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광역시의 ‘처용문화제’, ‘특정 종교활동 지원 행위’라고?
처용문화제가 ‘특정 종교활동 지원 행위’?
울산에서 40년이 넘게 베풀어져 온 지역 전통 문화제인 ‘처용문화제’가 논란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울산시에서 처용문화제에 예산 지원을 하고 있는데 지역 기독교계에서 이를 ‘특정 종교활동 지원 행위’라며 중단을 요구한 것이다.
보도에 따르면 기독교계의 논리는 단순·명쾌(?)하다. 이들은 처용문화제를 ‘무속신앙의 한 유형’이라며 다른 신앙을 믿는 시민을 정서적으로 위축시킨다고 주장한다. 설화에 처용이 역신(疫神)을 물리치는 내용이 나오고 조선 시대 처용무도 귀신을 쫓기 위한 궁중 나례였음을 예로 들며 처용을 ‘무당’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처용(處容)은 <삼국유사> 권2 기이(紀異) 편의 ‘처용랑 망해사(望海寺)’ 조에 나오는 설화의 주인공이다. 그는 용왕의 아들로 그가 부른 ‘처용가’는 8구체 향가다. 역신이 자신의 아름다운 아내와 동침하고 있는 장면을 목격한 처용은 이 노래를 부른다. 역신은 그가 보여준 관용에 감읍하여 문 앞에 처용의 초상이 있는 집엔 범접하지 않겠다고 약속한다.
<삼국유사>는 그때부터 ‘사람들이 처용의 형상을 문에 그려 붙여 나쁜 귀신을 쫓고 복을 맞아들이는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처용가가 ‘벽사진경(辟邪進慶)’, 사악한 것을 쫓고 경사로움을 맞이하는 노래라는 것을 뜻한다. 또 이 설화는 문이나 지붕에 처용 상(像)을 붙이게 된 기원, 즉 문신(門神)의 좌정 과정을 설명한 것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처용랑(處容郞) 망해사(望海寺)’
제49대 헌강대왕(憲康大王) 시대에 서울로부터 동해 어귀에 이르기까지 집들이 총총 들어섰지만, 초가집 한 채를 볼 수 없었고 길거리에서는 음악 소리가 그치지 않았으며 사철의 비바람마저 순조로웠다.
이때 왕이 개운포(開雲浦, 지금의 울산)에 나가서 놀다가 돌아오는 길에 바닷가에서 점심참으로 쉬던 중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졸지에 그만 길을 잃어버렸다. 왕이 괴상하게 여겨 측근에게 까닭을 물었더니 천문을 맡은 관리가 말하기를, “이는 동해 용의 장난이니 좋은 일을 하여 풀어야만 합니다.” 하였다.
이에 관원에게 명령하여 용을 위하여 근방에 절을 세우라고 하였더니 명령이 떨어지자 구름이 걷히고 안개가 흩어졌다. 이 때문에 이곳을 개운포(구름이 걷힌 포구)라고 이름 지었다. 동해 용이 기뻐하여 곧 아들 일곱을 데리고 임금이 탄 수레 앞에 나타나 왕의 덕행을 찬미하면서 춤을 추고 음악을 연주하였다.
그의 아들 하나가 임금을 따라서 서울로 들어와서 왕의 정치를 보좌케 되었는데 이름을 처용이라고 하였다. 왕이 그를 미인에게 장가들이고 그의 마음을 안착시키고자 다시 급간(級干) 벼슬까지 주었다. 그런데 그의 아내가 너무도 고왔기 때문에 역병 귀신이 탐을 내어 사람으로 변하여 밤이면 그 집에 가서 몰래 데리고 잤다. 처용은 밖에 나갔다가 집에 들어와서 자리 속에 두 사람이 누운 것을 보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면서 그만 물러 나왔다. 그 노래는 다음과 같다. (중략)
이때 귀신이 처용의 앞에 정체를 나타내어 무릎을 꿇고 말하기를, “내가 당신의 아내를 탐내어 지금 그녀를 상관하였소. 그런데도 당신은 노하지 않으니 감격스럽고 장하게 생각한 나머지 이제부터는 맹세코 당신의 얼굴을 그려 붙여둔 것만 보아도 그 문 안에 들어가지 않겠소.” 하였다. 이 까닭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처용의 형상을 문에 그려 붙여 나쁜 귀신을 쫓고 복을 맞아들이는 것이다.
