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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객님’에서 ‘사장님’까지 - 우리말의 ‘호칭’ 생각

by 낮달2018 2020. 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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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루뭉술한 우리말의 ‘호칭어’

▲ 백화점 등에서 이루어지는 고객에 대한 예우는 때로 고객을 불편하게 하는 측면도 있다. ⓒ 허핑턴포스트 코리아

접객업소나 가게 따위에서 ‘사장님’으로 불린 경험은 중년 이후의 남성이라면 누구에게나 있다. 글쎄, 그런 호칭을 들으면 기분이 좋은 이들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기실 ‘사장’과는 무관한 사람이 그런 호칭을 들어야 하는 건 썩 유쾌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상대방이 그런 호칭을 선택한 것은 일종의 예우다. 그가 사장이든 아니든 그건 별문제가 아니다. 이 호칭은 본인의 지위와는 무관한 ‘말치레(립 서비스)’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사장’으로 불린 사람이 이걸 가지고 화를 낼 수도 없는 노릇이다. 기껏해야 지나가는 말로 ‘나 사장 아닌데…….’ 하고 얼버무리는 게 고작인 것이다.

 

사장님, 아버님…

 

나는 집 앞의 이용소에서 10여 년 가까이 ‘사장님’이란 호칭으로 불리었다. 상대는 내가 교사라는 사실은 대충 알고 있는 눈치였지만, 줄곧 ‘사장’이란 호칭을 썼다. 들을 때마다 입맛이 쓰지만, 상대의 예우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선생’이라고 불러 달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나도 그를 ‘사장’이라 불렀다. 비록 종업원 없이 부인과 함께 운영하는 업소지만 그는 주인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아저씨’ 정도의 일반적 호칭으로 부를 수도 있긴 하다. 그러나 자기 나름대로 내게 예우를 하는 그에게 지위에 맞는 호칭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참 우리말에는 이런저런 상황에서 쓰는 호칭이 좀 아쉽다고 생각했다.

 

나이가 들면서 누구나 경험하는 호칭으로 ‘아버님’, ‘어머님’도 있다. 그렇게 불릴 만한 나이로 보이는 상대에게 한껏 높여주는 호칭인 듯한데, 정작 이렇게 불리는 이들의 느낌은 그리 개운치가 않다. 그리 불릴 만큼 늙지 않았는데 하는 억하심정이 들 수도 있고, 낯선 사람한테서 그런 호칭으로 불리는 걸 민망하게 여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호칭을 이름으로 대신하는 서양말과는 달리 우리말에서는 아랫사람이 아닌 한 이름을 부르는 것은 금기다. ‘기휘(忌諱)’라 하여 임금의 이름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집안에서 아버지의 이름에 쓰인 글자를 피하는 것도 전통으로 굳어졌다.

 

복잡한 지칭어, 두루뭉술한 ‘호칭어’

 

대신 우리말에는 ‘호칭’이 꽤 복잡하게 발달했다. ‘호칭’이라고 하지만 이는 ‘지칭어(가리킴 말)’와 ‘호칭어(부름말)’로 구분된다. 이를테면 ‘시숙(媤叔)’은 지칭어고 ‘아주버님’이나 ‘서방님’은 호칭어다. 지칭어는 사돈 팔촌까지 아우르다 보니 꽤 복잡한 편이지만 호칭어는 두루뭉술한 편이다.

▲ 아재, 아지매를 포함하는 '아저씨, 아주머니'는 우리에게 가장 일반적인 호칭이다.

흔히 낮춤말인 ‘아재’로 통용하는 ‘아저씨’는 “① 부모와 같은 항렬에 있는, 아버지의 친형제를 제외한 남자를 이르는 말, ② 결혼하지 않은, 아버지의 남동생을 이르는 말, ③ 남남끼리에서 남자 어른을 예사롭게 이르는 말, ④ 고모부나 이모부를 이르는 말.”(표준국어대사전)로 쓰이는바, 그 지칭의 범위가 꽤 넓은 것이다. ‘아주머니’도 비슷하다. [표 참조]

 

그런데 정작 우리에겐 낯선 사람을 부르는 적당한 호칭이 없다. 모르는 사람을 부르는 말로, 노인들은 ‘할아버지, 할머니’로, 중년 남녀는 ‘아저씨, 아주머니’로 부르지만 정작 같은 연령대의 사람끼리 서로를 지칭, 호칭하는 말은 참 모호하다.

