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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길 위에서

그래, 이제 무대에서 내려가라고?

by 낮달2018 2020. 10. 6.

‘475세대’의 퇴장, 베이비붐 세대의 은퇴

 

▲ 1960년대 말의 초등학교 교실. 빼곡이 앉은 아이들이 줄잡아 50명은 훨씬 넘어 보인다.

9월 말께부터 여러 일간지에서 ‘베이비부머(Babyboomer)’를 다룬 기사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의 베이비부머라면 물론 한국 전쟁 후 급격한 출산 붐을 타고 태어나 세대를 이른다. 이들은 산업화와 민주화, 외환위기 등 격동의 현대사를 온몸으로 겪어 온 전후세대다.

 

베이비붐 세대는 6·25전쟁(1950~1953) 종전 2년 후인 1955년부터 산아제한 정책이 도입되기 직전인 1963년까지 9년에 걸쳐 태어난 이들이다. 이들은 너무 어려서 4·19 혁명이나 5·16 쿠데타를 알지 못했지만, 이후 전개된 10대에는 박정희 군부, 20대에는 80년대 신군부의 독재를 경험한 세대다.

 

일간지에 따르면 이들은 대략 712만 명에 이르는 거대 인구집단이다. 이는 2010년 추계로 총인구의 14.6%를 차지하는 비중이다. ‘58년 개띠’라는 낱말이 마치 보통명사처럼 쓰이는 것도 이들의 비중을 짐작게 해 주는 것 중의 하나다. 이들이 결혼해 낳은 자녀, 즉 1990년부터 1996년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을 제2차 베이비붐 세대라 이르는 까닭이 여기 있는 셈이다.

 

내년부터 ‘베이비붐 세대’의 은퇴 러시

 

일간지들이 다루는 ‘베이비부머’에 관한 뉴스는 대부분 내년부터 이들의 본격적 은퇴가 시작된다는 소식이다. 내년이면 베이비부머의 맏형, 1955년생 양띠가 우리 나이로 쉰여섯(만 55세)이 되는데 만 55세는 대기업의 평균 정년이라는 것이다. 이 ‘은퇴 러시’를 앞두고 일간지들은 다투어 이들 세대를 새롭게 조명하기 시작한 것이다.

 

미디어에서는 대체로 이들을 ‘경제적 고도성장과 민주화 등 우리 사회의 변화를 주도한 세대’로, ‘산업화·근대화 과정의 주역으로서 좌절과 풍요를 공유했던 세대’로 바라본다. 그러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경쟁과 변화의 소용돌이를 건너왔지만, 막상 뚜렷한 정체성(identity)을 찾지 못했던 세대로 이들을 규정하기도 한다.

 

신문을 건성건성 읽으면서 나는 자신의 이야기를 남의 이야기처럼 바라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신문의 논법을 따르자면 1956년생 원숭이띠(우리는 원숭이 대신 ‘잔나비’로 불렀다)인 내 또래들도 내후년이면 ‘은퇴 열차’를 타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지만 나는 여전히 심상한 편이다.

 

      ▲ 당시 란도셀. 이런 가방을 멘 아이는 몇 없었다.

그것은 내가 정년에 몰린 대기업 사원도 아니고, 정작 산업화·근대화의 주역이라기보다는 그 과실을 은근히 누린 세대라는 자의식 탓은 아닐까. ‘근대화’라면 나는 늘 초등학교를 같이 다닌, 배를 곯는 데 이골이 났던 내 옛 동무들을 떠올린다. 질려서 보리밥도 싫고, 죽은 더더욱 싫다는 친구들 말이다.

 

1963년, 베이비붐 세대의 막내들이 태어나던 해, 우리는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가슴에 접은 손수건 하나와 비닐에 끼운 이름표 하나를 달고. 함께 입학한 아이들은 모두 백삼십 명이 넘었다. 나는 ‘란도셀’이란 이름의 각진 멜빵가방을 메고 있었는데, 그때의 동무들 중에 같은 가방을 멘 아이들이 얼마나 있었는지는 기억할 수 없다.

