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우 냉전 이데올로기를 신봉하는 어정쩡한 우파 이데올로그 이문열
작가 이문열이 화제다. 평역한 <초한지>를 완간한 뒤 ‘촛불집회’를 ‘위대한 포퓰리즘’이라고 말할 때부터 이 양반이 잘하면 ‘한건’ 하겠다는 조짐은 있었다. 그러더니 그는 불과 한 일주일 만에 시민들의 촛불을 ‘불장난’으로 헐뜯었고, 뜬금없이 ‘의병’을 거론하면서부터 온갖 비난의 중심에 서 있다.
그의 부친은 해방 공간에서 좌익 활동에 참여한 이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그의 부친은 ‘ 한국전쟁 당시 어머니와 어린 남매, 뱃속에서 아버지의 얼굴조차 보지 못한 막내를 버리고 사회주의를 좇아 월북’했다.
냉전 이데올로기와 ‘레드 콤플렉스’가 개인과 일가의 삶을 갈가리 찢어 놓아 버린 세월이 우리 현대사였을진대, ‘빨갱이 자식’으로 세상살이를 배웠던 작가의 성장사는 그것 자체로도 끔찍한 비극이었으리라.
작가 이문열의 '공산주의자 부친'의 원죄
공산주의자 아버지를 둔 ‘원죄’를 갖고 태어난 작가는 그만이 아니다. 그러나 그런 현실에 대한 그들의 대응 방식은 같지 않은 듯하다. 이문열은 김원일을 비롯한 이문구, 김성동 같은 이들과는 달리 자신의 부친과 그 세대의 사상적 방황과 선택, 시대적 이념을 일관되게 부정하고 적대시하면서 자신의 스탠스를 압도적 다수인 강자의 자리에 둔 이다.
이문열이 아버지 세대의 삶과 시대를 부정하면서 반세기 이후에도 여전히 극우 냉전 이데올로기를 신봉하는 어정쩡한 우파 이데올로그임을 자처하는 것은 그의 사상적 이념적 선택일 터이다. 그러나, 그러한 그의 선택은 한 시대를 살아가는 작가의 태도로 그리 아름다워 보이지는 않는다. 물론 나는 그러한 선택을 가능하게 한, 그의 삶과 그가 필시 겪어 왔을 고통과 번민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가 분단 시대의 작가로서 우리 시대와 사회가 안고 있는 숱한 모순과 과제에 대해 고통스러운 자기 성찰을 할 기회를 거부하고 냉전 이데올로기의 단순 반복 재생산에 나선 모습을 바라보는 것은 씁쓸하기 짝이 없다. 스스로 ‘20대 후반에 마음속에서 남로당 아버지를 살해했다’라는 이문열은 부친뿐만 아니라, 합리적 역사의식이나 비판 정신마저 죽인 것처럼 보인다.
작가란 무엇인가. 나는 작가란 그가 사는 시대정신의 담지자여야 한다고 믿는다. 작가가 수호하려는 가치는 적어도 동시대의 시민들이 공유하거나 최소한 공유하여야 할 가치라야 한다. <25시>의 작가 게오르규가 ‘잠수함의 토끼’라는 비유로 언급한 ‘작가의 예언자적 역할’까지 기대하는 것이 무리라면 최소한 시대와 인간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기본이어야 한다.
그가 삶과 사회, 정치와 역사를 보수적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은 전적으로 그의 자유다. 그러나 한쪽 눈을 의도적으로 감은 외눈박이로 세상을 바라보면서 두 눈으로 그것을 이해하는 이들에게 종주먹을 들이대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그는 자신의 선택과 판단을 ‘시대와의 불화’로 미화했지만, 어느 논객의 지적처럼 그가 살아야 할 시대는 17세기인 듯하다. 그가 사는 ‘지체(遲滯)의 삶’은 역사와 그 진보에 대한 부정이고 모멸이다.
그의 사유에서는 전문 기관이 수행하는 여론조사도 조작할 수 있는 무엇 중의 하나인 듯하다. 그는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10%대 지지율에 강한 불신감을 ‘조작’으로 이해하고 ‘공영방송이 정부의 대변인 역할을 할 수 있다’라는 식의 군부독재 시절에나 어울릴 법한 언론관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그는 누리꾼들에 의해서 위력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조중동> 광고 불매운동을 ‘범죄행위’와 ‘집단 난동’으로 규정하며 “내란에 처하면 의병이 일어나는 법”이라며 의병들의 궐기를 촉구하고 있다. 정작 시청과 공영방송국 앞에 각목과 가스통을 들고 나타난 그의 ‘의병’들 앞에 그는 나타나지 않겠지만 말이다. 그는 이 황당무계한 ‘의병론’으로 자신이 17세기의 인물임을 증명한 셈이다.
1977년 1월, 그가 대구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가작 입선했을 때, 입선작 ‘나자레를 아십니까’를 나는 누님댁에서 읽었다. 주인공의 회고 형식으로 이루어진 그 소설의 내용은 거의 기억에 남아 있지 않지만, 이문열 특유의 잔뜩 ‘폼을 잡은’ 서술이 인상적이었다.
