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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길 위에서

만년필로 편지를 쓰다

by 낮달2018 2020. 6.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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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에게 온 편지, 만년필로 답장을 쓰다

▲ 스승의 날에 맞추어 특급으로 보내온 제자의 편지는 그때가 '참 좋은 시절'임을 확인하게 해 주었다.

한 달 전쯤에 대학을 졸업한 제자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았다. 2008년에 아이는 여고 2학년, 내 반이었고 내게서 문학을 배웠다. 스승의 날에 맞추느라고 그랬는지 익일 특급으로 보낸 편지는 길쭉한 진녹색 봉투에 들어 있었다. 나는 이름만 보고 그 애가 누군지를 단박에 알았다.

 

5월에 닿은 제자의 ‘편지’

 

한 반에 몇 명씩 있는 흔한 이름이 아니었던 탓만은 아니다. 해마다 서른 명 내외의 아이들을 맡다 보면 기억이 하얗게 비어 있는 아이들도 있긴 하지만, 대부분 어떤 특징적인 모습으로 떠오르게 마련이다. 시간이 지나서 앞뒤 기억이 뒤섞이면서 누가 선밴지 누가 후밴지 헷갈리곤 하지만 말이다.

 

아이들은 더러는 당돌하고 적극적인 모습으로, 따뜻하고 다정한 표정으로, 더러는 쓸쓸하고 외로운 실루엣으로 떠오른다. 아이는 제가 조용했던 편이라 기억하지 못할 수 있겠다고 썼지만 나는 아이의 편지를 읽으면서 그 아이의 표정과 모습을, 아주 미세한 부분까지도 기억해 냈다.

 

조용하고 온순했으며, 마음씨나 행동거지가 넉넉해서 남을 편안하게 해 주는 아이였다. 아이의 선량한 표정과 다소곳한 태도를 떠올리면서 나는 문득 불과 오륙 년 전이지만 그 시절이 내겐 정말 ‘참 좋은 시절’이었다는 걸 새삼스레 깨달았다.

 

아이는 ‘지루하고 재미없었던’ 고등학교 생활 가운데서 유일하게 ‘즐길 수 있었던’ 시간으로 문학 수업을 이야기했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바꾸게’ 해 준 내가 수업 중 들려준 이야기를 회고했다. ‘정말 뵙고 싶습니다.’라는 구절 앞에선 아이의 진심이 정말 따뜻하게 전해져 왔다.

 

혹시나 해서 휴대전화에서 아이의 번호를 찾아 문자를 보냈더니 금방 답이 와서 나는 잠깐 그 애와 통화를 했다. 꽤 시간이 지났어도 전화번호를 바꾸지 않았던 것도 아이다웠고 목소리도 귀에 익었다. 우리는 지난 4년의 안부를 가볍게 나누었다. 고맙다고 치하하면서 곧 답을 쓸게, 별로 자신이 없으면서도 약속하고 말았다.

 

그러고 이러구러 한 달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모니터 옆 바구니에 넣어둔 아이의 편지를 볼 때마다 거참, 하고 입맛을 다시면서. 어제 출근길에 나는 인근 여학교 앞 문구점에서 편지지와 봉투를 샀다. ‘일반요?’ 하고 묻는 걸, ‘아니요, 아이들 쓰는 거로’ 하고 대답했더니 주인은 한쪽 코너를 가리켰다.

 

조그만 가게라 구색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았다. 거기가 거기인 울긋불긋한 편지지 가운데서 연둣빛 나무가 그려진 놈으로 골랐다. 어쩐지 일반 편지지와 규격 봉투를 쓰기보다는 아이가 보내온 것 같은 곱고 예쁜 편지지와 봉투를 고르고 싶었기 때문이다.

▲ 답장을 하려고 나는 오래 묵혀둔 만년필을 꺼내 잉크를 새로 넣었다.

학교에 도착해서 나는 먼저 서랍 속에 잠자던 만년필을 꺼냈다. ‘다시 만년필을 쓰고 싶다’면서 장만한 파카 제품이다. 십만 원이 넘는 고가의 물건 대신 훨씬 싼 가격으로 산 놈이었다. 오래 쓰지 않아 잉크가 말라버린 만년필을 물에 씻고 새로 잉크 카트리지를 끼웠다.

 

수업이 비는 시간에 짧게 답을 썼다. 편지지에 바로 쓰려다가 문서편집기로 써서 그걸 옮기는 방법을 택했다. 오랜만에 쓰는 손 글씨는 생각대로 써지지 않았다. 나는 특수교육을 전공하고 임용을 준비 중이라는 아이에게 ‘좋은 교사’가 되어 교단에서 만나기를 기대한다고 썼다. 그리고 퇴근길에 그걸 학교 앞 우체통에 넣었다.

