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만에’와 ‘뿐만 아니라’, 혼자서 쓰일 수 없다
‘오래간만에’와 ‘간만에’
오래 만나지 못했던 사람을 만나면 사람들은 ‘오랜만이다’, ‘오래간만이다’라면서 손을 맞잡고 반가움을 표시한다. 나는 어른들이 악수하던 손을 흔들어대며 되뇌던 그 말을 배우면서 어떤 상황이면 저렇게 반가울 수 있는가가 꽤 궁금했다.
뒷날 자라서 우리네 삶에 그런 일은 일상이라는 걸 깨달으면서 나 역시 옛적의 어른들이 그랬던 것처럼 붙잡은 손을 위아래로 흔들고 ‘오래(간)만’을 연발하곤 한다. 생활 주변에 있는 이웃이 아닌 이상, 만나는 사람들이 ‘오랜만’일 수밖에 없는 법이니 말이다.
‘오래간만에’, 또는 줄여서 ‘오랜만에’ 대신 사람들은 언제부터인가 ‘간만에’를 쓰기 시작했다. 아마 말 줄이기 선수인 젊은이들이 시작했으리라 짐작되는 이 말은 이제 대중매체에서도 공공연히 쓰이고 있다. 군소 온라인 매체만이 아니다. 내로라하는 유명 일간지, 통신사, 방송사, 온라인 언론 등에서도 ‘간만에’는 대놓고 쓴다. 맨 앞에 붙인 이미지는 ‘구글’에서 ‘간만에’로 검색한 결과 중 일부다.
“간만에 문을 열어준 트럭 운전사”
“……간만에 다시 읽게 되었다.”
“대한이 간만에 이름값을 했습니다.”
“……간만에 화력을 쏟아냈습니다.”
“간만에 외출입니다.”
‘오래간만’은 명사다. 줄이면 ‘오랜만’이다. 당연히 ‘오래’를 뺄 수 없다. <국립국어원>의 ‘온라인 가나다’에서는 ‘간만에’는 “사전에 등재되어 있지 않다”라고 답하고 있다. ‘오래간’의 ‘간’이 한자어 ‘간(間)’이지 않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은 아래와 같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오래간만’은 한자어가 아닙니다. 사전에 따르면 ‘오래간만’은 ‘오래간+만’이 결합한 어휘입니다. ‘오래간만’의 의미를 고려하여 생각해 보면, ‘상태나 현상이 길게 계속되거나 유지되다’의 의미인 ‘오래가다’의 관형사형 ‘오래간’과 ‘동안이 얼마간 계속되었음을 나타내는 말’인 의존명사 ‘만’이 결합한 것으로 보입니다.
- 국립국어원 ‘온라인 가나다’ 중에서
에둘러 ‘사전 미등재’라고 말한 것은 이 표현이 올바르지 않다는 얘기다. 이렇게 말하면 대번에 쌍지팡이를 짚고 나설 이들이 적잖다. “그래도 사람들이 다 그렇게 쓰는데?” 언어 규범에선 사람들 대다수가 쓰는 말이라고 하더라도 올바르지 않은 표현을 다 받아들이진 않는다.
‘그뿐만 아니라’와 ‘뿐만 아니라’
‘뿐만 아니라’도 꽤 광범위하게 쓰이는 말이다. 주로 “그는 리더십이 뛰어난 친구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겸손하기까지 했다.”와 같은 방식으로 사용된다. 뜻을 새기는 데 별 지장이 없으니 모두 지나치고 말지만 사실 이 구절은 ‘틀린’ 말이다.
‘뿐’은 사전에서 확인할 수 있듯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체언이나 부사어 뒤에 붙는 조사고 나머지는 관형사형 어미 ‘-을’ 뒤에 쓰이는 의존명사다. 그런데 위 말에 나타난 ‘뿐’은 의존명사로 볼 수는 없다. 의존명사 ‘뿐’ 앞에는 관형어가 반드시 나타나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위 말은 ‘그뿐만’, 또는 ‘이뿐만’에서 대명사 ‘그’나 ‘이’를 줄여서 ‘뿐만 아니라’로 쓴 것으로 볼 수밖에 없는데 이는 명백한 잘못이다. 하긴 사전에 따라서 ‘뿐만아니라’를 부사로 다루는 데도 있는 모양이다. 국립국어원 ‘온라인 가나다’에 오른 관련 질문과 답변이다.
문장을 시작할 때 흔히 ‘뿐만 아니라’를 쓰곤 합니다.
그런데 ‘뿐’이 조사이므로 ‘이뿐만 아니라’로 써야 하는 것 아닌가요?
‘뿐만 아니라’는 틀리는 것 아닌가 해서 여쭤봅니다.
[답변]
‘이뿐만 아니라’가 맞습니다. 귀하께서 알고 계시는 대로 ‘뿐’은 조사라 체언이 그 앞에 오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사전에 따라서는 ‘뿐만아니라’ 자체를 부사로 다루기도 하지만, 우리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뿐만아니라’를 단어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뿐만 아니라’, ‘그뿐만 아니라’ 식으로 표현해야 합니다.
- 국립국어원 ‘온라인 가나다’ 중에서
명백하게 그릇된 표현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말들은 시정에서 일상으로 쓰인다. 앞에 잠깐 이른 것처럼 언어 규범은 다수 사람이 쓰는 말이라고 해서 올바르지 않은 표현을 다 받아들이진 않는다. 그러나 이미 거역할 수 없는 실체로 자리하고 있는 변화의 경우엔 부득이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시대도 변하고 말은 변한다. 말은 사람들의 생각과 감정을 날 것 그대로 투영해 주는 도구이므로 거기엔 그 시대의 풍정과 가치관이 고루 담겨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시대와 변화만으로 언어의 모든 변화를 추인하지 못한다. 추인되거나 추인되지 못하는 오묘한 경계를 다투고 있는 말의 변화를 바라보는 것은 꽤 흥미로운 일이다.
2015. 2. 13.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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