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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까’ 사다리와 ‘고까’ 도로

by 낮달2018 2020. 9.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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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어, 발음에 따라 ‘뜻이 달라진다’

▲ '고가'도 뜻에 따라 발음이 달라지는데도 불구하고 잘못된 발음을 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지난달 중순께 한 지상파 방송 뉴스에서 ‘고가사다리’를 [고까사다리]라 말하는 걸 들었다. 다행히 그렇게 말한 사람은 앵커도 기자도 아닌 방재업체 관계자였다. 그보다 더 오래 전에, 역시 공중파 뉴스에서 ‘고가도로’를 [고까도로]라고 발음하는 기자의 리포트를 들으면서 곤혹스러웠던 기억이 떠올랐다.

 

같이 ‘고가’로 써도 ‘시렁 가(架)’ 자를 쓴 ‘고가(高架)’와 ‘값 가(價)’ 자를 쓴 ‘고가(高價)’는 명백히 다르다. ‘시렁’이라면 요새 사람들은 낯설지 모르겠다. “물건을 얹어 놓기 위하여 방이나 마루 벽에 두 개의 긴 나무를 가로질러 선반처럼 만든 것”이 시렁이다.

 

‘값비싼’ 사다리와 도로?

 

‘고가(高架)’는 [고가]로 읽고 ‘고가(高價)’는 [고까]로 읽는다. 이걸 바꾸어 읽으면, ‘높은 시렁’이 졸지에 ‘큰 값’이 되고 만다. 예의 방송에선 결국 ‘값비싼’ 사다리나 도로를 이야기한 셈이 되는 것이다. 물론 본인들은 그걸 전혀 의식하지도 못했으리라.

 

한자어의 발음은 생각만큼 쉽지 않다. 원래 대부분의 한자는 겹글자로 표기되지도 않고 그 자체로는 된소리로 발음되지 않는다. 그러나 한자는 국어의 단어 내부에서 일정한 음운 규칙의 적용을 받게 되면서 된소리로 발음되게 된다.

 

“받침 ‘ㄱ, ㄷ, ㅂ’ 뒤에 연결되는 ‘ㄱ, ㄷ, ㅂ, ㅅ, ㅈ’은 된소리로 발음한다.”라는 ‘표준발음법 제23항 규정에 따른 한자어의 발음이 그 예다. 이는 한자어 자체의 성질 때문이 아니라 국어의 음운 규칙 때문에 이루어지는 발음이다.

 

학교[학꾜], 납득[납뜩], 압박[압빡], 국사[국싸], 숙제[숙쩨]

 

표준발음 제26항은 한자어의 발음과 관련한 규정이다. “한자어에서, ‘ㄹ’ 받침 뒤에 연결되는 ‘ㄷ, ㅅ, ㅈ’은 된소리로 발음한다.”라는 규정이다.

 

갈등[갈뜽], 발전[발쩐], 일시[일씨], 몰상식[몰쌍식], 절도[절또], 말살[말쌀], 물질[물찔]

 

▲ 의도한 것일까, 실수일까

위에 든 예 밖에는 단어 내부에서 일정한 규칙이 없이 나는 한자어의 된소리를 예측하는 것은 무척 어렵다. 더구나 실제 발음과 상관없이 한글 표기는 모두 예사소리로 표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형태만으로 그 발음을 예측하기 어려운 한자어는 사전에 된소리 유무를 일일이 표시해 주어야 한다.

 

헛갈리는 표준발음들

 

· 예사소리로 나는 경우 : 공기(空氣)[공기], 생기(生氣)[생기], 사기(士氣)[사기]

· 된소리로 나는 경우 : 경기(驚氣)[경끼], 광기(狂氣)[광끼], 인기(人氣)[인끼]

 

사람들이 가장 많이 잘못 쓰는 말로 ‘효과(效果)’가 있다. 모든 사람이 의심 없이 [효꽈]로 읽지만 여기서 된소리 발음은 표준발음이 아니다. 이처럼 ‘발음의 된소리화’가 심해지면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비표준 발음도 꽤 많다.

 

‘발음의 된소리화’는 날이 갈수록 심각해지는 것 같다. 아이들은 ‘내 꺼 니 꺼’를 예사로 쓴다. 그게 ‘거(것)’을 잘못 쓰는 거라고 말해주면 정말이냐고 되물을 정도로. 그래서일까. 몇 해 전에 공연된 어떤 연극 공연 포스터에서도 ‘거’ 대신 ‘꺼’를 당당하게 쓰고 있었다.

 

궁금한 것은 그게 일부러 그렇게 쓴 것인지, 정말 몰라서 그렇게 쓴 것인지다. ‘고가’를 ‘고까’로 발음하는 사람처럼 자신의 잘못을 알지 못하는 상태라면 이건 정말 심각한 상황이라는, 오지랖 넓은 걱정을 하면서.

 

2013. 3. 13. 낮달

 

 

* 이 글은 국립국어원 최혜원 학예연구관의 글 “효꽈적인 방뻡?”을 참고하여 작성하였음.

* 2017년 3분기 <표준국어대사전> 수정 사항에서 표준발음의 수정이 있었다. ‘교과’와 ‘효과’, ‘관건’, 불법 등의 발음에서 복수 표준발음을 허용한 것이다. 따라서 이제 효과를 [효꽈]로, 관건을 [관껀]으로 발음해도 무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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