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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길 위에서

다시 ‘완장’을 생각한다

by 낮달2018 2020. 6.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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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만찮은 권력의 상징 ‘완장’

▲ 완장은 권력의 상징, 지배와 피지배를 가르는 표지다. ⓒ SBS

난데없이 ‘완장’이 일종의 유행어처럼 쓰이게 된 것은 현 정부 출범 이후의 일인 듯하다. 정권 교체기라면 ‘권력의 이동’이란 상식이다. 그런데도 현 정부 들어 뜬금없이 ‘완장’이란 낱말이 쓰이게 된 맥락은 좀 ‘거시기’하다.

 

권력을 장악한 정당이 정무직을 나누어 챙기는 것은 일종의 ‘전리품 배당’처럼 보이긴 하지만 그걸 나무랄 수만은 없다. 그러나 그런 ‘자리를 챙겨주기’ 위하여 법적으로 임기가 남은 전 정권 인사를 우격다짐으로 밀어내는 것은 ‘순리’가 아니다.

 

‘완장’ 소동, 권력 이동기의 서글픈 소극

 

KBS 정연주 사장도 그렇지만, 현 정부 집권 이래, 특히 문화체육관광부 산하기관에서 위와 같은 사례가 잦았다. 유인촌 장관이 그 ‘기관장 해임’에 앞장서면서 이른바 ‘완장론’이 불붙기 시작한 것 같다. 유 장관이 농촌 극 ‘전원일기’에서 양촌리 둘째 아들로 출연했던 배우 출신인지라 그건 졸지에 ‘촌놈이 완장을 차더니…’의 형식으로 증폭되면서 그는 내내 구설에 오르내렸다.

 

한동안 끓다가 잠잠해지는가 했더니 최근에 새로 ‘완장’론이 고개를 든 듯하다. 국무총리실 소속의 고급 공무원이 저지른 불법적인 민간인사찰의 전모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6월 28일 자 <프레시안> ‘손문상의 그림세상’에는 “완장클럽의 ‘일진’들”이라는 제목의 만평이 실렸다.

▲ 손문상의 그림 세상 '완장클럽의 일진들'(2010.6.28.) ⓒ <프레시안> 손문상

만평의 구성에 따르면 이 완장클럽의 ‘일진’으로 기록된 이들은 위의 유 장관을 비롯하여 이동관 청와대 홍보수석, 이재오 국민권익위원장이다. 각각 ‘MB’라는 머리글자(이니셜) 완장을 찬 이들은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도대체 완장이 몇 명이야!’ 하고 중얼대고 있다. 벽에 걸린 텔레비전 화면에는 “총리실 민간인사찰 ‘영포회’”라는 소개와 함께 ‘완장’ 찬 사내 하나가 진땀을 흘리고 있다.

 

‘완장(腕章)’은 말 그대로 ‘팔에 두르는 표장(標章)’이다. 이 땅에서 완장의 역사는 꽤 유구하다. 봉건왕조 시대는 잘 모르겠고, 이른바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이래 이 완장은 만만찮은 권력의 상징이었다. 그것은 지배와 피지배를 가르는 표지였고, 억압과 복종을 강제하는 상징이었다.

 

집 뒤짐을 해 식량을 빼앗아가고 젊은이들을 징용과 정신대로 끌고 갔던 일제 관헌들이 팔뚝에 차고 있었던 것이 완장이었다. 해방공간에서 한국전쟁에 이르기까지 격렬하게 맞부딪친 좌우 대립의 와중에서 선량한 농민들을 연옥으로 밀어 넣은 것도 좌우익 모두가 두르고 있던 저 ‘징한’ 완장이었다.

 

‘완장’, 그 구체적 힘과 한계

 

완장은 그것이 상징하는 표지대로 일종의 권력이다. 그것은 지배와 피지배를 나누는 일종의 경계면서 나머지 일방을 강제하고 억압할 수 있는 권한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완장은 실질적인 힘이면서도 동시에 그 힘이 가진 권력의 한계를 드러내는 표지이기도 하다.

