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한글날에 읽어보는 박일환의 <미친 국어사전>
570돌 한글날이다. 때를 맞아 신문, 방송 등 매체들은 저마다 심각하게 ‘한글’을 소환한다. 한 해 내내 무심히 잊고 지내다가 문득 그 존재를 발견이라도 한 것처럼 매체마다 ‘한글’에 대한 이야기가 풍성해지는 것이다. 새삼 한글의 가치를 확인하고, 잘못 쓰이고 있는 말글을 돌아보고, 우리말 상식과 맞춤법도 불러내기도 한다.
그러나 한글날 주간을 즈음하여야 관련 기사를 쏟아내는 이런 보도 형태는 결국 평소에 한글이 받아온 나라 글자의 지위에 걸맞지 않은 홀대를 반증할 뿐이다. 새삼 과학성과 합리성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세계 최고의 문자’라고 강변해 보았자 영어에 밀리고 치이는 현실에서 그 울림은 공허할 뿐이다.
국어사전을 잘 이용하지 않는 것도 그런 현실에서 비롯되었다. 워낙 융숭한 대접을 받는 언어라 어릴 때부터 부득이 끼고 살 수밖에 없는 영어사전과는 경우가 다르다. 국어사전의 도움을 받지 않는 것은 ‘쉬운 모국어’라서가 아니라 한글을 잘못 써서 타박 들을 일이 별로 없어서 그렇다.
영어 철자 하나를 빼먹은 것은 ‘쪽팔리는’ 일이다. 그러나 한글 맞춤법이나 띄어쓰기를 어기는 일을 부끄러워하는 이는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거기에는 ‘우리말은 너무 어렵다’라는 ‘씨알 먹히는’ 변명이 준비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건 긴가민가하면서도 굳이 국어사전을 찾아보지 않아도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의당 우리 말글 쓰기의 전범이 되어야 할 <국어사전>도 만만치 않다. 아무 문제의식 없이 사전을 이용하는 이들에겐 상관없는 일이지만, 국어사전이 우리 언어의 보물창고이며, 우리 언어생활의 길잡이 구실을 해야 한다고 믿는 이들 가운데 <국어사전>에 대한 아쉬움을 말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낯선 낱말 가득한 이 사전
<미친 국어사전>이라는 도발적 제목의 책을 펴낸 박일환도 그런 이들 가운데 하나다. 시인이면서 <우리말 유래사전>, <미주알고주알 우리말 속담> 같은 책을 펴내고 지금도 중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고 있는 그가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사전> 비판’이라는 부제의 이 책을 펴낸 것은 지난해다.
내가 지난 3월에 온라인서점을 통해 산 <미친 국어사전>을 읽은 것은 지난 5월이다. 이 책을 읽은 이들이 대부분 그랬듯이 나는 적잖은 충격과 함께 열패감을 느꼈다. 국어 교사로 나름대로 바른 말글 쓰기를 명념해 왔다고 자부해 왔는데, 그가 보고 느낀 것을 나는 어찌 보지 못했는가 하는 부끄러움과 당혹감 말이다.
<표준국어대사전>은 즐겨찾기로 지정해 두고 수시로 들여다보아 온 사전이었다. 한때는 민간 출판사의 국어사전을 이용하기도 했지만, 2000년 이후로는 전적으로 <표준국어대사전>만 참고해 온 자신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미친 국어사전>의 문제 제기는 충격이었다.
그것은 국어사전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근본적 질문이기도 했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대한 소소한 불만을 넘어 이 책이 제기한 문제의식을 통해 나는 국어사전이 마땅히 지향해야 할 점을 되새겨 볼 수 있었다. 블로그에 ‘어떤 <국어사전>을 쓰고 계십니까?’를 쓴 것은 그래서였다.
저자가 제시하는 <표준국어대사전>의 문제점은 꽤 방대하고 체계적이다. 그건 국어사전을 활용하면서 그때그때 느낀 점을 정리한 수준이 아니다. 시를 쓰고 아이들에게 국어를 가르치는 교사로서의 경험만으로 이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지은이 나름의 집요한 천착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문제 제기라는 얘기다.
지은이는 <표준국어대사전>을 한자어와 외래어 선호 문제, 이상한 뜻풀이, 사전에 없는 말이나 신어(新語) 문제, 차별과 편견을 부추기는 문제, 백과사전으로 착각하게 할 만큼 전문어를 등재하고 있는 문제 등 13가지로 나누어 들여다본다.
한자어나 외래어 문제는 기왕에도 꾸준히 제기되어온 문제다. 그러나 정작 지은이가 제시하는 보기들을 들여다보면 문제가 여간 심각하지 않다는 걸 분명히 확인하게 된다. 다음에 제시하는 낱말들을 보라.
