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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텃밭일기

[2010 텃밭일기 ④] 과욕이 남긴 것

by 낮달2018 2020. 6.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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섣부른 비료 주기, 고추 모를 죽이다

▲ 과욕은 화를 부른다. 조급한 마음에 뿌리 근처에다 금비(金肥)를 뿌린 덕분에 우리 고추는 시들시들 곯고 있다.
▲ 시들어 가고 있는 우리 고추. 잎이 타들어 가면서도 하얗게 꽃을 피워냈다.

텃밭 농사가 주는 기쁨은 날이 갈수록 새록새록 쌓여간다. 밭머리에서 우썩우썩 자라고 있는 상추와 쑥갓을 뜯어와 밥상에 올리고, 날마다 빛깔을 바꾸며 크고 있는 작물을 바라보는 기쁨이란 쉽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웃과는 달리 비닐을 덮기 전에 미리 퇴비를 얼마간 뿌렸건만, 밭 주인은 초조했나 보다. 우리는 시내 종묘사에서 소형 포대에 든 비료를 사 왔다. 장모님은 물비료를 조금 주고 말라고 했건만 우리는 그걸 귀담아듣지 않았다. 금비를 주려면 뿌리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고랑 쪽에다 소량을 묻는 정도로 그쳐야 한다.

 

필요한 건 ‘욕심’이 아니라 ‘시간’이다

 

어느 날, 퇴근해 보니 아내가 낮에 비료를 뿌렸다고 했다. 일손을 덜었다 싶어서 나는 흡족해했다. 그런데 한 이틀쯤 후에 밭에 다녀온 아내가 울상을 했다. 우리 고추 모가 잎이 마르면서 시들어 죽기 시작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내에게 물었더니 아뿔싸, 뿌리 근방에다 비료를 준 모양이다.

 

득달같이 밭에 나가보았다. 이웃 밭의 작물들은 싱싱하게 자라고 있는데 우리 텃밭의 고추는 시들시들 곯으면서 잎이 누렇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속이 잔뜩 상해서 아내에게 역정을 냈다. 정말이지 내 몸의 어느 한 부분이 타들어 가는 느낌이었다. 아내는 죄가 되어 한 마디 대꾸도 못 했다.

 

글쎄, 지갑을 잃거나 무슨 소지품을 잃었다 해도 그렇게 마음이 아리진 않았을 거다. 살아날 가망이 없어 보이는 모 몇 포기를 거칠게 뽑아 던지는 거로 화풀이를 했다. 기운이 빠져서 돌아오는데 마음이 아픈 건 아내라고 다르랴. 공연히 화를 냈다 싶어서 말을 붙이는데 아내도 마음이 몹시 상해 있다.

 

“과욕이었어. 그게 문제였던 거야…….”

“그래요. 공연히 욕심을 내어서…….”

▲ 단 한 포기 심어놓은 오이에 꽃이 피는가 싶더니 이렇게 옹골찬(!)  열매를 맺어놓았다.
▲ 바랭이의 기습. 그예 풀과 싸움이 시작된 것인가.
▲ 호박고구마를 심어놓은 데에도 바랭이, 명아주, 쇠비름 따위의 풀이 웃자라기 시작했다.

그렇다. 작물이 뿌리를 내려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데 필요한 것은 시간이다. 시간과 함께 알맞은 햇볕과 비와 바람이 한데 어울려야 한다. 꽃이 피기도 전에 열매가 맺히기를 기대하는 것은 과욕일 뿐이다. 더구나 이 조그만 텃밭에 자투리 시간을 내어 들여다보는 텃밭 농사임에랴!

 

어제 오후 늦게 밭에 다시 나가 보았다. 이웃집 모종은 검푸른 빛을 내면서 자라고 있는데 우리 고추 모는 여전히 시들시들 곯고 있었다. 생기 없는 녀석의 꼬락서니를 보니 그러지 말자고 자신에게 타이르면서도 새로 속이 상한다.

 

그러나, 누렇게 말라붙은 잎사귀를 달고도 우리 고추는 아직도 힘겨운 생존을 위한 싸움을 계속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예 말라죽은 모도 전혀 없지 않지만, 대부분 모는 힘겹게 몸을 부지하고 있었다. 어쨌든 이겨내고 일어나라. 나는 말라붙은 잎사귀를 따 주고 대 아랫부분에 싹을 내미는 줄기도 잘라 주었다.

 

그러나 생명은 얼마나 질기고 강한가. 누렇게 말라붙은 잎사귀를 늘어뜨리고도 우리 고추는 하얀 꽃을 피워내고 있었다. 글쎄, 잘못 본 게 아닌가 했는데 정말이었다. 죽을 놈은 죽고 살 놈은 스스로 기운을 차리고 몸을 가누게 될 거라더니 이웃의 말이 틀리지 않은 것이다.

 

땅의 생명력과 인간의 몫

 

고추 이랑이 끝나는 부분에 아내가 심어놓은 오이 한 포기도 노랗게 꽃을 피우고 있었다. 며칠 전에만 해도 새끼손가락만 한 오이를 달고 있더니만 세상에, 어느새 아가 팔뚝만 한 놈이 되어 있었다. 고추 달리는 것을 보는 것과는 다른 묘한 감동이 일어난다. 아내 말대로 덩굴이 올라갈 지지대를 세워 주어야 할 성싶다.

 

이랑 끝부분에 심은 고구마도 제대로 뿌리를 내려 자라고 있었다. 자줏빛이 도는 하트 모양의 잎 빛깔이 아주 건강해 보였다. 그러나 뚫린 비닐 구멍에 자란 것은 고구마 순만이 아니다. 곳곳에 언제 뿌릴 내렸는지 바랭이와 명아주, 쇠비름 따위의 풀이 수북한 것이다.

 

고랑 쪽은 더 심하다. 저쪽 밭두렁까지 풀이 시퍼렇게 짓었다*. 내일 오후에는 아내와 함께 김을 매러 와야겠다고 생각한다. 이 텃밭 농사도 만만치 않다. 잡초가 짓기 시작하면 이웃 농군들은 물론이거니와 농사 그렇게 지으려면 당장 그만두라는 관리인의 성화가 예사롭지 않다는 것이다.

 

마땅히 그래야 한다. 비록 주말농장 형식으로 가꾸는 소꿉장난 같은 규모지만 농사는 농사다. 규모가 작고 제 농사라고 해서 밭을 묵히거나 제멋대로 작물들을 버려두는 것은 땅에 대한 예가 아니다. 살아 있는 땅의 생명력을 이어나가는 것은 그 땅에 발붙이고 살아가는 인간의 몫이니.

 

* 짓다 :

‘나무나 풀 따위가 매우 무성하게 나다’는 뜻의 고장 말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전남과 충북의 방언이라고 소개하고 있으나 우리 지방에서도 두루 쓰는 말이다. 나는 이 낱말이 가진 울림이 참 좋다. 풀이 자라기 시작하여 무성해지기까지의 과정과 상황을 제대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2010. 6. 6.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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