 

‘엽서와 편지의 시대’는 가도

 

먼지가 잔뜩 낀 우체통에 편지를 넣으면서 나는 문득 손으로 쓰는 편지, 혹은 엽서의 시대는 지나갔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했다. 우체통에는 토요일에는 우편물을 수집하지 않는다는 글귀가 붙어 있었다. 이 우체통에 손수 쓴 편지를 넣는 사람은 얼마나 되며 그들은 누구일까.

 

아이들도 이젠 편지를 쓰지 않는다. 방학 중이나 연말이면 교사들의 자리에 쌓이던 편지와 성탄 카드, 연하장 따위는 이제 옛이야기가 되었다. 아이들은 편지 대신 전화를 하고, 어느 날부터는 문자메시지나 카카오톡 따위로 안부를 전해온다.

 

그러나 우리 세대는 편지와 익숙하다. 우리는 편지질로 우정을 나누고 연애를 했던 세대다. 나는 결혼 전에 아내에게 꽤 많은 편지를 썼는데, 아내는 그걸 여태까지 간직하고 있다. 부피야 얼마 되지 않지만 짐이라길래 버리라고 했더니 아내는 그렇다고 그걸 어떻게 버리겠냐고 되묻는다.

 

우리는 친구들끼리도 꽤 편지를 주고받았다. 습작 시절에 나는 글을 쓰는 대신 편지질이나 엽서질로 빈약한 문학적 감성을 다스렸다. 나는 엽서를 잔뜩 사놓고는 생각날 때마다 무료한 일상과 책 읽기 따위를 시시콜콜 끼적댄 글을 벗들에게 띄우곤 했었다. 그 시절 친구들이 지금도 엽서의 세로 면에 깨알같이 쓴 내 편지를 되뇌곤 할 정도로.

 

군대를 마치고 대학으로 돌아오면서 손으로 편지 쓸 일이 시나브로 줄기 시작했다. 행정병으로 근무하게 되면서 타자기를 쓰기 시작했는데 자연스레 손 글쓰기와 멀어졌다. 복학하고 이태만인가에 나는 10개월 할부로 국산 타자기를 장만했다. 수동타자기가 전자타자기로 발전한 다음, 90년대에는 컴퓨터 시대가 열렸고.

 

컴퓨터와 함께 ‘아래아 한글’의 진화도 눈부셨다. 오랫동안 나는 아래아 한글로 편지를 썼다. 손 글씨는 편지를 출력해 끝에 서명하는 게 유일했다. 그리고 어느 날부턴 더는 우표를 붙여 편지를 보내는 일도 사라졌다. 인터넷을 이용한 ‘전자우편’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 것이다.

▲ 오랜만에 쓰는 편지는 쉽지 않았다.

편지를 우체통에 넣으면서 나는 새삼 우표를 사고 편지를 부친 게 얼마 만인지를 헤아려보았다. 각종 고지서나 안내문, 광고성 편지 등 오는 우편물은 넘치지만 정작 답을 해야 할 편지는 없다. 받는 편지가 없으니 보내야 할 편지도 당연히 없다.

 

편지보다 더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전화, 그것도 언제 어디서든 상대를 불러낼 수 있는 휴대전화는 안 가진 이가 없다. 공연히 시간과 돈을 들여서 손으로 글씨를 쓴다고 끙끙거릴 일은 없다는 얘기다. 그 대신 사람들은 통화와 문자메시지로 나누는 짧고 간명한 ‘전언(傳言)’의 세계에서만 살아갈 뿐이다.

 

편지쓰기, ‘효율과 편의’를 넘어

 

책상 앞에 앉아 부재의 대상을 그리며 마음속에 맴도는 사연을 불러낸다. 그리고 그것을 꼭꼭 눌러 종이 위에 옮긴다. 고이 접어 봉투에 넣어 우표를 붙이고 우체통에 집어넣는다. 속도를 신봉하는 21세기에 이렇게 성가신 과정의 편지 쓰기는 어쩌면 시대 지체(遲滯)의 일부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기계 장치에 의존하지 않고 몸을 움직여 무언가를 끄적거리고 다시 몸을 수고로이 하여 누군가에게 내 마음의 안부를 보내는 것은 단순한 효율이나 편의를 뛰어넘는 행위다. 그것은 일회적이고 순간적인 오늘날 관계의 미학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훨씬 더 관계의 본질에 가깝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다.

 

언제라도 옛 생각이 나거든 안부해다오. 만년필을 열어 놓고 기다리마.

 

나는 아이에게 보내는 편지 끝에 그렇게 썼다. 그게 얼마간 성가시고 적지 않은 근력을 요구하는 일이라 할지라도 마땅히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해서다. 만년필을 마련하고 나서 시골에 사는 친구에게 주소를 물어두고도 아직 쓰지 못한 편지를 이제라도 써야겠다고 생각하는 것도 그래서다.

 

 

2014. 6. 14.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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