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장마가 띄엄띄엄 계속되고 있다. 가뭄으로 말라가던 고추는 아연 생기를 얻었고 뒤늦게 새로 꽃을 피우기도 한다. 그러나 이미 때는 많이 늦었다. 이웃의 고추는 물론이거니와 우리 고추도 이미 빨갛게 익어가고 있는 것이다.
밭에 당도한 병충해는……, 결국 ‘불감당’이었다. 그럴 수 없이 잘 자라 미끈한 인물을 자랑하던 고추가 구멍이 뚫리거니 시들시들 고는 걸 지켜보는 것은 못할 짓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하는 수 없다. 결국 센 놈만 살아남는 것……, 인간의 삶도 다르지 않다.
아내와 나는 사나흘 간격으로 밭에서 익은 고추를 따 왔다. 고추를 따 보면 뜻밖에 내가 지은 농사가 만만찮다는 생각을 아니 할 수 없다.
“우리 지은 농사가 수월찮지?”
“그럼! 우리가 그 동안 얼마나 고추를 따다 먹은 지 아우? 그걸 다 금으로 매길 순 없는 거니까…….”
비닐봉지에다 한가득 고추를 따서 집으로 돌아오는 걸음은 가벼울 수밖에 없다. 한 해 농사를 거두는 ‘농부의 마음’을 들먹이는 것은 외람된 일이다. 식탁의 광주리에 옮겨 담은 고추를 바라보며 우리 내외는 배가 불렀다.
그러나 ‘고추 말리기’는 복병이다. 아내는 고추 광주리를 들고 종종걸음을 쳤다. 베란다가 적당할 듯하지만, 햇볕이 시원찮아 별로다. 아내는 결국 아파트 놀이터에 있는 시멘트 구조물 지붕을 선택했는데 문제는 시시때때로 내리는 비다. 바깥 날씨가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가 비가 올 조짐을 보이면 잽싸게 내려가 고추를 걷어 와야 하는 것이다.
아내는 말리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가위로 고추를 일일이 길쭉하게 잘라냈다. 그 바람에 씨는 대부분 버려야 한다. 그래도 눅눅한 날씨는 여전히 강적이다. 습기 때문에 곰팡이가 슨 고추를 버리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내는 애가 말라 궁리를 거듭한다.
“불로 구워서 고추 말리는 데 맡길까?”
“참아, 이 사람아. 고작 서너 근 분량인데 어쩌겠다고……. 되는 대로 집에서 말려.”
아내의 궁리는 베란다 앞의 에어컨 실외기에 미쳤다. 어느 날 퇴근해 오니, 아내가 반색한다. 실외기 위에다 고추를 널어 말리는데 왜 진작 그 생각을 못 했는지 모르겠단다. 물론 거기 얹을 수 있는 양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점은 아쉽다. 나는 방충망 창을 열고 그 장면을 렌즈에 담았다.
글쎄, 가을이 가기 전에 우리가 수확할 고춧가루는 얼마나 될까. 저리 어렵게 말린 고추는 나중에 방앗간에 가서 빻으면 건강한 선홍빛으로 되살아날 것이다. 그걸 어찌 불에 구운 ‘화건(火乾)’ 고추에 비길까. 아내가 고추를 말리기 위해 들이는 노력과 조바심은 곱게 빻은 고춧가루가 충분히 보상하고도 남음이 있으리라.
더위와 병충해에 마음이 상해서 나는 텃밭을 한동안 잊고 지냈다. 어제 밭에 다녀온 아내는 땅콩도 캐야 하고, 상추 뽑아낸 자리에 배추나, 가을 상추라도 심어야 하지 않겠냐고 성화다. 글쎄, 그러든지……. 심드렁하게 대꾸하면서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지만 오는 가을, 계절의 순환이 분명이 손에 잡히고 있다는 걸 나는 시나브로 깨달아 가고 있다.
2010. 9. 5.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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