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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친일문학 이야기 32

모윤숙, 영욕을 오간 렌의 선택 20세기 여류 명사로 살다 간 모윤숙(1909~1990) 우리는 높이 펄럭이는 일장기 밑으로 모입시다. 쌀도, 나무도, 옷도 다 아끼십시오. 나라를 위해서 아끼십시 오. 그러나 나라를 위해서 우리의 목숨만은 아끼지 맙시다. 아들의 생 명 다 바치고 나서 우리 여성마저 나오라거든 생명을 폭탄으로 바꿔 전쟁마당에 쓸모 있게 던집시다. - 「여성도 전사다」, 『대동아』(1942년 5월호) 산 옆 외따른 골짜기에 혼자 누워 있는 국군을 본다. 아무 말, 아무 움직임 없이 하늘을 향해 눈을 감은 국군을 본다. (……) 나는 죽었노라, 스물다섯 젊은 나이에 대한민국의 아들로 나는 숨을 마치었노라. 질식하는 구름과 바람이 미쳐 날뛰는 조국의 산맥을 지키다가 드디어 드디어 나는 숨지었노라. -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 2021. 12. 16.
김소운과 ‘문둥이의 조국’ 김소운의 ‘친일’과 의 분노 나는 우연히 이 시대에 처하고, 또한 마치 방패의 양면을 보는 위치에 있다. 일본문화의 본질을 이해하고 감수(感受)하는 일인 이상, 나는 어떠한 내지인에게도 뒤지고 싶지 않다. 동시에 당연한 사실로서 나는 조선의 청년이다. 조선의 금일이 명하는 과세(課稅)에 대해서 반 발자국의 후퇴도 도피도 나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것이다. 두 개의 언어를 가지는 고로 두 종류의 잠꼬대를 하고, 두 종류의 문장을 쓴다. 만요(萬葉)의, 잇사(一茶)의, 조루리(淨琉璃)의 정신이나 기분을 어느 정도 내가 체득하고 저작(詛嚼)해 내고 있는가. 자기 입으로는 어떻다고도 말할 수 없는 일이지만 오늘날 내 몸 속에 있는 ‘일본’은 지식이나 교양은 아니고 이미 생리요 생활임에 틀림은 없다. 동시에 나는 고.. 2021. 8. 4.
노천명, 여성 화자를 앞세운 친일시들 ‘사슴’의 시인도 일제에 부역했다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은 시인 노천명(盧天命, 1912~1957)의 「사슴」을 아느냐 모르느냐에 따라 답이 달라진다. 한 퀴즈 프로그램에서 유명 연예인이 과감히 ‘기린’이라고 답하여 장안의 화제가 되었듯 목이 길기로는 기린을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기린도 목이 길어서 슬픈가? 사슴이 ‘목이 길어서 슬픈 짐승’이 된 것은 한 시인의 부름을 받았기 때문이다.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외로운 삶’을 노래한 시에서 ‘사슴’은 곧 감정 이입의 기법으로 투영된 시인 노천명 자신이었다. 일제에 부역한 「사슴」의 시인 내가 우리 현대시를 처음 접한 것은 초등학교 때 한림출판사에서 펴낸 『영원한 한국의 명시』를 통해서였다. 나는 집안을 굴러다니던 세로쓰기의 이 장정 본 시집으로.. 2021. 5. 16.
김종한, 덧없는 이미지와 서정성 ‘낡은 우물이 있는 풍경’을 쓴 시인의 낯부끄러운 친일시 이 글은 2019년 5월에 출판된 단행본『부역자들-친일 문인의 민낯』(인문서원)의 초고임. [관련 기사 : 30년 문학교사가 추적한 친일문인의 민낯] 능수버들이 지키고 섰는 낡은 우물가 우물 속에는 푸른 하늘 쪼각이 떨어져 있는 윤사월(閏四月) — 아즈머님 지금 울고 있는 저 뻐꾸기는 작년에 울던 그놈일까요? 조용하신 당신은 박꽃처럼 웃으시면서 두레박을 넘쳐흐르는 푸른 하늘만 길어 올리시네 두레박을 넘쳐흐르는 푸른 전설(傳說)만 길어 올리시네 언덕을 넘어 황소의 울음소리는 흘러오는데 — 물동이에서도 아즈머님! 푸른 하늘이 넘쳐흐르는구료 - 「낡은 우물이 있는 풍경(風景)」, 《조선일보》(1937년 1월) 김종한(金鍾漢·月田茂, 1914~1944)의.. 2021. 2. 24.