(1) 가경(嘉慶), 건륭(乾隆), 동치(同治), 숭덕(崇德), 순치(順治), 함풍(咸豐), 옹정(雍正)……
(2) 청전(淸錢), 보복(補服), 미인제(美人祭), 해관평(海關平), 강두홍(豇豆紅), 이연총국(釐捐總局), 교록(澆綠), 요록(澆綠)……
(1)의 낱말들 가운데서 눈에 익은 건 ‘건륭’이나 ‘옹정’ 정도다. 맞다. 청나라의 연호다. 나머지도 마찬가지. 글쎄, 우리 국어사전에 중국 청나라의 연호를 표제어로 실을 필요가 정말 있을까. (2)의 낱말은 어떤가. 미인제? 미인들의 축제? 천만의 말씀이다. 그건 ‘청나라 때 낭요에서 만든 도자기’란다.
나머지의 풀이도 모두 ‘중국 청나라의’로 시작되는 낱말이다. 청나라의 쇠돈(청전), 청나라 때의 문무관이 입던 대례복(보복), 청나라 때에 해관세를 거두는 데 쓰던 저울(해관평), 청나라 강희제 때 이금세(釐金稅)를 징수하던 총국(이연총국), 청나라 때에 도자기를 구울 때에 쓰던 잿물(교록, 요록)…….
이쯤 되면 우리 <표준국어대사전>에 한자어가 57%나 되는 이유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외래어 쪽으로 가도 문제는 예사롭지 않다. 다음 표제어를 살펴보라.
(1) 오럴법(Oral法), 롱샹(Longchamp), 맨틀피스(mantelpiece), 가네팅(garnetting), 스타티세(Statice), 뉴게이트(Newgate)……
(2) 론(lawn), 섀그(shag), 팰리스크레이프(palace crape), 옥스퍼드(oxford), 오일실크(oiled silk), 페플럼(peplum), 밀라니즈(milanese), 더플(duffle), 셰틀랜드(shetland)……
(1)에서 눈에 익은 낱말이 있는가. 물론 없을 가능성이 크다. 이 낱말들은 구두(口頭)법(오럴법), 파리의 불로뉴 숲 가까이에 있는 경마장(롱샹), 벽난로의 윗면에 설치한 장식용 선반(맨틀피스), 방직하고 남은 지스러기를 섬유로 환원하는 일(가네팅), 꽃갯길경(스타티세), 영국 런던의 구시가(舊市街) 서쪽 문에 있었던 감옥(뉴게이트)이란다.
(2)는 어떤가. 그중 안면이 있는 낱말은 ‘옥스퍼드’다. 그렇다. ‘두 올 또는 세 올의 실을 꼬지 아니하고 나란히 짠 천’이다. 나머지도 모두 천이나 옷감을 나타내는 외래어다. 무슨 의류 사전(事典)도 아니고 이런 전문적 외래어를 마구 싣는 일이 ‘국어사전’에 정말 필요한가.
이처럼 한자어나 외래어를 지나치게 사전에 싣는 게 문제가 되는 것은 정작 그러면서 마땅히 실려야 할 고유어는 제대로 싣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이나 민속박물관 같은 데만 가도 사전에 없는 말을 많이 만날 수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1) 샛집, 까치구멍집, 굴피집, 똬리집, 투방집……
(2) 부채살, 치마살, 설도……
(3) 앵병, 어그리옹기, 납작병, 굼탱이, 회령단지, 조왕(竈王)단지……
(1)은 옛날 집의 형태고 (2)는 고기의 부위별 이름이다. (3)은 지은이가 옹기박물관에서 만났다는 옹기 이름이다. 그러나 이 낱말들은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실리지 않은 낱말이다. 정작 실려야 할 낱말 대신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요긴하지 않은 한자어나 외래어가 넘치고 있는 셈이다.
지은이는 외래어는 넘치는 대신 ‘일본 한자어’는 여전히 일정한 기준 없이 등재되어 있다는 점도 지적한다. 사전에서는 대체로 순화어를 제시하는 형식으로 일본 한자어를 구분하고 있는데 ‘옥총(玉葱)’(양파), ‘수입포(手入布), 공차(空車), 공병(空甁)’ 등은 그대로 싣고 있다는 것이다
뜻풀이는 사전의 핵심이지만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이상한 뜻풀이가 적지 않다. ‘단상(斷想)’을 본뜻 외에 ‘생각을 끊음’으로 풀이하고 있는데 정작 이 낱말을 쓰는 사람을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하종하다(下種--)’의 뜻 가운데 “천태종에서, 원교(圓敎)를 듣고 원만한 이해가 생겨 항상 무명(無明)을 깨뜨릴 수 있는 동작, 말, 생각을 아뢰야식에 심다”로 풀이하고 있는데 이는 어려워도 너무 어렵다.
· 사-교육(私敎育) : 사립학교와 같이 법인이나 개인의 재원에 의하여 유지되고 운영되는 교육.
· 회(膾) : 고기나 생선 따위를 날로 잘게 썰어서 먹는 음식. 초고추장이나 된장, 간장, 겨자, 소금 따위에 찍어 먹는다.
‘사교육(私敎育)’은 ‘사립학교’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으로 풀이해 놓았는데 이는 ‘국가사회의 공적 관리로 이루어지는 교육’ 즉, 제도교육은 모두 ‘공교육’으로 보는 사회 일반의 상식과 다른 부분이다. ‘사교육’이라 하면 통상 학원이나 과외 등 사적 관리에 의해 수행되는 교육이다.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방과 후 교육’도 공교육에 포함하는 상황에서 이 뜻풀이는 난감하다.
