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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촌 시대? ‘한글이 보이지 않는다’

by 낮달2018 2020. 10.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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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없는 565돌 한글날…영어 없이는 못 사는 지자체와 정부 부처

▲ 올 한글 주간 주제는 ‘한글로 통하다’이다.

565돌 한글날(10월 9일)을 맞는다. 한글날은 2005년 우여곡절 끝에 ‘국경일’의 지위를 회복했지만, 여전히 공휴일과는 거리가 먼 날인데 올해는 공교롭게도 일요일과 겹친다. 아침저녁으로 부는 바람이 예사롭지 않더니 이날은 ‘찬 이슬이 맺힌다’라는 ‘한로(寒露)’다.

 

한글날을 즈음한 우리의 대응은 여느 해와 다르지 않다. 예년처럼 주무 부서인 문화체육관광부는 한글 주간(10.3.~10.9.)을 정하고 한글날 누리집을 열었다. 565돌 한글날, 한글 주간 주제는 ‘한글로 통하다’이다.

 

“한글로 세계를 향하고 한글로 하나가 되며,

한글로 함께하는 사회

우리는 한글로 통합니다.”

 

누리집에는 ‘유네스코 세종대왕상 초청 행사’를 비롯하여 전시와 공연 등의 문화예술 행사와 학술·참여 행사 등을 안내하고 있다. 누리꾼들의 시선을 자극할 만한 형식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데 그나마 눈길을 끄는 것은 ‘2011 한글 주간 모바일 웹페이지’ 안내다.

 

▲ 한글날 이벤트 행사

바야흐로 지금은 사회관계망 서비스(SNS, 국립국어원은 이를 ‘누리소통망’으로 순화했다) 시대인 것이다. 누리집 위쪽에 나란히 박힌 트위터·페이스북·미투데이 등의 아이콘이 전혀 낯설지 않다. 그런데 왼쪽 아래에 소개된 페이스북 이벤트가 눈길을 붙잡는다.

 

“폴리 氏와 함께하는 ‘너도나도 한글 사랑’”이라는 행사다. ‘폴리 씨?’ ‘폴리가 누구지?’ 잠깐 머리가 어지럽다. 정부 대표 페이스북이라는 ‘폴리 씨’가 영자 ‘폴리시(policy)’라는 걸 알아챈 것은 한참 후다. 역시 나는 이 글로벌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지진아다.

 

영자 ‘폴리시’를 ‘폴리 氏’로 풀어낸 감각을 칭찬하여야 할까, 아니면 ‘씨’를 이해 못 할까 봐 아예 한자로 써준 친절을 높이 사야 할지 잠시 헛갈린다. 인터넷 시대에 정부를 영자로 표기한 것을 구태여 나무랄 일은 아니다.

 

‘영어 몰입교육’ 소동으로 임기를 시작한 현 정부가 구체적 정책을 통해서 한글을 무시하거나 영어를 우대한 것은 아닌 듯하다. 그러나 예의 ‘어륀지’ 소동은 영어가 이 나라의 ‘국어’보다 훨씬 더 정치적·사회적으로 우월한 언어이며, ‘영어 능력’이 매우 유효한 계급적 표지라는 사실을 환기해 주었던 것은 분명하다.

 

영어 남용, 주류 언어에 대한 짝사랑?

 

생활 속에 영어가 ‘지나치게’ 쓰이기 시작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이미 국제어의 지위를 갖게 된 영어를 굳이 꺼릴 일은 없다. 그러나 마치 모국어처럼 영어를 쓰지 못해 안달하는 듯한 모습에서 드러나는 것은 나라글자와 영어에 대한 전도된 의식이다. 국제화·세계화라는 패러다임에 기대고 있긴 하지만 그것은 주류 언어, 주류 문자에 대한 짝사랑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어저께 한 일간지에 ‘예술의 전당’을 찾아달라는 독자 투고가 실렸다. “서울 서초동 우면산 자락에 있던 그 ‘예술의 전당’이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보이지가 않”고 “지도에도, 거리의 안내판에도 있다고는 되어 있는데 그곳에 가면 ‘예술의 전당’은 보이지 않고 대신 ‘Seoul Arts Center’라는 것이 들어서 있”다는 것이다.

 

시골에 살아서 자세한 사정을 알 수 없지만, ‘로마자 알파벳이 한글 사용을 대체하는 현상’ 같다는 투고자의 우려는 이미 일상이 되었다. 엘지(LG)나 에스케이(SK), 케이티(KT) 같은 대기업은 말할 것도 없고, 조그만 구멍가게의 상호조차도 영자를 서슴없이 쓰는 형국이 된 것이다.

 

▲ 각 시도별 상징 구호

이런 현상을 좇는 것은 기업만이 아니다. 광역과 기초를 막론하고 지방자치단체들은 ‘글로벌’ 시대를 맞아 이른바 ‘브랜드 슬로건’(상징 구호) 제정에 앞다투어 나선 것이다. 서울특별시가 ‘하이 서울’로 앞서갔고, 이어서 6대 광역시가 뒤를 이었다.