 

입학할 때 이미 글을 깨치고 있었던 아이들은 몇이나 됐을까. 나는 1, 2, 3, 4…, 아라비아 숫자조차 몰랐다. 내가 아는 글자라곤 이미 백발이 성성했던 할머니께서 우연히 가르쳐 주신 ‘고’자 한 자뿐이었다. 넉넉하게 자랐던 내가 그럴진대 다른 아이들은 어땠을까. 아마 우리 중엔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한글도 깨치지 못한 아이들도 더러 있었던 듯하다.

 

우리는 입학 후 첫 3년간은 2부제 수업을 해야 했다. 아이들은 넘쳤지만, 교실과 책걸상이 태부족이었기 때문이다.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우리는 대체로 오전반과 오후반으로 나누어 수업을 받아야 했던 것 같다. 그러다가 어느 때부턴가는 책상의 줄과 줄 사이의 통로에 앉아서 수업을 받기도 했다.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이었다. 아이들도, 학교도 나라도 가난하긴 매일반이었다. 아이들은 구멍 난 양말을 신고 늘 초칠을 해서 반들반들한 교실의 마룻바닥과 복도를 뒤꿈치를 바짝 들고 다녔다. 겨울이면 난방용 땔감으로 쓰기 위해 솔방울을 따러 뒷산으로 올라가야 했다. 아이들 대부분은 점심을 굶거나 찐 고구마 따위로 끼니를 때웠다.

 

60년대의 가난, 70년대 근대화를 관통한 세대

 

▲ 1960년대의 시골 풍경. '새마을' 입간판이 보인다. 아직 도시화, 산업화의 물결이 닥치지 않은 때다.

헐벗고 굶주린 아이들의 머리카락은 영양실조 탓인지 늘 노랬고, 부스럼을 달고 살았던 아이들의 드러난 팔뚝과 다리는 헌데투성이였다. 바를 약도 먹을 약도 없으니 치료래야 된장이나 발라 주는 게 고작이었다. 그러나 자라는 아이들은 얼마나 건강했던가. 진물을 흘리면서 뛰놀다 보면 어느새 곪은 상처에선 새살이 돋곤 하였다.

 

그런 동무들 틈에 끼고 싶어서 어느 날부터 나는 다른 아이들처럼 ‘책보’라고 부르는 보자기에다 교과서를 싸서 학교에 다녔다. 커다란 보자기에 대각선으로 교과서를 놓고 마주 보는 귀를 모아 묶어서 어깨에 걸치면 그것은 어깨에 메는 훌륭한 가방이 되었다. 집이 먼 아이들은 아예 보자기로 교과서를 차곡차곡 말아 허리춤에 감아 매고 십리 길을 마구 내달리곤 했다.

 

가끔 학교에서 배급해 주는 옥수숫가루나 가루우유를 받는데 ‘책보’는 매우 쓸모 있는 물건이었다. 그걸 마치 전리품처럼 챙겨서 아이들은 의기양양하게 귀가하곤 했다. 그 가루우유를 솥에다 찌면 매우 단단한 덩어리가 된다. 굳어버린 그 유제품(?) 조각의 맛은 환상적이었다. 천천히 빨고 깨물어대면서 아이들의 이는 쉬 약해져 버리기도 했던 것 같다.

 

아이들의 신발은 거의가 검정 고무신이었다. 그 타이어 고무로 만든 질긴 신발도 나무하러 산을 드나들거나 늘 달음박질치는 아이들에겐 ‘불감당’이었다. 길쭉하게 찢어진 고무신을 듬성듬성 꿰매어 신고 다니던 동무들의 모습을 나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해 낼 수 있다. 초등학교 6년 동안 운동화를 신어 본 아이들은 몇이나 되었을까.