‘회(膾)’의 뜻풀이도 마찬가지다. ‘날로’ 조리해 먹는 음식으로 한정하고 있으니 정작 ‘두릅회’나 ‘강회’처럼 ‘데친회’가 설 자리가 없어지는 것이다. ‘고기나 생선을 날로 썰어서 먹거나 살짝 데쳐서 먹는 음식’, ‘날로 만든 것을 생회(生膾), 데쳐 먹는 것을 숙회(熟膾)라 한다’고 풀이하고 있는 <다음국어사전>이 훨씬 사전의 본 의미에 충실하다.
국어사전, 보물창고로 만들 순 없을까
‘사전에 없는 말’은 ‘이상한 뜻풀이’와 함께 가장 비중 있게 다루어지는 부분이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쓰이며 언중의 사회적 약속이 이루어진 낱말은 사전에 표제어로 올라야 맞다. 다음 제시하는 낱말 가운데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찾을 수 있는 말을 골라보시라.
공급처, 논리력, 블랙유머, 성질머리, 외벌이, 재도약, 명함철, 참배객, 리필, 콜센터, 탁상보, 발마사지, 돌조각, 코멘트, 발냄새, 남성성, 여성성, 팝업창, 돌려차기, 빅딜, 로드맵, 눈화장, 가입원서, 정산서, 러브콜, 백장미, 흑장미, 장작구이, 숯불구이…….
정답은 ‘없다’이다. 믿어지지 않으면 바로 온라인의 <표준국어대사전>을 검색해 보시라. 그뿐이 아니다. ‘새우무침’과 ‘보리새우무침’은 있는데 정작 ‘콩나물무침’, ‘시금치무침’은 보이지 않는다. ‘유물사관’, ‘황국사관’은 있어도 ‘식민사관’은 없다. ‘오리알구이’는 있는데 정작 ‘오리알’은 표제어에 없다.
‘군악대’, ‘기동대’, ‘별동대’는 있어도 ‘결사대’도, ‘경비대’, ‘특공대’, ‘구조대’, ‘원정대’는 <표준국어대사전>에 없다. ‘벽돌공’, ‘미장공’은 있어도 ‘타일공’과 ‘페인트공’은 없다. ‘메밀밭’, ‘모시밭’, ‘목화밭’은 있어도 ‘마늘밭’과 ‘인삼밭’은 없다. 무슨 기준으로 표제어를 올리는지 알 수 없다. 이런 예는 셀 수 없을 정도다.
이 밖에도 이 책은 <표준국어대사전>이 성 소수자와 노동자, 남녀를 차별하고 편견을 부추기고 전문어를 선호하여 어설픈 백과사전을 흉내 내는 것, 방언과 순화어, 북한말 문제 등 매우 구체적인 부분까지 꼼꼼하게 그 문제점을 짚고 있다.
구체적 실례를 들어가며 문제를 짚고 그 대안을 논하는 저자의 태도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러나 지은이는 책에서 짚은 것은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래도 그는 <표준국어대사전>의 ‘허술함과 문제점들’이 뚜렷하게 드러났다고 믿는다.
지은이는 ‘미친 국어사전’을 바로잡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을 다섯 가지로 정리해 제시한다. 첫째는 전문어 중심주의를 버릴 것, 둘째는 보통 사람들의 숨결이 담긴 일반어와 생활어들을 찾아 싣는 것, 셋째 새말을 찾아내 등재하는데 관심을 넓히는 것, 넷째 이미 나온 사전들을 서로 비교해 보라는 것 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국어사전다운 국어사전을 만들겠다는 의지를 강조한다.
<표준국어대사전>의 오류와 문제점에 대한 비판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이를 의식한 국립국어원은 분기별로 수정 작업으로 대응하고 있지만, 그것은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보다는 임시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10년, 20년을 내다보면서 완전히 새롭게 편찬한다는 각오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다.
이 책이 나온 것은 지난해 10월이다. 그러나 <표준국어대사전>의 문제를 총체적으로 짚었는데도 불구하고 국립국어원도, 국어학계도, 관련 당사자들의 움직임도 없다. 문제를 제기한 이가 권위 있는 국어학자가 아니라 중등 교사이기 때문이라고 믿고 싶지는 않다.
<표준국어대사전>을 온 국민의 사랑을 받는 제대로 된 국어사전으로 거듭나게 하려면 필요한 것은 일차적으론 국립국어원의 의지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국어사전을 이용하는 사용자들을 포함한 우리 사회의 대응이다.
언어가 ‘인간 정신의 핵심’(고은)이라면 모국어는 민족의 존재 의미와 문화 창조의 고갱이일 것이다. 민족의 얼과 정신을 담는 그릇으로서의 모국어, 그 전범인 국어사전을 언어의 보물창고로 만드는 일에 힘을 보태는 일은 모든 모국어 사용자의 마땅한 의무일 것이기 때문이다.
2016. 10. 9.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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