 

‘다이내믹 부산’, ‘컬러풀 대구’, ‘플라이 인천’, ‘잇츠 대전’, ‘유어 파트너 광주’, ‘울산 포 유’ 등이 그것이다. 각 도(道)도 빠질 수 없다. ‘글로벌 인스퍼레이슨 경기도’, ‘라이블리 강원’, ‘필 경남’, ‘프라이드 경북’, ‘하트 오브 코리아 충남’, ‘온리 제주’ 등이다.

 

16개 시도 가운데 영자로 된 상징 구호를 내세우지 않은 곳은 세 곳이다. 전라남도가 ‘녹색의 땅 전남’이라는 한글 구호를 쓰고 있는 것을 비롯해 전북이 ‘천년의 비상 전라북도’, 충북이 ‘생명과 태양의 땅 충북’을 쓰고 있다. 전남은 한글 상징 구호 아래 ‘그린 전남(Green Jeonnam)’이라는 영자를 병기하고 있지만, 전북과 충북은 통합브랜드로 한글 구호만을 쓰고 있다.

 

브랜드 슬로건(상징 구호) 유행

 

광역 자치단체가 앞서가니 기초 자치단체도 뒤질세라 따른다. 경상북도의 경우 포항(파워풀 포항), 구미(예스 구미), 경주(뷰티풀 경주) 등의 시는 물론 봉화(파인토피아 봉화), 울진(마린피아 울진) 등 오지의 군에 이르기까지 상징 구호로 호응하고 있다. 오히려 안동, 의성, 경산 등의 시군에서 이런 상징 구호를 쓰고 있지 않은 게 이채로울 정도다.

 

▲ 경북 각 시군의 상징 구호

‘글로벌’ 시대여서 영자로 된 상징 구호가 필요하다는 판단은 지자체에 따라 달리할 수 있을 터이다. 그러나 지자체별로 이를 무슨 유행처럼 다루며, 고장의 성격과 무관하게 감각적인 낱말을 억지로 조합하고 있는 건 그리 조화로워 보이진 않는다.

 

‘하이 서울’, ‘잇츠 대전’, ‘온리 제주’, ‘필 경남’, ‘프라이드 경북’ 따위의 구호가 실제로 당해 시도의 어떤 특성과 연관된 내용인지 아무도 모른다. 그것은 내용이 아니라 그런 낱말 자체가 환기하는 어떤 즉물적, 감각적 인상을 급조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브랜드 슬로건뿐 아니라, 지자체에서 시행하는 각종 정책이나 사업 이름에도 영어는 차고 넘친다. 이 부분의 메달감은 역시 ‘서울특별시’다. 서울시가 공급하는 장기 전세 주택의 이름은 ‘시프트(SHIFT)’고 ‘르네상스’는 서울시가 펴는 사업 곳곳에 ‘돌림자’처럼 붙는다. 한강 르네상스와, 서울 거리 르네상스….

 

무주택 서울시민의 주거 안정을 위해 서울시에 의해 설립된 지방 공기업의 이름은 ‘SH공사’다. ‘Seoul Housing’의 약자라는 이 뜬금없는 이름은 ‘Housing’을 공유하고 있어 정부 공기업인 ‘LH공사’(Korea Land and Housing Corporation)와 사촌 간이다.

 

서울지하철공사 대신 ‘서울 메트로’가 세련을 뽐내고, ‘클린 재정’, ‘시민패트롤’, ‘서울 리뉴얼’, ‘그린 트러스트’, ‘시니어 패스’, ‘비전 갤러리’ 등의 영어투성이로 된 이름들은 현란하다. 그 세련된 영어식 이름이 서울시의 사업을 빛내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런 이름만으로 그 내용을 짐작할 수 있는 ‘세련된’ 서울시민은 얼마나 될까.

▲ 서울시 누리집에 게시된 서울시정. 영어 이름이 다양하게 쓰였다.

서울시 누리집 초기 화면에 뜬 ‘주요 시정’ 항목에도 ‘서울 희망플러스 통장’, ‘서울형 데이케어 센터’, ‘서울 일자리 플러스센터’, ‘여성 행복 프로젝트’ 등의 이름에도 감초처럼 ‘플러스’와 ‘프로젝트’라는 단어를 끼워 넣었다. 그런 영어식 이름이 서울시의 사업을 다른 시도의 ‘촌스러운’ 이름과 차별 짓는 것일까.

 

영어식 이름의 진화, ‘마더하세요’

 

▲ 상징 구호를 한글로 쓰고 있는 지자체들

영어식 이름은 돌연변이로 진화한다. 보건복지부에서 펴는 출산장려 캠페인의 이름은 ‘마더하세요’이다. 마더는 영어의 어머니(mother)를 떠올리게 하지만 정작 그 뜻은 ‘마음을 더해주는 것’이란다. 이쯤 되면 ‘말장난’이다. 비슷한 예로는 ‘일어서自’, ‘중소企UP’, ‘여행(女幸) 프로젝트’ 등이 있다.