 

고작 생각나는 말이 ‘형씨’나 ‘노형’ 같은 건달이나 쓸 만한 낱말들이니 더 말할 게 없다. ‘당신’이란 직접 가리킴 말도 부부간에나 쓰지, 낯선 관계에 쓰다가는 시비가 일기 십상이다. 당신 대신 잔뜩 돌려서 ‘댁(에)’라든가 ‘그쪽’, ‘거기’, ‘본인’, ‘말씀하시는 분’ 따위의 요령 부득인 말을 쓰는 경우도 흔하다. 이럴 때는 아무한테나 ‘너(you)’라고 부를 수 있는 언어가 부러워질 수밖에 없다.

 

여러 사람을 아우르는 호칭도 마땅치 않다. 공공기관이나 은행, 병원 등에서 방문객을 부를 때 쓰는 이름으로 마땅한 걸 찾기가 쉽지 않다. 초기에는 상대의 나이에 대한 고려 없이 ‘아무개 씨’의 형식으로 불렀던 것 같다. 그런데 5, 60대의 장년에게 20대 직원이 ‘씨’를 붙이는 건 장유유서의 유구한 전통이 살아 있는 우리 사회에서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다.

 

‘-님’, ‘손님’, ‘고객님’

이를 피해간 방법이 이름 뒤에다 ‘-님’을 붙이는 방식이다. 이 방법은 병원이나 민원부서를 둔 공공기관 대부분에서 아주 생광스럽게 이용하는 방식인 것 같다. 아이건, 어른이건 ‘님’자를 붙여서 실수할 일은 없는 것이다.

 

반면에 물건을 사고파는 영업장에서는 ‘고객’이라는 낱말이 주로 쓰인다. 불특정한 소비자를 가리키는 말로 ‘고객(顧客)’이라는 한자 말이 쓰이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고객’은 ‘소비자’라는 의미보다는 ‘방문객’의 의미가 강한 ‘손님’이라는 낱말을 순식간에 대체했다.

 

이 말이 가장 빈번히 쓰이는 곳은 대형 할인점일 것 같다. 여기서는 모든 소비자를 ‘고객님’이라 부른다. 이들 직원의 입에는 ‘고객님’이라는 말이 붙어 있다. 전화번호를 가르쳐 주는 114 안내원들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습관적으로 ‘사랑합니다, 고객님’을 외치고 있다.

 

그러나 ‘상점 따위에 물건을 사러 오는 손님’으로 풀이되는 ‘고객’이란 낱말이 주는 느낌도 그리 편하진 않다. 상대방에서야 예우하는 말로 쓰는 것이긴 하지만 왠지 거기엔 ‘정리’보다는 ‘사무적인 관계’라는 느낌이 아주 강하기 때문이다.

 

여성들은 어떻게 불리나 아내에게 물어보았다. 시장이나 동네 가게에선 편하게 ‘아줌마’나, ‘애기 엄마’ 정도로 불린다고 했다. 그러나 격이 좀 높아지는 쇼핑몰이나 백화점 등에선 호칭도 높아져 대체로 ‘사모님’으로 불린단다. ‘사장’으로 높여주는 남성에 비기면 여성에게는 사회적 지위와는 무관한 호칭이 여전히 쓰이는 셈이다.

 

얼마 전 전자제품 판매장에 들렀다가 다시 ‘사장님’ 소리를 지겹게 들었다. 그렇게 말하는 직원도 그 호칭을 그리 탐탁해 하는 것 같지 않았다. 차라리 ‘고객’으로 불리는 게 다소 편할지 모른다. ‘과공비례’는 사실이다. 과잉친절이 불편하듯 과잉예우로 불러주는 호칭도 불편한 것이다.

 

 

2012. 2. 18.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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