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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텃밭일기

[2010 텃밭일기 ⑥] 꽃이 피어야 열매를 맺는다

by 낮달2018 2020. 7.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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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쉬 자라지 않고 애를 태우던 우리 고추(위)는 이제 이렇게 풍성하게 열매를 달았다.(아래)

‘장마’라더니 정작 비는 한 번씩 잊을 만하면 잠깐 내리다 그친다. 변죽만 울리고 있는 장마철, 오랜만에 텃밭에 들렀다. 그래도 두어 차례 내린 비는 단비였던 모양이다. 밭 어귀에 들어서자마자 새파랗게 익어가는 작물들의 활기가 아주 분명하게 느껴진다.

 

밭을 드나들 때마다 저절로 이웃집 고추와 우리 걸 비교해 보게 된다. 밭 어귀의 농사는 썩 실해 보인다. 이들의 고추는 키도 훤칠하니 클 뿐 아니라 대도 굵고 전체적으로 고르게 자라서 한눈에 턱 보면 농사꾼의 ‘포스’가 느껴진다. ‘딸은 제 딸이 고와 보이고, 곡식은 남의 것이 탐스러워 보’여서 만은 아니다. 파종 시기도 빨랐고 제대로 가꾸어 준 표시가 역력한 것이다.

 

밭 주인이 성급하게 뿌려준 비료로 골병이 들었던 우리 고추는 거기 비기면 뭐랄까, 그간 제대로 못 먹고 자라난 아이 같았다. 키도 고르지 않은 데다가 대도 형편없이 약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 고추도 검푸른 빛깔로 생기를 되찾았다. 대도 실해지고 줄기도 무성해졌다.

 

무엇보다도 고추가 아주 실하게 달렸다. 포기마다 주렁주렁 매달린 고추가 날이 다르게 굵어지고 맵시가 새로워지는 걸 보는 기분은 부풀려 표현하면 ‘황홀할’ 정도다. 얄팍한 농사꾼 내외는 그 기쁨을 못 참아 경망스럽게 촐싹댔다.

 

“여보, 그간 우리가 지은 농사 중 제일 풍작인 것 같지?”

“정말 그래요. 뭐니 뭐니 해도 결국 밭이 좋아야 되는 거 아니겠우?”

▲ 한쪽에는 잎이 말라 죽는데 다른 쪽에서는 다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었다.
▲ 이제 우리 고추도 실팍하게 여물어가고 있다.
▲ 밭에 활기를 불어넣는 것은 단연 호박고구마다. 시원한 줄기 사이로 풀이 짓었다.

한 포기밖에 없는 오이도 한쪽 잎은 말라 죽으면서도 다른 쪽에서 꽃을 피우고 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지 못하지만, 작물이 보여주는 생명력은 놀랍다. 구색 맞추자고 심은 파프리카도 아주 굵직한 열매로 자라났다. 군데군데 죽긴 했지만, 호박고구마는 놀랍게 줄기를 뻗고 있다.

 

밭 어귀 언덕바지에 심은 호박도 잊을 만하면 주먹만 한 열매를 맺는다. 우리 텃밭 어귀의 가지만이 예전에 짓던 농사만 못 하다. 총총히 열매를 맺긴 하는데 길이만 자랄 뿐 별로 살이 찌지 않는다. 전에 그렇게 척박한 땅에서도 가지는 잘도 자라주었는데……. 우리가 머릴 갸웃하는 이유다.

 

며칠간 밭에 들르지 못했더니 고랑에 풀이 제법이다. 아내가 고추를 따고 상추를 솎아 줄 동안 나는 호미를 들고 고랑의 바랭이며 쇠비름, 명아주 따위의 풀을 맸다. 뽑아낸 풀은 고추 두둑 위에다 얹어 두면 절로 말라 죽는다.

 

“세상에, 고추가 벌레 먹기 시작하는가 보네. 벌레 먹기 시작하면 금방 번진다는데…….”

 

아내가 구멍 난 고추를 내민다. 물끄러미 고추를 바라보는데 뭐라 하나 가슴 한 군데가 헛헛하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벌레 먹으면 먹는 대로 그냥 내버려 둘 수밖에. 마지막까지 제힘으로 살아남는 걸 바랄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 구색 맞추어 심은 파프리카도 제 몫을 하고 있다.
▲ 다른 건 모두 예년보다 나은데 가지는 어쩐지 길이만 자랄 뿐 살이 붙지 않는다.

이랑 맨 끝에 심은 옥수수 줄기에 자줏빛 수염을 잔뜩 단 열매가 뿌듯하다. 그 아래 땅콩 줄기도 무성하다. 무엇보다 밭에 활기를 불어넣는 것은 호박고구마다. 하트 모양의 자줏빛이 도는 잎도 건강해 보이거니와 그 뻗어나는 줄기의 포스가 시원하다. 고랑과 두둑에 돋아난 풀을 매는데 아내가 탄성을 지른다.

 

“고구마꽃이 피었네!”

 

고구마꽃? 갑자기 머리가 텅 빈다. 감자꽃은 익히 보아온 거지만 고구마꽃을 본 적이 있던가 싶어서다. 우리 것보다 훨씬 잘 가꾼 이웃 이랑의 호박고구마가 꽃을 피웠다. 꽃잎은 붉은 기가 도는 흰빛인데 화심은 자줏빛이 낀 진분홍이어서 마치 나팔꽃이나 메꽃처럼 보이기도 한다.

 

얼마 전 이웃 ‘해를 그리며’님의 주말농장에서 본 땅콩꽃을 떠올린다. 그이뿐 아니라 여러 사람이 땅콩꽃은 처음이라고 했다. 노란 땅콩꽃은 마치 무슨 나비 같기도 했다. 고구마꽃도 거기 뒤지지 않는다. 넓적하고 시원한 꽃잎 속에 뜬 고구마꽃은 소박하면서도 단정했다.

 

활짝 핀 고구마꽃을 렌즈에 담으면서 우정 생각한다. 하긴, 꽃이 피지 않고 열매를 맺는 식물이 있겠는가! 곡식인 벼도 보리도 꽃을 피운다. 비록 화려하지 않고 소박한 꽃이지만……. 그러고 보니 노랗게 핀, 볼품없이 커다란 초롱 같은 꽃잎의 호박꽃이 예사로 보이지 않는다.

▲ 고구마꽃. 꽃잎의 빛깔과 모양새가 마치 메꽃이나 나팔꽃을 연상케 한다.

대지는, 흙은 인간을 가르쳐 왔다. 선사시대 이래 농경의 역사란 인간이 대지와 흙과 교감하면서 나눈 가르침과 깨달음의 시간이었다고 해도 무방할 터이다. 손바닥만 한 텃밭을 가꾸며 우리 내외 같은 얼치기 농사꾼이 이런저런 늦깎이 깨달음이라도 얻을 수 있는 것은 오직 흙의 축복이다.

 

 

2010. 7. 11.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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