왕이 돌아온 후에 즉시 영취산(靈鷲山) 동쪽 기슭에 좋은 자리를 잡아 절을 지었는데 망해사라고도 하고 또 신방사(新房寺)라고도 불렀으니 이는 용을 위하여 설치한 것이다. (하략)
<삼국유사> 권2 기이(紀異) ‘처용랑 망해사’ 조 중에서 / <사진과 함께 읽는 삼국유사>(까치, 2006)
처용을 바라보는 학자들의 견해는 다양하다. 민속학의 관점에서 무속과 관련지어 보거나, 정치사의 관점에서 지방 호족의 아들로 보거나 신라 때에 멀리 서역과도 교역이 있었다고 보아 이슬람 상인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대체로 무속과 관련해 이해하는 견해가 우세한 듯하다. 아내의 간통에 대해 노래와 춤으로 응대하는 것은 상식의 범주를 벗어난 무격(巫覡) 사회의 풍습으로 보아야 하는 까닭이다.
처용가, 자기 절제와 초극을 통한 갈등 해결 방식
역신에 대한 처용의 태도는 다분히 풍자적이면서 관용적이다. 간통의 상황을 ‘다리 넷’으로 표현한 것도 그렇거니와 마지막 두 구에서는 해학적 체념의 태도뿐 아니라, 조롱과 냉소의 낌새조차 읽히기 때문이다. 처용의 관용은 대상에 대한 부정과 공격이 아닌, 자기 절제와 초극을 통한 갈등 해결 방식이다. 이러한 절제와 초극은 처용의 윤리적 우월성을 드러내는 것으로 역신의 감복도 여기서 비롯하는 것이다.
한편, 이 설화에 대한 이승수(경희대) 교수의 견해는 자못 흥미롭다. 그는 아내와 역신의 동침은, 역병에 걸린 아내를 은유한 것으로 이해했다. 역병은 넘어서기 어려운 거대한 운명, 불가항력이었다. 처용은 절박한 마음으로 춤과 노래로 그 운명을 극복하려 했다.
결국 처용 이야기는 ‘거대한 운명 앞에 선 작은 인간의 무력감과 그것을 극복하려는 염원과 절규’라는 것이다. 아내는 죽었고, 대신 처용의 염원과 절규는 주술적인 힘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이후 처용의 이야기는 종교로, 무용으로, 문학으로 거듭나기를 반복했다는 것이다.
‘처용가’는 일인칭 독백체 형식의 노래로 노래 자체에는 주가(呪歌)의 성격이 드러나 있지 않다. 그러나 역신이 처용의 태도에 감복하여 사죄하고 물러났으므로 일반적으로 주가로 보는 것이다. 결국 역신을 쫓아낸 것은 일상적 인간의 생각과 감정을 뛰어넘는 처용의 초극적인 이미지라 할 수도 있겠다.
이 노래는 고려가요 ‘처용가’로 이어져 고려·조선 시대의 나례(儺禮:음력 섣달그믐날 밤에 궁중이나 민가에서 악귀를 쫓기 위해 베풀던 의식) 공연 때 처용무와 함께 불렸다. 중요무형문화재 제39호 처용무(處容舞)는 처용 가면을 쓰고 추는 남무(男舞)로서 장엄하고 씩씩하며 신비스러운 춤이라고 한다.
처용무는 5명이 동서남북과 중앙의 5방향을 상징하는 옷을 입고 추는 춤이어서 ‘오방(五方) 처용무’라고도 한다. 동은 파란색, 서는 흰색, 남은 붉은색, 북은 검은색, 중앙은 노란색이다. 춤의 내용은 음양오행설의 기본정신을 기초로 하여 악운을 쫓는 의미가 담겨 있다. 고려 시대의 처용가는 물론, 처용무의 처용이 신라 시대의 역신을 물리친 처용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천 년의 문화 유산을 특정종교의 교리로 재단함은 옳지 않다
대학 때에 소설을 쓰는 후배 하나가 쓴 ‘처용의 직업’이란 콩트를 썼다. 짐작했겠지만, 처용은 꽃뱀 아내와 동업하는 사나이다. 그는 아내가 호린 남자들과 아내가 동침하려는 순간 나타나서 소기의 목적을 이루고, 돈은 챙기는 것이다. 처용의 이미지를 의도적으로 비틀어 버린 경우다. 어쩌면 향가 ‘처용가’는 온갖 다양한 문학적 해석을 기다리고 있는 날것의 텍스트인지도 모르겠다.