 

우리는 중학교 입시를 친 세대였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을 때인데, 학교에서 남폿불을 켜 놓고 밤늦게 공부하느라 집이 먼 아이들은 무리 지어 학교 주변의 아이들 집에서 묵어야 했다. 130여 명 동기 중에서 반쯤이 중학교에 진학했고, 중학교에 진학한 아이 중에 반쯤이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대학까지 공부할 수 있었던 행운아는 단지 예닐곱 명에 불과하였다.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던 아이들의 태반은 여자애들이었다. 초등학교를 마치고 대구의 섬유공장으로 떠나야 했던 키 작은 여자애들은 곧 ‘공순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공장노동자가 되었다. 남자애들도 다르진 않았다. 농삿일을 하거나 중학교를 마치고 도회로 나가 트럭의 조수로, 주물공장의 수습공으로, 목수의 조수로 이른바 ‘기술’을 배웠으니 그들도 곧 ‘공돌이’라는 노동자 계층으로 편입되었다.

 

지금도 그때의 내 동무 중에는 버스나 트럭, 택시 따위를 모는 이른바 ‘운수 노동자’가 꽤 있다. 10년도 전에 세상을 떠난 영두(가명)는 가장 열심히 살았던 친구다. 그는 일찌감치 트럭 조수로 기름밥을 먹었고, 그예 마흔이 넘으면서 대형 트레일러의 기사로 자리를 잡았다. 그가 대구 변두리에 마련했다는 작은 아파트는 그의 성실한 삶에 대한 ‘보상’이었을 것이다.

 

그는 경남 어느 소읍 부근의 일직선 도로를 벗어나 논 가운데에 트레일러를 처박고 죽었다. 고단함을 못 이겨 풋잠이 들었던 걸까. 아무도 사고의 원인을 알지 못했다. 운전대 위에 엎드려 그는 잠자듯 죽어 있었다고 했다. 그의 팔에 눌린 경적이 오래도록 인근 동네에 들렸다던가.

 

나는 지금도 가끔 그의 죽음을 알린 그 경적을 귓전에 희미하게 느끼곤 한다. 그것은 마치 고단한 삶을 마감하며 그게 세상에 남긴 한스러운 항변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작지만 ‘내 집’에서 펼쳐질 가족과의 단란과 달콤한 휴식을 두고 그는 세상을 떠났다. 그게 우리 세대의 희생이 받은 보상이라면 지나치게 가혹하지 않은가.

 

스무 살쯤에 농약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친구들, 불치병으로 앓다가 세상을 떠난 친구들, 여전히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친구들도 있다. 회사원이거나 공무원으로, 또는 노동자로 살아가는 친구들은 이제 동기회에서 만나 우정을 새로이 나누기도 한다. 대체로 아이들은 다 키웠는데, 개중에는 사위나 며느리는 물론, 손자까지 본 친구도 여럿이다.

 

▲ 섬유공장의 여성 노동자들. 이들은 '공순이'로 불리며 저임금으로 혹사당했다.

요 몇 년 동안에는 그들과 만나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그들이 흘린 땀 덕분에 내가 공장이 아니라 상급학교에 진학했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일터에서 눈물 밥을 먹고 있을 때 나는 중등학교 교실에서 정치경제를 배웠고, 그들이 노동에 겨워하고 있을 때 나는 대신 대학물을 먹었다.

 

그런 뜻에서 나는 초등학교나 중학교 졸업으로 학력을 마감한 옛 친구들에게 갚아야 할 빚이 많다고 생각한다. 그들 덕분에 나는 수출 전선이 아니라 교단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꼭 20년 전에 학교에서 쫓겨났을 때 내가 느낀 이상한 안도감은 그런 감정의 일단이었으리라.