안서(岸曙) 김억, 친일부역도 ‘오뇌의 무도’였나 조선 최초의 번역시집과 창작시집을 낸 소월의 스승 안서 김억 이 글은 2019년 5월에 출판된 단행본『부역자들-친일 문인의 민낯』(인문서원)의 초고임. [관련 기사 : 30년 문학교사가 추적한 친일문인의 민낯] 우리나라 신문학의 첫 장을 연 사람들이 대부분 친일파라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최초의 신체시를 쓴 최 남선, 첫 번째 신소설을 쓴 이인직, 최초의 현대시 「불놀이」의 주요한, 첫 현대 소설 「무정」의 이광수가 바로 그들이다. 안서(岸曙) 김억(金億, 1896~?)도 그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는 1921년 1월에 프랑스 상징파의 시를 중심으로 한 조선 최초의 현대 번역시집 『오뇌의 무도』를 번역해 펴냈고, 같은 해 6월에는 조선 최초의 현대 창작시집 『해파리의 노래』를 출판하였다. 소월의.. 2021. 1. 29.
파인 김동환, 일제에 엎드려 ‘웃은 죄’ 서사시 ‘국경의 밤’과 ‘산 넘어 남촌에는’의 시인 김동환의 친일 부역 이 글은 2019년 5월에 출판된 단행본『부역자들-친일 문인의 민낯』(인문서원)의 초고임. [관련 기사 : 30년 문학교사가 추적한 친일문인의 민낯] 파인(巴人) 김동환(金東煥·白山靑樹, 1901~?)이라면 낯선가. 그럼 혹시 「북청 물장수」나 우리나라 최초의 서사시라는 「국경의 밤」을 기억하시는가. 그도 저도 아니면 「웃은 죄」라는 시는 어떤가. 시골 마을 우물가 처녀와 한 나그네 사이에 오간 미묘한 교감을 과감한 서사의 생략으로 그려낸 이 짧은 시는 여운이 꽤 길다. 지름길 묻길래 대답했지요. 물 한 모금 달라기에 샘물 떠 주고, 그러고는 인사하기 웃고 받었지요. 평양성에 해 안 뜬대두 난 모르오. 웃은 죄밖에, 그래도 기억이 아.. 2020. 12. 16.
김기진, ‘황민(皇民) 문학’으로 투항한 계급문학의 전사 이 글은 2019년 5월에 출판된 단행본『부역자들-친일 문인의 민낯』(인문서원)의 초고임. [관련 기사 : 30년 문학교사가 추적한 친일문인의 민낯] 카프에서 활동한 비평가, ‘황민(皇民) 문학’에 투항 ‘기진’이라는 이름보다는 ‘팔봉(八峯)’이라는 호로 더 알려진 김기진(金基鎭· 金村八峯, 1903~1985)은 회월(懷月) 박영희와 함께 카프(KAPF=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의 주요 성원으로 활동한 이다. 그는 대체로 시인과 평론가로 소개되고 경향소설인 「붉은 쥐」(1924)를 쓰기도 했지만, 대중적 시인이나 작가로 알려진 이는 아니다. 파스큘라, 카프 등 계급문학의 주역 오히려 그는 우리 문학사에서 매우 소략하게 소개되는 1920년대 이후 계급문학(프로문학)의 전개에 매우 비중 있게 다루어지는.. 2020. 11. 9.
김동인, 혹은 ‘문필보국(文筆報國)’의 전범 이 글은 2019년 5월에 출판된 단행본『부역자들-친일 문인의 민낯』(인문서원)의 초고임. [관련 기사 : 30년 문학교사가 추적한 친일문인의 민낯] 김동인(金東仁·東文仁, 1900~1951)은 우리 소설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는 춘원 이광수와 함께 초기 현대소설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소설 문장을 과거형 시제로, 영문의 ‘he’와 ‘she’에 대응하는 ‘그’와 ‘그녀’라는 삼인칭 대명사를 정착시킨 게 이들 작가인 것이다. 김동인의 아버지는 평양의 대부호인 기독교 장로 김대윤, 일제 강점기 때 각종 친일 단체에서 활동하고 제헌국회 부의장을 지낸 김동원이 이복형이다. 동인은 일본 유학 중이던 1919년 2월, 도쿄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순문예 동인지 『창조(創造)』를 창간했다. 그는 주요한을.. 2020. 11. 2.
