처음 농사를 시작하던 때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밭의 꼬락서니는 그때보다 훨씬 쓸쓸하고 황량하다. 이랑을 덮었던 검은 비닐도 벗겨내야 하는데 연장도 없고 어느새 날이 어두워진다.

 

6시가 되지 않아 사방은 어둑해졌다. 비닐 끈으로 묶은 지지대를 어깨에 메고 밭을 나섰다. 아내는 밭 어귀 언덕바지에 심었던 호박 덤불에서 조그만 애호박 몇 개를 따서 쥐고 있다. 나는 썩 마음이 애잔해져서 아내에게 물었다.

 

“내년에도 할 거야?”

“당신은 어때요? 고추는 조금만 심고 고구마를 좀 많이 심으면 좋겠는데…….”

“모르겠어. 내년에 다시 생각해 보지, 뭐…….”

 

이번 주말에는 밭에 들러 비닐을 걷어내는 것으로 올 농사를 마무리할 작정이다. 우리보다 훨씬 부지런하고 알뜰한 이웃 농부들은 가을배추와 무를 길러 아주 보기 좋게 키워놓았다. 우리 밭 양옆으로 시퍼렇게 자라난 배추와 무밭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다시 우리가 얼치기 농부라는 걸 인정할 도리밖에 없다.

 

 

2010. 10. 27.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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