울산에서 지금 진행 중인 이 논란의 핵심은 역시 처용은 무당이고, 무당을 기리는 일은 ‘우상숭배’이니 종교 편향이라는 단순 논리에 있다. 문화제 추진위원회 쪽은 ‘처용은 향가의 주인공으로 전통문화의 일부’라며 반박하고 있고, 학계에서도 ‘기독교계의 편향성 주장이 오히려 종교적 편견이 될 수 있다’라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 한다.
처용의 존재를 단편적으로 이해하고 해석하는 게 바람직하지 않다는 학계의 의견은 물론 타당하다. 그러나 설사 처용이 고대의 무당이라 하더라도 천년도 전의 역사적 상황과 배경을 특정 종교의 교리로 재단하는 것은 절대 옳지 않다. 그것은 역사에 대한 부정이며, 전통문화에 대한 부정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속과 전통문화를 ‘미신(迷信)’이라 하여 폄훼하고 그걸 ‘발본색원’하고자 했던 것은 조급한 근대화론자들이었다. 그들은 마을의 장승을 베어내고, 서낭당을 헐어내고, 마을의 대동을 기원하던 동제(洞祭)를 없앴다.
그러나 어느 날 정신을 차려보니 그게 우리가 가꾸어야 할 전통문화 유산이었다는 걸 뒤늦게 깨닫고 그걸 복원하려 했지만, 상당수의 유물은 이미 없어져 버린 뒤였다.
처용가, 고대인들의 사유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문화유산
유네스코에서 무속을 ‘종교’로 규정한 것은 1970년대 초반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리고 우리의 대표적 전통 신앙인 무속과 유불선이 서로 조화를 이룬 가운데 천년을 이어 왔다는 강릉단오제가 유네스코 “인류 구전 및 문화유산 걸작”으로 선정된 것은 2005년이다. 2004년에 기독교계로부터 ‘시대착오적인 무속 행사’라고 비난받은 그 ‘강릉단오제’다.
장로 대통령을 배출한 기독교계는 지금이 바야흐로 이 땅을 ‘하나님께 봉헌’하는 적기라고 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논란에 참여한 기독교 단체 중에는 울산시 성시화(聖市化) 운동본부라는 이름도 눈에 띈다. ‘성시화’란 말 그대로 ‘거룩한 도시 만들기’인데, 대통령이 서울시장이던 시절에 서울을 하나님께 ‘봉헌’한다고 해 시끄러웠던 때를 떠올리게 한다.
기독교계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사업에 대해 왈가왈부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의 ‘성시화’에 대해서 다른 종교 쪽에서 ‘이 도시가 너희 것이냐’며 시비를 걸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 이유로 그들이 지역 문화제에 대한 편견과 오해를 거두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처용과 처용가는 일천년도 전에 이 땅에서 살았던 우리 선인들의 삶의 모습과 그 방식을 아우르는, 고대인들의 사유의 세계를 더듬어 볼 수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그것을 역사로, 문화로 이해하는 것은 단순히 특정 신앙에 바탕을 둔 종교인들의 선택 문제는 아니라는 얘기다.
2008. 10. 2. 낮달
'이 풍진 세상에 > 길 위에서 '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래, 이제 무대에서 내려가라고? (6) | 2020.10.06 |
---|---|
“자식들에게 비정규직 물려주고 싶지 않아 열심히 싸웁니다” (0) | 2020.10.05 |
블로그 조회 수, ‘애착’과 ‘집착’ 사이 (0) | 2020.09.29 |
이문열, 그도 그 ‘험한 꼴’의 일부가 아닌가? (0) | 2020.09.18 |
그들을 더는 ‘가정부’라 부르지 말라 (3) | 2020.09.08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