최남선, 죄과(罪過)는 다섯 가지나 나는 ‘무죄’다 참회의 ‘자열서’에서조차 무죄를 주장한 ‘해에게서 소년에게’의 시인 우리는 신체시(新體詩) 「해에게서 소년에게」(1908)의 작자로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 1890~1957)을 만난다. 최초의 신체시로 평가되는 이 노래는 근대 자유시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서 문학사적 의의가 있을 뿐, 정제된 형식을 갖추거나 일정한 장르적 특성을 지닌 시편으로는 볼 수 없다. 이 작품은 그가 창간한 잡지 『소년(少年)』 창간호(1908년 11월호)에 실렸는데, 이때 그는 열여덟 살이었다. 요즘 같으면 고등학교 졸업반일 나이에 잡지를 창간하였다는 게 놀랄 만한 일이지만, 그것은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독학으로 한글을 깨쳐 열한 살 때부터 《황성신문》에 투고하던 육당의 비범성과 함께 근대로 이행하던 ‘시대’의 소산.. 2019. 12. 29.
“동인문학상·팔봉비평문학상 폐지해야 하는 이유는…” 작가회의·민족문제연구소 주최 학술세미나 ‘친일문인 기념문학상’ 이대로 둘 것인가' 지난 11일 오후 서울시청 서소문별관에서 3.1운동·임시정부 100주년 기념 학술세미나 가 열렸다. 한국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회와 민족문제연구소가 주최한 이번 세미나에서 다룬 문학상은 동인문학상(조선일보)과 팔봉비평문학상(한국일보)이었다.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의 기조 강연으로 시작된 세미나는 동인문학상과 관련해서는 고인환(경희대), 하상일(동의대), 임성용(시인)의 발표와 서영인(국민대), 이동순(조선대), 손남훈(부산대)의 토론이, 팔봉문학상 관련해서는 이명원(경희대)의 발표와 최강민(우석대)의 토론으로 진행됐다. 임헌영 소장은 친일파 청산이 '빨갱이'로 매도되는 현실에서 민족문제연구소는 지속적인 활동을 통해 공인된 친일.. 2019. 5. 16.
30년 문학교사가 추적한 친일문인의 민낯 [책이 나왔습니다] 책이 나왔다. 원고를 넘긴 게 지난해 11월 중순이니 432쪽짜리 단행본 1권이 나오는 데 꼬박 다섯 달이 걸렸다. 물론 난생처음 펴낸 책이다. 블로그 '이 풍진 세상에'를 열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끼적인 지 10년이 넘어서다. 책이 나왔다는 걸 실감한 건, 온라인 서점에서 검색이 가능해지면서다. 젊은 시절 한때, 문학에 뜻을 두기도 했지만, 교직에 들어 서른을 넘기면서 '문학'에 관심을 끊은 이후 나는 한번도 글쓰기를 고민하거나 쓰고 싶다는 생각 따위는 하지 않고 살았다. 스무 해쯤 지나, 오래 몸담은 교원단체 활동에서 놓여 온전히 자신의 시간을 꾸리게 되면서 나는 한두 편씩 끄적인 글로 '블로그'에 입문했다. 블로그에서 글쓰기 시작 오마이뉴스 블로그에 모두 1700편이 넘는 글을 쓰.. 2019. 5. 8.
주요한, ‘야스쿠니의 신’이 되도록 천황을 위해 죽으라 ‘천황을 위해 죽으라’고 권유한 ‘불놀이’의 시인 주요한 조선총독부가 ‘조선민사령’을 개정한 것은 1939년이고, 이에 따라 조선에서도 일본식 씨명제(氏名制)를 따르도록 명령한 것은 1940년이었다. 이른바 ‘창씨개명’은 거칠게 정리하면 조선 사람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일본인이 되라는 요구였다고 할 수 있다. 대부분 조선인이 이 정책에 반대하였지만 이에 적극적으로 호응한 친일파도 적지 않았다. 우리나라 최초의 자유시 「불놀이」의 시인 주요한(朱耀翰·松村紘一, 1900~1979)도 여기 당당히 이름을 올린다. 총독부의 내선일체 체제에 적극적으로 호응하여 일본어 시집 『손에 손을(手に手を)』(1943)까지 낼 정도의 극렬 친일파 주요한은 기꺼이 황국신민의 은혜에 감읍해 마지않는다. ‘마쓰무라 고이치(.. 2019. 2. 24.