 

본인이든 부모의 능력이든 대학 공부를 했던 친구들 모두 그만그만하게 살고 있다. 정작 고등학교 진학도 못 했던 몇몇 친구는 경제적으로 성공했다. 제조업 한 우물을 팠던 한 친구는 수백 명의 종업원을 거느리고 중국공장까지 운영하고 있다고 들었다. 그건 정말 얼마나 장한 일인가.

 

매스컴은 우리 베이비부머를 가리켜 ‘우리 사회의 주역’이라고 미화한다. 베이비부머가 ‘소비와 생산의 주도 세력’이었고 ‘부동산, 예금, 주식 등의 보유자산’에서도 다른 세대를 압도한다고 한다. 우리 세대가 보유한 토지는 전체의 42%가량이며, 보유 부동산도 건물 기준으로 전체 부동산의 절반이 넘는 58%에 이른다. 주식도 전체의 20%를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그게 우리 세대의 평균치라면 나는 별로 할 말이 없다. 나는 공시가 5천만 원이 채 되지 않는 소형 아파트가 전 재산이고, 단 한 주의 주식도 가진 적이 없는 경제 지진아이기 때문이다. 그게 고도성장기의 주역으로서 받은 혜택이라면 나는 고도성장에 별로 이바지한 바가 없는 셈이다.

 

‘소비와 생산의 주도 세력’이었다고?

 

‘국가의 혜택’이란 매우 추상적인 개념이다. 나는 가끔 아이들에게 “내가 ‘국가의 혜택’을 별로 받아보지 못한 세대”라는 농을 하곤 한다. 학창 시절은 물론이고, 군대에서도 사회에서도 우리는 늘 특정 혜택으로부터 뒤처지거나 반 발쯤 앞서는 바람에 정작 그 과실을 맛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입시를 치르고 중학에 진학해야 했으나, 이태 후에 중학교 입시는 무시험제로 바뀌었다. 우리가 입시를 치르고 고교에 진학하고 난 이태 뒤에는 고교도 평준화되었다. 우리 세대는 예비고사와 본고사 등 시험을 두 번 치러야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예비고사에 실패하면 본고사를 치를 자격조차 주어지지 않았지만 불과 몇 해 뒤부터는 한 번 친 학력고사로 대학진학이 가능해졌다.

 

                             ▲ 베이비부머의 경제력

논산훈련소에서 6주의 신병훈련을 수료하자 다음 기수부터는 훈련이 4주로 준다는 소식을 들으며 우리는 우리의 불운을 욕지거리로 저주했다. 33개월을 꽉 채우고 만기 전역을 하자 기다렸다는 듯 복무기간은 30개월로 대거 줄어 버렸다. ‘국가의 혜택’ 운운한 것은 우스개였다. 어떻든 그 전 시대에 비하면 우리가 치러 낸 삶은 한결 여유로운 것이었을 테니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겪었던 세월이 이후 세대보다 훨씬 고통스러웠다는 것을 강조할 필요는 없겠다. 고통이란 건 지극히 주관적인 느낌이어서 괴롭지 않은 시대란 원래 없는 법이니 말이다. 어쩐지 우리 세대는 새로운 시대로 가는 ‘길목’에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할 때가 많다.

 

우리는 고등학교 때 유신헌법을 배웠는데, 그때 학원은 마치 병영 같았다. 군복을 입은 교련 교사가 세 명이나 되었고, 우리는 교련복에 탄띠와 각반을 차고, 학교에서 총검술 훈련까지 받았다. ‘받들어총’ 경례를 선호하는 학교장 때문에 매주 금요일에는 하기식을 치러야 했다. 현역 장교가 참관하는 교련 검열에 대비하느라 오후를 반납하기도 했다.

 

부마항쟁과 박정희가 시해된 1979년과 광주항쟁이 일어난 1980년, 87년 6월항쟁과 88년 서울올림픽을 거치며 우리는 20대에서 30대로 진입했다. 그 시절의 주역을 세상은 ‘386세대’라고 불렀지만, 우리는 거기서 하나씩 모자라거나 하나씩 넘치는 ‘475세대’였다. 그 무렵 우리는 ‘40대’였고, ‘70년대 학번’에다가 ‘50년대 출생’이었던 것이다.