 

권력의 ‘대리자’로서의 지위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은 ‘완장’이 가진 아킬레스건이지만, 한편으로 그것은 그 권력을 실질적으로 행사하는 구체적 힘이다. ‘완장’은 그래서 ‘보잘 것 없’지만 피지배 계층을 실질적으로 위협할 수 있는 ‘만만찮은’ 권력이다.

 

일찍이 작가 윤흥길은 장편소설 <완장>(1983년)을 통해 그것이 가진 힘과 거기 부수되는 폭력적 현실을 해학적으로 묘파했다. 판금 저수지의 관리인이 된 한 건달을 통해 작가는 ‘덧없는 권력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태도에 대한 경계와 풍자’를 수행한다.

 

‘완장 찬’ 임종술이 누리는 권력은 양어장에서 낚시를 즐기고자 하는 낚시꾼들에게는 구체적 힘을 갖지만, 그것은 ‘하빠리’에게 주어진 보잘것없는 권력에 그친다. 완장에 집착하는 종술에게 던지는 술집 작부 부월의 일갈은 그 점을 명확히 드러내 준다.

 

“눈에 뵈는 완장은 기중 벨 볼일 없는 하빠리들이나 차는 게여! 진짜배기 완장은 눈에 뵈지도 않어! 자기는 지서장이나 면장 군수가 완장 차는 꼴 봤어? 완장 차고 댕기는 사장님이나 교수님 봤어? 권력 중에서도 아무 실속 없이 넘들이 흘린 뿌시레기나 줏어먹는 핫질 중에 핫질이 바로 완장인 게여! 진수성찬은 말짱 다 뒷전에 숨어서 눈에 뵈지도 않는 완장들 차지란 말여!”

 

▲ 일본 헌병 완장

그렇다. 완장은 바로 하수인들의 표지다. 그것은 제일 밑에서 억압과 강제를 행사하는 미관말직의 ‘콩 꼬투리’만 한 권력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게 사람을 변화시킨다. 멀쩡한 사람도 완장을 차게 되면 매의 눈으로 이웃을 둘러보게 되며 그는 모든 ‘금제(禁制)’의 감시견이 되는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 경찰이나 헌병이 찬 완장은 신생 독립국으로도 연면히 이어졌다. 그것은 군과 경찰은 물론 행정관서에서도 일종의 위계나 권한의 표지로 남았다. ‘당직’을 맡은 이가 팔에 둘러야 했던 완장, 민방위훈련 때 일선 공무원들이 차야 했던 것까지 치면 권위주의 시대의 완장은 거의 일상이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 학교에서 아이들도 완장을 찼다. 1974년도 인천 지역의 어느 고교 교문 풍경. ⓒ 인천in

완장, 권위주의와 억압의 문화

 

학교도 예외는 아니어서 우리가 학생일 때는 ‘주번’ 완장을 찼고, 교사가 되어서는 ‘주감’과 ‘당직’ 완장을 찼다. 등굣길 교문에는 노란색 바탕에 두세 개의 빨간 선으로 둘러싸인 검정 글씨로 ‘규율’이나 ‘선도’ 따위를 새긴 완장을 찬 ‘선배’, ‘상급생’들이 하급생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주번이나 주감 완장이 사라진 것은 90년대가 넘어서였다. 팔뚝에 두르던 ‘선도’ 완장도 사라지거나 일부 학교에서는 가슴에 표찰 형식을 다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런 변화가 ‘권위주의’나 ‘강압적 지도’의 퇴조를 명시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아직 아닌 듯하다. 완장은 없어졌지만, 그것이 상징하던 권위나 억압은 여전히 여운처럼 남아 있는 것이다.