 

“언제나 마음을 더해주는 당신, 당신이 마더입니다. 마더하세요!”

 

‘마더하세요’가 ‘엄마 되세요’로 들린다면 이 전략은 성공한 셈이다. 모국어와 외래어(외국어)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데서부터 언어의 정체성은 흔들리기 시작하는 것일 테니까.[관련 글 : ‘마더(mother)하세요’, 혹은 ‘엄마 되세요’?

 

‘드라이(dry)하다’나 ‘패스(pass)하다’는 드디어 국어사전에 표제어로 올랐다.[관련 글 : ‘슬림(slim)하고 샴푸(shampoo)하다’?]

 

영어와 접미사 ‘-하다’의 결합을 자연스러운 국어의 변천 과정으로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긍정적으로 보면 국어의 의미 범주가 확대된 것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그 반대 측면, 영어가 우리말 낱말의 영역까지도 침범한 것으로 보는 게 훨씬 타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좋든 싫든 국제화, 지구촌 시대다. 다른 언어에 대한 개방적 태도가 필수 덕목으로 요구되는 시대라는 뜻이다. 그러나 2011년 현재 이 나라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이 이상한 ‘영어 바람’은 국제화 시대의 요구와 무관한 일종의 자기 폄하, 모국어 학대처럼 보인다.

 

우리말로 대체할 수 있는 것까지 영어로 쓰지 못해 안달하는 듯한 이 현상이 염려스러운 것은 거기 담긴 ‘무의식적 선망’ 때문이다. 영어나 영어로 표현되는 사물이나 낱말에 부여되는 의미가 ‘우리 것’에 대한 무의식적 열등감의 반향일 수 있다는 뜻이다.

 

근대화 과정에서 우리는 압도적인 서구 문화의 세례를 받으며 모든 표준을 외부에서 구하는 ‘전도’를 겪었다. 우리는 양악을 먼저 배우고 그것을 잣대로 국악을 바라보고, 서양 미술을 통해 한국화를 이해하는 엄청난 가치 전도의 시대를 살아온 것이다.

 

영어 광풍은 모국어 ‘학대’

 

내부의 잣대를 당당하게 갖지 못하고 늘 외부(서구)에서 표준을 가져오는 오래된 관습으로 자신과 우리 문화 자체에 대한 폄훼를 내면화하게 되었던 게 아닐까. 우리의 고유한 관습을 서구의 그것 아래에다 놓는 사고의 ‘식민성’을 벗지 못하고 있는 이유도 비슷하지 않나 싶다.

 

연예인 그룹 이름으로나 쓰이던 영어가 개인의 이름으로 자리를 옮겨가는 현상이라든가, 대중가요의 가사에 영어가 자연스레 섞이는 현상은 이미 일종의 추세가 되어버린 느낌마저 있다. 가수가 내는 앨범의 이름도, 콘서트의 이름도 낯선 영자가 대신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렇다. 이미 이 땅에서 영어는 시나브로 모국어를 밀어내고 이미 주류의 언어, 그러나 미처 다다를 수 없는 선망의 문자가 되어가고 있다. 왕조 시대에 한문이 지배층의 문자였듯 사람들은 차별적인 영어 능력으로 엘리트 계급에 편입되고 싶어 하고 있다.

 

정례적 ‘영어 듣기’ 시험이 전국의 모든 학교에서 일제히 실시되는 나라, 토익이나 토플 따위의 영어 능력을 재는 시험에 젊은이들이 자신의 미래를 걸지 않으면 안 되는 나라의 모국어는 외롭고 초라하다.

 

가장 위대한 문자라고 칭송되지만 정작 그 나라 사람들은 그 귀함과 고마움을 잘 모르는 이 문자가 세상에 선 뵌 지 오백예순다섯 돌이 되었다. 한글은 지구상 100여 개의 문자 가운데 만든 사람과 제자의 원리와 이념이 정리된 유일한 문자다.

 

그러나 한글이 가진 이 ‘유일성’도 ‘위대성’도 ‘과학성’도 이 땅에 횡행하는 영어 광풍 앞에서는 무력하기만 하다. 10월 9일을 하고 많은 일요일이 아니라 ‘한글날’로, 이 민족에게 읽고 쓸 수 있는 문자가 주어진 역사적 시간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한글날은 공휴일도 아니고, 학교에서는 이제 기념식 따위도 베풀어지지 않는다. 다가오는 월요일, 난 예년처럼 양복을 갖춰 입고 출근할 것이며 아이들에게 문병란 시인의 ‘식민지의 국어시간’을 읽어 줄 것이다. 그것이 한글을 가르치는 모국어 교사로서 내가 치르는 쓸쓸한 ‘통과의례’인 것이다.

 

 

2011. 10. 9. 낮달

 

 

 

"마더하세요"?... 이건 학대입니다

[주장] 한글 없는 565돌 한글날... 영어 없이는 못 사는 지자체와 정부부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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