이후 그의 작품 중에서 ‘새하곡’(1979)과 ‘그 겨울’ 같은 작품들이 썩 인상적이었지만, ‘오늘의 작가상’을 받은 ‘사람의 아들’은 뭔가 개운하지 못한 느낌이었다. ‘인상적’이었다는 말은 정직하게 말하면 좀 매료되었다는 뜻인데, 20대 끄트머리에 그걸 이문열 소설의 한계로 이해하게 되었던 것 같다.
권력과 가부장제에 대한 집착, 민중에 대한 기피와 혐오
내가 작가 이문열을 거부하고 그의 문학을 부정하게 된 것은 그가 ‘보수 우익의 총아’로 떠오르기 훨씬 전부터다. <황제를 위하여> 이후 내가 그의 작품을 더는 읽지 않았던 건 순전히 그런 까닭이었다. 글쎄, 왜 그랬는지는 정확하게 설명하기 힘들다.
나는 평단의 호평이나 독자들의 환호 저편에 숨겨진 이문열 소설의 아킬레스건 같은 걸 목격해 버린 느낌이었던 것 같다. 요란하게 신에 대하여, 삶과 역사에 대해서 발언하면서도 정작 그것의 외피를 벗기면 드러나는 것은 앙상한 ‘앎’에 지나지 않는다고 나는 느꼈다. 뒤이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한 그의 세계관에 나는 작가로서의 이문열을 내 기억에서 지워버렸다.
‘이문열 책 반환 운동’을 전후해서 드러나기 시작한 그의 멘탈리티는 권력과 가부장제에 대한 집착과 함께 민중에 대한 기피와 혐오 등으로 아우를 수 있을 듯하다. 그가 살해한 ‘남로당 아버지’의 자리를 차지한 것은 ‘강자’로서의 권력이다. 그는 ‘강한 것을 선’으로 인식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의도적 무시와 폄하, 그 저항에 대한 능멸
권력은 그가 성장기에 겪은 고통을 보상하는 기제로서 기능하는 듯하다. 그에게 권력으로서의 강자는 독재 정권에서 일본, 미국, 조중동, 한나라당, 문단 권력에 이르기까지 같은 의미로 읽히는 것 같다. 그것은 반대로 사회적 약자에 대한 의도적 무시와 폄하, 그들의 저항에 대한 능멸로 나타난다.
‘한일합방은 엄연히 국제법상 합법’이라거나 대통령 탄핵 사건과 미선·효순 추모 촛불 시위에 대해 개인 ‘우상숭배’라고 강변하는 논리는 볼 것 없이 그러한 인식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다. 프랑스의 전후 청산에 대해 “프랑스는 4년 8개월이고, 우리는 36년간이다. 프랑스는 전시점령의 문제”라고 호도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적어도 민주주의와 역사의 진보라는 부정할 수 없는 물결 앞에서 전근대적 강자의 논리와 패러다임에서 허우적대는, 국내에서 가장 많은 인세를 버는 작가는 그것 자체로 절망이다. 그것은 그 개인의 불행에 그치지 않고 그의 멘탈리티를 추종하는 숱한 독자들에게도 불행이 될 수밖에 없다.
안티조선 운동을 하는 시민단체에 대해 홍위병이라 비난함으로써 촉발된 ‘이문열 책 반환 운동’에 나는 동참하지 않았다. 운동의 대의를 전폭적으로 지지했지만, 나는 책을 반환하지도, 그걸 살라버리는 일도 하지 않았다. 한 작가의 삶과 문학은 별도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데에 나는 기본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그걸 동의하는 것과 그의 문학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글쎄, 이문열의 저작은 내 서가에서 나름의 시대와 한 작가의 시대착오적 세계관의 한 징표로서 남아 있어도 되지 않겠는가 말이다. 전여옥과 조갑제의 저작은 찢어서 쓰레기통에 처박았지만, 이문열의 소설집을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그런 생각 때문이었다.
예의 ‘의병’ 발언이 있던 날, 나는 처음으로 그의 소설들을 처리해 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귀가하자마자 나는 서가에서 그의 책을 골랐다. 비좁은 방의 서가에 겹쳐 꽂아 놓은 책 속에서 나는 네 권의 소설을 찾아냈다. 아마 예닐곱 권은 족히 나오리라고 생각했는데 내 기억에 착오가 있거나 아니면 나머지는 제대로 찾지 못한 결과일 것이었다.
사진이 그 책이다. 위에 얹힌 두 권의 책은 80년 전후에 간행된 것으로 세로쓰기본이다. 나는 이 책들을 들고 어디 교외에 나가 살라버리는 걸 잠깐 궁리했다. 그러나 그 그림은 어쩐지 옹색해 보였다. 아들 녀석이 그랬다. “버리려구요? 놔두죠. 그냥 보관하는 것도 괜찮지 않나요?”
그리고 며칠이 지났다. 여전히 나는 결정하지 못했다. 아깝다거나 무슨 미련이 있는 것은 아니다. 어쩐지 그런 모습이 옹색하고 마뜩잖아 보이는 것이다. 이문열은 우리 시대의 서글픈 보수의 미욱한 표지일 뿐이다. 거기 일희일비할 이유가 별로 없지 않나 싶기도 한 것이다. 이웃들의 생각은 어떨지 궁금해진다.
2008. 6. 27.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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