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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텃밭일기

[2010 텃밭일기 ⑤] 첫 결실, 시간은 위대하다

by 낮달2018 2020. 6.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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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밭 어귀에서부터 펼쳐지는 초록빛 물결이 훨씬 짙고 푸르러졌다. 그것은 일종의 활기로 느껴진다.

고추에 지지대를 박아 주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차일피일하다가 처가에 들른 김에 장모님과 함께 종묘사에 들러 지지대 서른 개를 샀다. 개당 300원, 9천 원을 썼다. 고추 포기마다 쳐 주지는 못하고 서너 포기 간격으로 지지대를 박아 놓고 짬이 나지 않아 며칠을 보냈다.

 

지지대 사이를 비닐 끈으로 이은 것은 며칠 전이다. 두둑에 심은 고추의 열이 고르지 않아서 두 겹으로 친 줄이 고춧대를 제대로 감싸지 못할 것 같다. 서툰 농사꾼은 어디서든 표가 나기 마련인 것이다. 한 포기밖에 없는 오이 위에는 장모님께 얻어 온 온상용 철근(?)을 열십자 모양으로 박고 끈으로 단단히 묶었다.

 

오늘 다시 며칠 만에 밭에 들렀다. 밭 어귀에서부터 펼쳐지는 초록빛 물결이 훨씬 짙고 푸르러졌다. 시간은 이처럼 위대한 것이다. 시들시들 곯고 있었던 고추들도 언제 그랬냐는 듯 검푸른 잎이 무성해졌고, 가지의 자줏빛도 훨씬 짙어졌다. 거기에다 이제 슬슬 열매가 달리기 시작한다.

 

아내와 나는 마주 보며 미소를 나누었다. 말하자면 ‘회심의 미소’다. 그건 미심쩍어하다가 마침내 진실을 확인하는 자들의 기쁨인 셈이다. 우리 이랑 옆의 감자는 며칠 전에 수확한 모양이다. 땅이 갈아엎어졌고, 뿌리째 뽑힌 감자 줄기가 고랑에 수북했다. 아니 벌써! 그렇다, 어느새 유월도 깊은 것이다.

 

▲ 다섯 포기의 가지. 아마 여름내 이 열매는 내 식탁을 빛내 줄 것이다.
▲ 아직 제대로 여물진 않았지만, 고추가 제법 총총 달렸다. 고춧잎도 검푸르다.
▲ 장모님께 얻어 온 긴 지지대를 열십자로 엮었다. 오이가 여러 개 달렸다.
▲ 이랑 뒤쪽에 심은 호박고구마의 무성한 잎은 전체적으로 밭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 밭 어귀의 비탈에 심은 호박. 가물어 이내 꼭지가 빠져 버린다.

가지에는 자줏빛이 도는 분홍 꽃이 소담스레 핀 만큼, 길쭉한 방망이 모양의 열매가 시원하게 달렸다. 나는 가지 반찬을 좋아한다. 가지나물도 좋고, 얼음을 둥둥 띄운 가지 챗국도 좋다. 모두 다섯 포기, 이 가지는 여름내 내 밥상에 심심찮게 올라올 것이다.

 

▲ 2010년 농사의 첫 수확

오이는 십자로 엮어 준 지지대를 타고 제법 벋어 났다. 노란 꽃을 뚫고 조금씩 몸을 내미는 열매가 소담스럽고 팔뚝만큼 자란 열매도 두 개 매달렸다. 아내는 이럴 줄 알았으면 서너 포기 더 심을 걸, 후회가 늘어졌다.

 

어떤 작물을 심을 건가를 결정하는 것은 농사꾼의 기본이다. 그러나 우린 그것조차 대충 어림짐작으로 때운 것이다.

 

이랑 끝에 심은 호박고구마는 더러 죽은 놈도 있지만, 썩 잘 자라고 있다. ‘무성(茂盛)’하다는 표현이 걸맞은 형국이다. 하트 모양을 닮은, 푸르고 자줏빛이 도는 잎이 시원해서 밭 전체에다 묘한 활기를 불어넣는 느낌이다.

 

이랑 어귀의 상추를 좀 솎아 나서려는데 조그만 수로 뒤편 밭두렁에 심은 호박이 눈길을 끈다. 넓적한 잎에 난 얼룩이 시원한데, 숨겨진 덤불 가운데, 주먹만 한 호박이 달렸다. 가문 탓에 호박은 여물기 무섭게 꼭지가 빠져 버린다. 아내는 살붙이라도 잃은 듯 안타까운 표정이다.

 

어쨌든 싱그러운 연둣빛으로 익어 윤이 흐르는 호박을 바라보는 기분은 심상하지 않다. 심마니들이 산삼을 발견하고 ‘심 봤다’고 고함지르는 느낌이 이와 같을까. 호박 농사는 처음이다. 일종의 충만감이랄까, 기쁨과 감동으로 마음이 저릿하다. 그러나 아내는 금방 꼭지가 떨어질 거라며 녀석을 냉큼 따서 광주리에 담았다.

 

 

2010. 6. 24.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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