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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조선혁명당2

[오늘] 조선혁명군 여전사 오광심 선생 돌아가다 1976년 4월 7일, 여전사 오광심 선생 돌아가다 1976년 4월 7일 오전 6시 30분, 조선혁명군과 광복군 소속으로 일제와 싸웠던 오광심(吳光心, 1910~1976) 선생이 마포구 망원동 자택에서 예순여섯의 생애를 마감했다. 그는 남만주 조선혁명당 산하 조선혁명군(사령관 양세봉, 참모장 김학규) 사령부 군수처에서 복무하였고 유격대 및 한중연합 항일전에도 참여한 여전사였다. 오광심은 평안북도 선천 출신이다. 어려서 남만주로 이주하여 흥경현 왕청문에 있는 화흥중학(化興中學) 부설 사범과에서 공부하며 민족의식을 길렀다. 화흥학교는 1927년 민족주의 독립운동단체인 정의부(正義府)가 설립한 학교였다. 1920년대 후반 만주의 독립운동 진영에서는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정의부 주도의 전 민.. 2024. 4. 7.
중국에서 본 한국인 묘, 비석에 새긴 이름 읽는 순간 [대한민국 임시정부 노정을 따라 ⑤] 난징, 항공열사와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대한민국 임시정부(아래 임정)가 공식적으로 난징(南京)에 청사를 둔 일은 없다. 훙커우 의거 이후 상하이를 떠난 임정은 항저우에서 3년을 머물렀고, 1935년에는 난징과 자동차로 두 시간 거리에 있는 전장(鎭江)으로 옮겨갔다. 난징에 남은 임정의 자취들 당시 난징은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 수도였으므로 임정도 난징으로 가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임정이 난징 대신 전장으로 옮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일본의 협박 때문이었다. 일본 해군은 난징 성안에 임정 청사를 두면 양쯔강을 거슬러 올라가 난징을 폭격하겠다고 을러댔던 것이다. 청사는 전장에 두고 임정 요인들은 대부분 난징에 거주했다. 뤄양(洛陽)의 군관학교에 한인특별반을.. 2019. 3.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