 

서양에서도 완장은 존재했을까. 이 나라에서 전개되었던 형식은 아닐지 몰라도 거기도 비슷한 문화는 존재했던 것 같다. 유럽에서의 완장은 히틀러의 나치로 축약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사진 속에 등장하는 히틀러의 이미지는 어디서나 비슷하다. 치켜뜬 눈, 소복한 콧수염에 가린 앙다문 고집스러운 입술의 이 파시스트가 왼편 팔뚝에 자랑스레 두른 것은 나치의 ‘하켄 크로이츠’(꺾어진 철십자)다.

▲ 히틀러와 하켄 크로이츠(철십자) 완장. 이는 억압과 공포의 상징이기도 했다.

주로 영화로 배운 사실인데 히틀러 친위대든, 소년단이든, 독일군 장교들은 모두 왼쪽 팔에 이 철십자 완장을 두르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것은 그들 나치를 상징하면서 동시에 다른 게르만족이 아닌 민족을 구분하는 중요한 표지였다. 특히 그 완장은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무차별 학살되었던 다윗의 후손들에게는 공포 그 자체였으리라.

 

지금도 신나치 세력이 있긴 하지만 나치의 완장도 역사 저편으로 사라졌다. 오랜 권위주의 정권을 청산한 21세기의 대한민국도 느리지만, 완장으로 상징되는 권위와 압제의 문화에서 벗어나고 있다. 그런 뜻에서 이제 억압의 역사, 공포의 문화를 상징하는 아이콘인 ‘완장’은 그 소임을 다한 셈이어야 한다. 그런데도 곳곳에서 ‘완장’의 뻣뻣한 고함이 그치지 않는 건 우리 사회가 여전히 후진적이라는 방증이다.

 

완장, 편 가르기와 배타적 동질성에 대한 집착

 

완장이 가진 또 다른 본질은 ‘편 가르기’다. 그것은 자신과 동류들의 동질성을 강조하면서 반대나 비판 세력에 대한 배척을 전제한다. ‘우리 편’이 아닌 ‘다른 편’은 공존의 대상이라기보다 절멸의 대상으로 이해되기 쉽다. 반대자들의 비판을 사회적 다원성이 아니라 통합을 저해하는 파당적 분열 행위로 여기는 까닭이 여기 있다.

 

어제 MBC PD수첩이 방영한 ‘엠비(MB)정부는 왜 나를 사찰했나’ 편은 국무총리실 산하 공직윤리지원관실 민간인 불법사찰 의혹을 고발했다. 그것은 한 모범적이고 양심적인 시민의 삶을 갈가리 찢은 불법적 공권력에 대한 개인의 고발이며, 언론의 심각한 문제 제기다.

▲ PD수첩의 <MB 정부는 왜 나를 사찰했나> 편.(2010. 6. 29.) ⓒ MBC 화면 캡처

문제의 공직 윤리지원관은 대통령과 동향인 포항·영일의 공무원 모임인 ‘영포회’의 멤버라고 한다. 손문상 화백의 만평이 겨냥하는 지점도 거기다. 만평의 부제가 “신흥세력 ‘영포회’의 도전?”인 이유다. 선량한 한 시민의 삶에 현미경을 들이댄 이 불법적 사찰의 배후에 ‘완장’들의 이해가 숨어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완장은 물론 모든 권력은 덧없다

 

완장은 권력의 ‘일부’이긴 하지만, 권력 그 자체는 아니다. 완장이 자신이 가진 힘을 지나치게 믿는 까닭은 자신이 몸 담고 있는 권력이 영원하리라는 착각 때문이다. 완장으로 상징되는 이 권력은 그러나, 한시적이다. 완장이 가진 힘의 근원인 ‘권력’조차도 ‘덧없는 일시적 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대중들이 자신들을 두려움이 아니라 연민으로 바라보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는 권력과 권력에 호가호위하는 ‘완장’은 얼마나 불행한가. 그런 역사와 시대도 불행하고 그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대중도 불행하다. 잦아들던 ‘완장’에 얽힌 소극을 다시 떠올리면서 ‘퇴행 없는’ 역사의 진보를 다시 생각해 본다.

 

 

2010. 6. 30.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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