 

“한국 베이비붐 세대는 우리 사회의 모든 변화를 겪었으면서도 정작 발언을 자제했던 이들로 ‘386세대’와는 다르다”라고 한 손성동 미래에셋퇴직연금연구소 연구실장의 발언도 그 점을 지적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또 베이비부머의 “정체성도 과거 농업사회와 오늘의 도시문화가 혼재돼 있다”라고 진단했는데(이상 <연합뉴스>에서 재인용) 그것은 우리가 ‘끼인 세대’라는 뜻이기도 하다.

 

‘배려’와 ‘낙관’으로 세대교체의 위기를 극복할 것

 

매스컴은 우리 세대의 ‘은퇴 러시’가 경제에 커다란 짐이 될 뿐 아니라 새로운 사회 문제로 대두되리라고 내다본다. 한창 일할 나이에, 임금소득을 잃고 다음 세대의 짐이 되어야 하는 상황은 어떠한 경우라도 우울한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다.

 

경제난에다가 재취업 기회나 연금 등 부실한 사회안전망을 생각하면 베이비부머의 은퇴는 단순히 특정 세대의 ‘부침(浮沈)’이라는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사회 전반에 만만치 않은 영향을 미쳐 노동생산성은 물론 경제 발전의 걸림돌로 작용할 공산도 크다는 것이다.

 

베이비부머들이 정년을 맞이하는 것과 무관하게 나는 앞으로도 얼마간 자리를 지킬 수 있는 형편이니 그게 당장 나의 문제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그러나 어쩌다 보니 내가 시대적 부침의 한가운데에 서 있게 된 데 대한 감회는 새로울 수밖에 없다.

 

2010년부터 정년으로 회사를 떠나야 할 이들은 311만 명쯤이라 한다. 전체 베이비부머의 절반에 가까운 숫자다. 쉰다섯을 ‘노년’이라고 매기기는 어렵다. 현역에서 물러나 ‘은퇴’하는 이 ‘비(非) 노년’에게 주어진 이 세월, 이 시절을 무어라 규정할 수 있을까.

 

그것을 단순히 ‘세대의 순환’으로만 바라볼 수 없는 것은 물론, 쉰다섯 나이가 어정쩡한 까닭이다. 한편으로 그것은 쉰다섯에 정년을 맞게 하는 우리 사회의 고용구조가 갖는 한계 때문이기도 하다. 아직도 기업에 적을 두고 있는 저 옛날의 친구들은 어떻게 정년을 맞을 채비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베이비부머 세대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노후를 제대로 준비하지 못했다’라는 점이라고 한다. 글쎄, 가족과 직장 등에 골몰하다 보니 정작 자기를 챙길 시간이 부족했던 모양이다. 나 역시 은퇴하면 받을 일정액의 연금을 빼면 달리 ‘노후 준비’ 따위는 언감생심이다.

 

우리 세대는 어쩌면 이 ‘디지털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아날로그’ 세대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겪어온 저 6·70년대의 세월을 ‘무탈’하게 넘긴 것처럼 이 세대교체의 시간을 능히 견뎌내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저 험난한 세월의 질곡을 건너온 덕분인가, ‘이웃에 대한 배려’와 ‘미래에 대한 낙관’이 우리 세대의 미덕 가운데 하나일 터이기 때문이다.

 

2009. 10. 6. 낮달

 

 

 

 

그래, 이제 무대에서 내려가라고?

'475세대'의 퇴장, 베이버부머들의 은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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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사진 중 란도셀은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며 멘 가방과 같은 최신식 일본 학생 가방이다. 우리가 멘 가방은 조악한 비닐이었지만 이 가방은 수십만 엔을 호가하는 고급 가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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